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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된 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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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1,718회 작성일 16-12-04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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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된 기다림

눅1:5~17

2016. 12/4. 11:00(대강절Ⅱ) 

기다림은 전투다!

인생은 기다림이고 하루하루가 기다림의 연속이다. 밤에는 아침을 기다리고 겨울에는 봄을 기다린다. 약속시간과 전화 오기를 기다리고, 보낸 편지 답장오기를 기다리고, 누군가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좋은 소식을 기다린다. 기다림은 우리의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든든한 버팀목이다. 신앙생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기도응답을 기다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기다리고, 병 낫기를 기다리고, 문제해결을 기다리고, 믿음의 성숙을 기다리고, 교회의 부흥을 기다린다. 모든 것이 기다림이다. 그런데 이런 기다림은 영적 싸움이다. 기다림을 방해하는 사단의 저항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다려야 함을 알면서도 기다림에 실패를 하고, 기다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다림은 처절한 영적 전투다.

 

 

성경은 기다림에 대한 이야기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면, 잘난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다만 약속의 말씀에 의지하여 잘 기다렸던 사람들이다. 기다림에 성공했던 사람들이다. 아브라함은 25년 동안 무자함의 세월을 기다렸고, 야곱은 축복에 대한 사무침으로 21년이라는 험악한 세월을 기다렸다. 요셉은 상처와 억울함으로 얼룩진 13년의 세월을 기다렸고, 모세는 외로운 광야에서 사명에 대한 목마름으로 40년을 기다렸다. 다윗 역시 사울의 칼을 피하며 도망자로서 10년을 기다렸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들을 기다림이라는 용광로에 던져서 녹아지게 하신다. 이런 기다림이 있어야 낮아지고 부서지고 정화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설렁탕에 사용할 국물을 우려내기 위하여 8시간 정도 기다려야한다. 우리의 세속적인 거품과 기름기는 기다림으로만 제거되고 진국이 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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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 없고 나이가 많더라.

본문에도 기다림의 치열한 싸움에서 승리한 사람이 나온다. 제사장 사가랴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그 주인공이다. 그들은 예수님보다 6개월 앞서 태어나서 예수님의 길을 준비했던 세례요한의 부모다. 본문은 세례요한의 탄생과 관련된 에피소드다. 본문은 이들 부부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6). 이들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스러운 부부였다는 뜻이다. 상식적으로 이렇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충성스러운 부부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하는데, 이 부부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자식이 없었다(7a). 유대인은 자식을 하나님의 축복과 기업으로 믿고 있었다(시127:3). 그러니 자식이 없다는 것은 대단한 수치로 여겼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저주(징벌)로 여겼다. 이것은 왕족이나 제사장 가문일수록 더욱 그랬다. 이렇게 소중한 복에서 그들이 제외가 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제라도 자식을 낳으면 되겠지만 문제는 두 사람의 나이가 너무 많았다(7b). 생물학적으로 자식을 낳을 수 없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이들 부부의 기다림은 헛수고였을까?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은 역전의 명수요,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이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은 사상누각(沙上樓閣)이다. 일찍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해 이를 잘 보여주셨다. 아브라함 부부 역시 생물학적으로 자식을 낳을 수 없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당시 아브라함은 99세였고, 그의 아내 사라는 89세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들을 주셨다. 이처럼 불가능을 가능으로,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어주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시다. 이와 같은 역전의 은혜가 사가랴 부부에게서도 일어났다. 예수님께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마11:11)라고 칭찬을 하셨던 세례요한이 이들 부부에게서 태어났다. 본문에서 주의 천사 역시 세례요한을 ‘주 앞에 큰 자가 될 것’(15)이라고 말하였다. 사가랴 부부는 늦었지만 믿기 어려운 큰 복을 누리게 된 것이다(18). 이것이 기다림의 복이다. 많이 기다리고, 올바로 기다리고, 끝까지 기다린 사람이 누리는 복이다. 저와 여러분과 우리 교회에도 이런 복이 임하기를 소원한다. 본문은 사가랴 부부가 아들을 얻기까지 어떻게 기다렸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에게도 좋은 귀감이 된다.

 

맡겨진 직무를 다하면서 기다렸다(8).

