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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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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1,289회 작성일 16-12-25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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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눅2:1~10(신89면)

2016. 12/25. 11:00(성탄절, 송년주일)

블루 크리스마스(Blue Christmas)

성탄절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기쁘고 즐거운 날이다. 하지만 이 날을 힘들어 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런 사람들에게 성탄절은 기쁘고 즐거운 날(White Christmas)이 아니라 우울한 날(Blue Christmas)이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위한 ‘블루 크리스마스 예배’가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는 크리스마스 캐럴이나 밝고 즐거운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다. 빨간색이나 금색의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 대신 슬픔을 상징하는 파란색 천이 걸리고, 초록색 나무장식 대신 죽은 나뭇가지로 장식을 한다. 주로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이나 이별, 이혼 등으로 갑자기 생긴 빈자리를 견디기 어려워하는 소위 ‘빈 의자 신드롬’(empty chair syndrome)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주님으로 그 빈자리를 채워서 위로하기 위해 시작된 예배다. 참석자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마음껏 우는 순서도 있다고 한다. 아직은 일부 교회에서 드리고 있지만 사람들에게 상당한 위안이 된다는 평을 듣고 있다. 주님의 탄생이 모두에게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도록 하기 위한 아름다운 배려라 생각다.

 

 

성탄절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개입해 오셔서(breakthrough) 함께 하시는 사건이다(K. Barth).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עמנואל) 사건이다. 그러기 위해서 영원한 존재이신 하나님이 유한한 존재인 사람이 되신 ‘성육신’(Incarnation) 사건이다. 특히 하나님이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 삶의 빈자리에 찾아오신 사건이다. 이런 이유로 성탄을 기적 중에 기적이라고 부른 것이다. 성탄은 우리가 구원을 얻고, 위로를 얻고, 평안을 얻고, 그 무엇으로도 맛 볼 수 없는 영생의 참된 기쁨을 경험하게 한다. 그래서 성탄을 ‘큰 기쁨의 좋은 소식’, 특히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10)이라고 한다. 모두가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 좋은 소식이 성탄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성탄이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모쪼록 뜻 깊은 성탄절을 맞아 이와 같은 성탄의 정신을 온전히 실현되는 날이 속히 오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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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저계급론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때아닌 ‘계급논쟁’이 화제가 되고 있다. 흙수저를 비롯해서 나무, 동, 은, 금수저 등으로 불리는 소위 ‘수저론’이 그것이다. 수저론의 풍자에 의하면, 금수저는 영어유치원을 다니지만 흙수저는 어린이집에서 교사에게 폭행을 당하고, 초·중·고교시절 금수저는 어학연수를 가지만 흙수저는 PC방에서 게임을 하고, 대학시절 금수저는 화려한 파티를 즐기지만 흙수저는 편의점에서 알바를 한다. 대학졸업 후 금수저는 낙하산으로 좋은 직장에 취업하지만 흙수저는 면접관에게 90도 폴더 인사만 한다. 은퇴 후 금수저는 해외여행 다니며 노후를 즐기나 흙수저는 판잣집에서 쓸쓸히 늙는다.

 

문제는 이런 시대착오적인 말도 안되는 이야기가 우리 사회에서 설득력을 가진다는 사실이다. 평등을 부르짖지만 불평등이 여전히 존재하는 사회, 그래서 이런 말들이 유행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수저론’은 청년들의 자조(自嘲)와 비아냥, 기성세대를 향한 조소, 반항의 표현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청년들의 꿈을 죽이는 사회적 메르스(MERS, Middle East Respiratory Syndrome)라 할 수 있다. 이는 우리 사회가 그만큼 불행하다는 뜻이고, 또한 그만큼 행복을 열망한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렇게 불행한 상황에서 행복을 열망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답을 줄 수 있을까? 주님의 성탄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본문을 통해 주님의 성탄을 생각하며 그 의미를 생각해 보자. 특히 낮은 자로 오셔서 낮은 자들에게 경배를 받으신 의미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낮은 자로

주님은 전형적인 ‘흙수저’로 태어나셨다. “첫 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7). 이 한 구절의 말씀은 부모였던 요셉과 마리아의 사회적 경제적 상황, 그리고 주님의 비극적인 탄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온 백성에게 미칠 기쁨의 좋은 소식의 주인공이 여관방을 구할 수가 없어 구유에서 탄생하셨다는 것이다(어떤 산모 이야기). 주님은 말씀 그대로 목수의 아들로, 여관방 하나 구할 수 없는 가난한 집안에서 흙수저를 물고 태어나셨다.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냄새나고 누추한 마구간의 구유에서 흙수저로 태어나셨다. 하늘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금수저를 물고 왕자로 왕궁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흙수저를 물고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베들레헴 어느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다. 가장 낮고 천한 자로 오셨다는 뜻이다.

