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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비와 같은 사람, ‘에바브로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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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6,576회 작성일 14-04-27 13:42

본문

단비와 같은 사람, ‘에바브로디도’

빌2:25~30

2014. 4/27. 08:00, 11:00

그런 사람이고 싶다.

 

말없이 바라만 보아도 흐뭇해지는 사람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사람

웃어주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사람

만날 때마다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사람

만났다 돌아서는 순간 이내 그리워지는 사람

보면 볼수록 새록새록 정이 깊어가는 사람

목소리만 들어도 불끈 힘이 솟는 사람

따뜻한 난로와 같은 사람

편안하고 안락한 의자와 같은 사람

무더운 한여름 낮 시원하게 쏟아져 내리는 단비 같은 사람

그런 사람이고 싶다.

 

오늘 본문에 그런 사람이 나온다. 따뜻한 난로와 같고, 편안한 의자와 같고, 시원한 단비와 같은 사람이 나온다. 흐뭇하게 시원하게 풍요롭게 불끈 힘이 솟게 하는 사람이 나온다. 그는 빌립보 교회의 사역자 ‘에바브로디도’(Epaphroditus)다. 에바브로디도는 ‘사랑스러운’이란 뜻으로 로마제국 시대에 흔한 이름이라고 한다. 그의 이름을 줄이면 ‘에바브라’인데, 같은 이름이 빌레몬서에 나온다. 그는 골로새교회의 사역자(:23)로 동명이인이다. 그런데 에바브로디도나 그 이름의 단축형인 에바브라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Aphorodite)에서 온 것이다. 아마도 그의 부모가 여신 아프로디테처럼 사랑과 존경을 받는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라는 의미로 이런 이름을 지어준 것 같은데, 그는 그가 섬기는 빌립보교회와 바울에게 사랑과 존중을 받은 사람이었다. 본문에서 바울은 그를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25)고 극진(極盡)하게 소개하고 있다. 그가 이렇게 그의 영적 스승인 사도 바울과 섬기는 교회 지체들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게 된 이유가 본문에 잘 나타나 있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든 사람들

 조선 인조 때 정승을 지낸 홍서봉의 어머니 일화다. 그의 어머니는 가난한 살림에도 자식을 훌륭하게 키운 것으로 유명하다. 하루는 그의 집에 귀한 손님이 찾아왔다. 어머니는 하녀를 시켜 푸줏간에 가서 고기를 사오도록 하였다. 그런데 하녀가 사온 고기가 상한 것이었다. 어머니는 급히 방으로 들어가 소중하게 간직하던 비녀와 가락지들을 꺼내 하녀에게 주며 말했다. ‘어서 푸줏간으로 가서 남은 고기를 모두 사오너라.’ 상한 고기를 바꿔오라는 것이 아니라 모조리 사오라는 것이다. 이를 지켜본 그가 어머니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이 상한 고기를 사다 먹으면 탈이 날 것 아니냐?’ 그는 남을 위해 자신의 손해를 기꺼이 감수하는 어머니의 깊은 뜻에 머리를 숙였다. 그는 정승의 자리에 올랐어도 어머니의 가르침을 늘 마음에 새겨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생활을 했다.

 

대개의 사람들은 위기상황에 직면하면 자기를 먼저 생각한다. 그래서 위기의 순간에 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고 돌보는 사람을 ‘의인’이라고 한 것이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했기에 그렇게 칭송하는 것이다. 금번 세월호 사건은 온 나라를 깊은 슬픔과 비통에 빠뜨렸다. 특히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사람들의 태도는 분노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런 와중에도 자신을 돌보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 살신성인을 실천한 사람들이 있었다. 난간에 매달린 채 제자들에게 구명조끼를 나눠주고 객실의 제자들을 더 구하려고 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선생님, 자기 몸도 가누기 힘든 어려운 상황에서 배의 곳곳을 다니며 구명조끼를 가져다가 승객들에게 나눠주고 끝내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온 승무원, 자신의 구명조끼를 친구에게 벗어주고 또 다른 친구를 구하려다 희생된 어린 학생 등이 그들이다. 그들의 희생은 많은 안타까움과 함께 커다란 감동을 주고 있다. 이 끔찍하고 비통한 재난 속에서 한줄기 환한 빛이 되고, 시원한 단비가 되고 있다. 세상이 아직 살만하고, 또한 아름다운 이유는 바로 이런 사람들 때문이다. 본문에 나온 에바브로디도 또한 이런 사람이다.

 

1. 자기보다 남을 먼저 배려하는 사람이다.

장자(長子)의 가르침이다. ‘작은 주머니에는 큰 것을 넣을 수가 없고, 짧은 두레박줄로는 깊은 우물의 물을 퍼 올릴 수가 없다. 이처럼 그릇이 작은 사람은 큰일은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릇의 크기는 바로 마음의 크기다. 그릇의 크고 작음을 결정하는 것은 지식의 많고 적음, 지위의 높고 낮음, 재물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 그 사람의 됨됨이, 즉 마음씀씀이가 어떤가에 달려있다. 자신을 뒤로 물리고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 배려가 깊은 사람, 손해를 보더라도 모두를 위할 줄 아는 사람, 함께 아파하고 함께 기뻐할 줄 아는 사람이다. 에바브로디도가 그런 사람이다. 그는 빌립보 교회를 대표하여 감옥에 갇힌 바울을 도우려왔다가 죽을 병에 걸렸다(27). 그런데 그는 그 위기의 순간에 자신의 안위보다 빌립보 교회 지체들을 먼저 생각했다. 자기로 인하여 지체들이 걱정할까 염려했다.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26).