본문을 보면 사가랴 부부에 대한 6절 말씀의 표현이 결코 지나치지 않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사실 자기 코가 석자나 되는데도 그런 티를 전혀 내지 않고 여전히 자신의 순서에 따라 직무에 충실한 사가랴의 모습은 감동 그 자체다.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행할세.”(8). 상황이 이쯤 되면 대개의 사람들은 ‘평생 곁눈질 한 번 하지 않고 섬긴 결과가 이것이냐’며 불평을 터뜨린다. ‘내 문제에 대하여 눈을 감고, 귀를 막아버린 하나님을 더는 못 섬기겠다.’고 분노를 쏟아낸다. 어떤 사람은 아예 실망하여 돌아서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께 속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스가랴는 자신의 문제에 묵묵부답인 하나님께 대하여 어떤 불평도, 어떤 원망도, 어떤 서운함도 내비치지 않고 오히려 자신에게 주어진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였다. 이것이 믿음이고, 이것이 충성이다. 참된 믿음은 어떤 상황에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참된 충성은 어떤 상황에도 맡겨진 일에 대하여 묵묵히 실천하는 것이다. 본문이 스가랴를 하나님 앞에 의인이고, 모든 명령과 규례에 흠이 없는 자라고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기다리는 자세였다.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본분과 사명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곧 기다리는 것이다.

 

 

기도하면서 기다렸다(13).

본문은 우리에게 사가랴 부부의 기다림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그 첫 번째 사건이 사가랴가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게 된 것이다. 당시 유대에는 2만 여명의 제사장이 있었고, 이들을 24개의 조로 나누어 1년에 2주간씩 성전을 섬겼다. 모든 직무는 제비를 뽑아서 담당을 했는데, 당시 제사장들이 가장 영광스럽게 생각했던 직무가 있었다. 그것은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놓인 향단에 분향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제사장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소중한 기회가 지금 사가랴에게 주어진 것이다(9).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그냥 우연이었을까? 아니다. 그의 기다림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가까웠다는 증거다. 그래서 그가 이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성전에 들어가 향단에 향을 피우고 기도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갑자기 주의 사자(천사)가 나타났다. 이것이 두 번째 증거다.

 

향단에 분향을 하고 기도하고 있는 그에게 갑작스런 천사의 출현은 큰 두려움이었다. 아무리 의인이라도 그 역시 부정한 인간이다. 부정한 인간에게 영적 존재의 출현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게다가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사실 어마어마한 일이 그에게 일어난 것이다. 그러니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고, 그런 그에게 천사가 말했다.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13). 여기에 기다림의 방법이 또 나온다. 그것은 ‘기도’다. 그는 기도하면서 기다렸다.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흔히 우리는 ‘기도’(προσευχη)와 ‘간구’(δεησις)를 거의 같은 의미로 혼용해서 사용한다. 그렇지만 ‘기도’는 일반적으로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고, ‘간구’는 구체적이고 특별한 문제를 가지고 절실하고 절박하게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은 간구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사가랴가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드리는 일반적인 기도가 아니라 자신만의 특별하고 구체적인 문제를 가지고 기도했다는 뜻이다. 그에게 그 특별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자식이다. 자식을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한 것이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들린지라’ 라는 동사의 시제다. 이는 부정과거형이지만 여기서는 ‘무시간적인’ 부정과거형이다(A. T. Robertson). 무시간적 부정과거형이란 ‘과거 어느 시점에서부터 현제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과거 어느 시점에서부터 현제까지 계속해서 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즉 ‘과거에도 들렸고, 지금도 들린다.’는 의미다. 이는 사가랴가 자신의 특별한 간구를 단순히 일회적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간구했다는 것이고, 또한 이러한 그의 간구에 하나님은 계속해서 듣고 계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간구에 대한 응답을 천사가 가지고 온 것이다. 기도는 그 자체가 기다리는 것이다. 기다림이 없으면 기도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기다림도 기대도 없는 사람이다. 기도와 기다림은 짝꿍이다.

 

기다림의 복

기다림의 반대는 조바심이고, 조바심의 뿌리는 불신앙이다. 조바심은 사단이 성도를 무너뜨리기 위해 즐겨 사용하는 코드 중에 하나다. 사단은 언제나 ‘당장 이루라’ 재촉하며 충동한다. 그래서 누구든지 이 조바심에 사로잡히면 영적 센서가 작동을 중지하거나 오작동을 일으킨다. 이것이 성경에서 실패한 사람들의 공통점이다. 기다림에 실패한 사람들을 보면 모두가 불신앙에 뿌리를 둔 조바심 때문이었다. 반면 기다림의 뿌리는 신뢰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약속의 말씀을 신뢰한 사람은 끝까지 기다릴 수 있다. 사가랴처럼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면서 기다리고, 항상 기도하면서 기다린다. 그래서 기도응답을 경험하고, 전도의 열매도, 교회의 부흥도, 사람의 변화도, 문제의 해결도, 믿음의 성장도 경험하게 된다. 사가랴처럼 자신의 안타까운 문제를 해결받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이와 같은 수많은 기다림의 복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은 우리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대강절 둘째주일이다. 사가랴처럼 주어진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고, 자나깨나 기도하면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자! 그래서 기다림의 복을 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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