 

낮은 자에게

이와 같은 주님의 초라한 탄생을 더욱 초라하게 만든 것은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찾아온 축하객이다. 탄생축하마저 별 볼 일 없는 정말 한심한 사람들에게 받으셨다. 주님의 탄생을 가장 먼저 알게 된 사람들은 유대를 다스리고 있던 정치 지도자도, 종교 지도자도, 성경에 밝은 학자도,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력한 사람들도 아니었다. 베들레헴 인근에서 저녁에 양을 지키던 목자들이었다(8~10). 천사가 그들에게 가장 먼저 주님의 탄생소식을 알려주었다. 이렇게 낮은 자로 오신 주님은 낮은 자들에게 가장 먼저 축하를 받으셨다(15~19).

 

요야김 예레미야스(J. Jeremias)에 의하면, 당시 유대사회에서 목자는 고용된 양치기로 사회적, 경제적으로 하층민에 속했다. 또한 그들은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로 취급받았다. 그래서 법정에서 증인으로 세우지 못하도록 했다(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음). 그 지역은 비가 적어 풀밭이 흔치 않기 때문에 그들은 풀밭을 찾아서 양들과 함께 늘 떠돌아다녔다. 이렇게 떠돌이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라 주인의 감독으로부터 벗어나 있었고, 게다가 박봉에 시달렸기 때문에 자주 양이나 양털, 혹은 양의 젖을 주인 몰래 팔아먹었다. 그래서 경건한 유대인은 목자와 직접 거래하지 않았다. 그들이 파는 물건은 열에 아홉이 훔친 물건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이런 선입견 때문에 그들은 어디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했다. 심지어 성전에서조차 경건하지 못한 죄인 취급을 받았다. 양들과 함께 떠돌이 생활을 하다 보니 예배생활에 충실할 수가 없었고, 안식일을 비롯한 율법을 제대로 지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목자는 유대인이 세리와 함께 가장 싫어하는 직업이었다. 그러니 목자들은 당시 유대사회에서 전형적인 ‘흙수저’였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그들에게 성탄의 첫 목격자의 영광을 주시고, 또한 첫 증거자가 되게 하셨다.

 

흙수저에게 희망을

하늘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흙수저를 물고 낮은 자의 모습, 천한 자의 모습으로 오신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평판이 좋지 않은 당시 대표적인 흙수저였던 목자들에게 성탄의 첫 목격자의 영광을 주시고, 또한 첫 증거자가 되게 하신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다. 그것은 자신이 흙수저라고 탄식하는 사람들에게 주님도 전형적인 흙수저였음을 보여주고, 자신을 낙오자, 곧 ‘루저’(Loser)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주님 역시 여관방 하나 구하지 못하고 마구간으로 쫓겨난 ‘낙오자’(Loser)였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서다. 이런 사람들을 품기 위해서다. 또한 이런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기 위해서다. 같은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는 공감과 이해를 끌어낼 수가 없다. 성탄의 의미에 대한 바르트의 설명이 이를 잘 말해준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귈 수가 없고, 하나님의 영원과 인간의 유한이 서로 만날 수가 없어서 인간과 영원히 친구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이 친히 인간이 되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이것이 성탄의 의미이고, 주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그것도 가장 낮은 자의 모습, 가장 천한 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이유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구원의 주체인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다. 하나님은 평판이 좋지 않은 목자들에게 성탄의 첫 목격자의 영광을 주셨다. 또한 성탄의 첫 증거자가 되게 하셨다. 많은 설교자들은 목자들이 성탄의 첫 목격자가 되고, 첫 증거자가 된 이유로 여러 도덕적이고 영적인 의미들을 이야기한다(설명생략). 물론 의미는 있을 수 있지만 불필요한 일이다. 여기사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목자들이 사회적으로 환영받지 못한 직업에 멸시를 받는 신분, 곱지 않는 선입관, 거기다가 신앙적으로 죄인 취급을 받았지만 주님의 성탄에 있어서는 중요한 인물이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이는 목자들뿐만 아니다. 베들레헴이라는 유대의 지역과 어느 누추한 마구간도, 그리고 요셉과 마리아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들 모두가 낮은 자, 낮은 지역이었다. 이는 누구라도, 즉 흙수저라도, 루저라도 주님이 사용하시면 구원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주님께서 이 땅에 낮은 자로 오셔서 낮은 자들에게 경배를 받으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니 성탄은 모두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인 것이다. 특히 흙수저인 저와 여러분에게 더욱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찬양하고,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또한 감격스러워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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