 

이것이 성숙한 신앙, 성숙한 인격이다. 자신이 죽을 수도 있는 지경인데, 그 순간에도 이러한 자기로 인하여 상처를 받거나 실족한 사람들이 있을까 걱정한 것이다. 자나 깨나 지체들을 먼저 생각하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바울은 그의 이런 아름다운 마음과 태도를 그대로 교회 지체들에게 전하면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존귀하게 여기라고 당부하였다(29).

 

2. 주님의 일을 자기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다.

한 곤충학자가 개미를 연구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개미집에 불이 났는데, 개미들이 불에 자신의 몸을 던져 불을 끄는 것이다. 미물인 개미도 불을 보고 도망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개미를 살리기 위해서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자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그리고 이를 온 몸으로 실천한 것이 십자가 사건이다. 십자가의 희생이 나를 비롯하여 온 인류를 구원에 이르게 한 것이다. 이것이 신자인 우리가 따라야할 삶의 모범이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 지체들에게 에바브로디도를 모든 기쁨으로 영접하고 존귀하게 여기라고 당부한 또 하나 이유가 있다. 주의 일에 대한 그의 태도다. 그는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않고 주의 일에 헌신하고 희생했다.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30).

 

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고, 그에게 주님이 어떤 존재인가를 잘 보여주는 말씀이다. 그는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않았던 충성스러운 사람, 주님을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희생적인 사람이란 뜻이다. 이것이 주님을 따르는 사람, 그리고 주님을 섬기는 사람의 모습이다. 믿음은 주님을 우선순위에 두는 것이다. 때문에 주님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살면서 꼭 점검해야 할 것이 있다. ‘나는 최근에 주님을 위해 어떤 희생과 헌신을 했는가? 나는 주님을 위해 어떤 눈물과 땀을 흘리고 있는가?’ 우리가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돈을 가졌는지, 얼마나 높은 지위에 올랐는지, 얼마나 좋은 직업을 가졌었는지, 어떤 좋은 대학에 나왔는지’로 판단하지 않으실 것이다. 대신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얼마나 눈물과 땀을 쏟았고, 얼마나 헌신하고 희생하였고, 얼마나 충성하였느냐를 볼 것이다. 앞에서 말한 자신보다 남을 먼저 배려하는 태도 역시 이러한 헌신과 희생하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충성스러운 믿음의 사람은 반드시 ‘주님의 긍휼하심을 받아지체들에게 환영을 받게 되고, 지체들에게 존귀하게 여김을 받게 되고, 문제(질병)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taker, matcher, giver

옛날에 프랑스 어떤 시골에서 주민이 전체 회의를 열었다. 복음정신으로 살기 위해서, 공동기금을 모아서 이웃사랑을 실천하자는 주제로 열린 회의였다. 어떤 사람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나눔을 실천하기 위해서 마차를 두 대 가진 사람은 마을에 한 대를 기증하자.’ 이 제안은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다른 사람이 또 다른 제안했다. ‘마차만 있고 말이 없으면 안 되니까, 말을 두 마리 가진 사람은 한 마리씩 기증하자.’ 이 제안도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세 번째 제안이 나왔다. ‘말과 마차를 보관할 수 있는 창고가 필요하니 창고를 두 개 가진 사람은 한 개를 기증하자.’ 이 제안 역시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일어나 말했다. ‘나는 너무 가난해서 마을을 위해 내놓을 것이 없다. 그러나 나도 뭔가 참여하고 싶다. 나에게는 닭이 두 마리 있는데, 한 마리를 기증하겠다. 다른 사람들도 닭이 두 마리 이상 있다면 한 마리씩 내놓자.’ 그 제안에 대해서 투표를 한 결과, 제안자 한 사람만 빼고 모두 반대해서 부결되었다. 왜 그랬을까? 말이나 마차나 창고를 가진 사람은 하나도 없었지만 닭은 마을 사람들 모두 있었기 때문이다. 섬김의 중요성, 필요성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자신의 것을 내어놓고 실천하는 일은 쉽지 않다. 희생이 따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는 것보다 더 많은 이익을 챙기려는 사람(taker), 받는 만큼 주는 사람(matcher)보다 ‘자신의 이익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giver)이 더 잘되고 형통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주님 앞에서는 강하고 독한 자가 모든 것을 가져간다는 ‘승자독식’ 논리가 성립될 수 없다. 또 착한 사람은 이용만 당할 뿐 성공하기 어렵다는 불문율도 사라지게 된다. 에바브로디도처럼 ‘바쁜 와중에도 누군가를 돕고,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남을 배려하고, 남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양보하며 희생하는’ 사람(giver)이 성공 사다리의 맨 꼭대기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신자는 이런 사람을 알아주고, 환영하고, 존귀하게 여겨야 한다.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에바브로디도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은 물론 그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탄생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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