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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어도 십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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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0,927회 작성일 17-01-15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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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어도 십일조

마23:23

2017. 1/15. 11:00

쇠똥도 받으신다.

몽골에서 사역하는 선교사의 간증이다. 주일예배에 현지인 성도가 큰 자루 하나를 들고 나왔다. 헌금이라며 가져온 것인데, 말린 쇠똥이었다. 몽골에서 쇠똥은 아주 소중하다고 한다. 벽에 발라두면 추운 겨울에 난방효과가 탁월하고, 땔감으로도 아주 유용하게 쓰이기 때문이다. 몽골은 겨울이 길어서(8월 중순부터 이듬 해 6월초까지 눈이 오는 곳이 있음), 겨울을 나려면 많은 난방비가 필요한데, 그것을 쇠똥으로 대신한다. 이분이 그 귀한 땔감인 쇠똥을 하나님께 드린 것이다. 이에 감동을 받은 선교사님이 그를 위해 간절히 축복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다음 날부터 놀라운 일은 일어났다. 그 마을의 있는 소들이 그 성도의 집 앞으로 와서, 혹은 지나갈 때마다 볼일을 보고 가더라는 것이다. 그러자 계속해서 쇠똥이 쌓여갔다. 그래서 그 해, 그 성도는 난방비를 전혀 들이지 않고 겨울을 보냈고, 심지어 남은 쇠똥을 팔아 생활비까지 벌었다고 한다. 주님께서 성도의 순수한 헌신을 기쁘게 받으신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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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시험하라!

성경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신6:16, 시78:40,41)고 말씀하고 있다. 하지만 예외가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십일조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3:10).

 

여기서 하나님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시험하라고 하셨다. 이런 이유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안식일 준수와 함께 철저하게 지킨 것이 십일조다. 본문에서 예수께서도 저들의 철저한 십일조 생활을 인정하셨다. 심지어 푸성귀의 십일조까지 바쳤다. 그리고 성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이 십일조 생활을 충실히 할 때는 신앙적 국가적인 부흥이 일어났고, 풍요롭고 평화로운 삶을 누렸다. 모든 일에 형통했다. 그런데 십일조 생활을 소홀히 할 때는 신앙적 국가적인 위기를 맞았고, 극심한 사회적 양극화, 궁핍하고 불안정한 삶을 살았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일조는 신앙의 부흥과 국가의 번영을 부르는 나팔이었다. 하나님의 복을 불러오는 마중물이었다. 아버지와 형까지 속일만큼 복 받는 일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야곱이 하나님께 십일조 생활을 서약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창28:22).

 

십일조의 정신

어느 시기를 막론하고 돈(재물)은 인간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그래서 복음서를 보면 돈을 ‘물신’(物神, mammon)이라고 했다. 그만큼 사람들이 돈을 중요하게 여기고, 또한 돈의 영향력이 크다는 뜻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 2/3가 돈과 관련되어 있다. 예수님 역시 돈이 우리의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간과하시지 않으셨다는 뜻이다. 탈무드에 사람을 평가하는 세 가지 기준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키소’(קסו)라고 했다. 돈주머니라는 뜻이다. 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그 사람됨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서 돈에 대한 태도가 중요하다. 그리고 신앙생활에서 돈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결정짓는 것이 십일조다.

 

십일조는 모든 소득의 1/10을 구별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데,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여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까지, 즉 창세기에서부터 말라기서에까지 언급이 되고 있다. 그러니까 십일조 제도는 단순히 구약시대에 나타난 일시적인 관습이 아니라 구약시대 전체에 맥락을 가지고 있는 항구적인 신앙적 규범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신약성경에서는 본문을 제외하면 십일조에 대한 적극적인 언급이 거의 없다. 본문 역시 당시 유대인의 형식적인 율법준수를 꾸짖는 과정에서 나온 말씀이다. 그들이 철저하게 십일조 생활을 했지만 정작 중요한 십일조의 정신, 곧 ‘정의와 긍휼과 맏음’을 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여기서 주님께서 언급하신 십일조의 정신이 율법의 정신과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모든 율법의 정신 또한 ‘정의와 긍휼과 믿음’의 실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올바른 십일조 생활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본문을 통해 십일조의 정신과 함께 그 당위성을 생각해 보려고 한다.

 

1. 정의(正義), 십일조는 소유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살아가는 존재인 것을 소득을 통해서 확인하는 것이 십일조다. 즉 땅에서 나온 작물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고, 그 일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십일조는 물질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God's ownership)을 인정하는 표다. 이것이 십일조의 첫 번째 정신 ‘정의’다. 이것은 단순히 물질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여기에 포함된다. 성경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관리하는 관리자라고 했다. 우리에게는 그 어떤 권한(소유, 사용, 처분)도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좋으신 하나님은 일부(1/10)만 내놓으면 나머지(9/10)에 대한 모든 권한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하셨다. 이것이 십일조 제도의 핵심이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면 십일조는 드리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다.

 

2. 긍휼(矜恤),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실천하는 것이다.

헌금에 대하여 비판적인 사람들은 말한다. ‘부요하신 하나님이 왜 가난한 우리의 주머니를 넘보실까?’ 그렇다. 하나님은 부족해서 우리에게 십일조를 요구하신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긍휼’, 곧 사랑의 실천을 위해서다. 긍휼은 인(仁)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다. 한자 인은사람이 둘 있는’(仁=人+二) 모습이다. 사람 ‘’(人)변에 길이가 다른 두 ‘’(二)를 썼는데, 한 획은 짧고 다른 한 획은 길다. 인이란 짧은 것과 긴 것의 조화이다. 그것도 긴 것이 아래 있고, 짧은 것이 위에 있다. 그래야 인이 실현되는 세상이 되는 것이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 가진 것이 적은 사람, 건강한 사람이 연약한 사람, 힘 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을 섬길 때 의 정신이 실현된다. 이것이 긍휼이다. 십일조는 이와 같은 긍휼의 실천이고 실현이다.

 

긍휼은 십일조의 정신이면서 동시에 십일조의 목적이다. 이렇게 드려진 십일조는 기업이 없이 성전을 섬기는 제사장을 비롯한 레위인과 주변의 가난한 이웃들(나그네와 고아와 과부)을 위해 사용되었다. 다시 말하면 여러 이유로 땅을 소유하지 못하여 땅으로부터 소득을 얻지 못한 사람들과 함께 소득의 일부를 나눔으로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빠짐없이 참여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십일조 정신이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공동체사랑정신이다.

 

3. 믿음(信), 하나님의 채워주심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은 안식년을 제정하여 매 칠년마다 땅을 쉬도록 하셨다. 대신 안식년 전 해, 곧 제6년에 풍작을 약속하여 두 해를 먹을 수 있도록 하셨다. 이 약속에 대한 믿음 때문에 이스라엘은 안식년을 지킬 수가 있었다. 십일조 역시 마찬가지다. 소득의 전체를 소유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복을 주어 더 풍성하도록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信)이다.

 

어느 유대인의 가정에서 있었던 일이다.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워 온 가족의 세 끼 식사를 두 끼로 줄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십일조를 드리는 모습을 보고 친구가 충고를 하였다. ‘세 끼 식사를 두 끼로 줄이면서까지 십일조를 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여유가 있을 때라면 몰라도......’ 그 때 이 유대인이 이렇게 대답했다. ‘10분의 1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나는 일생 남의 것을 뺏은 일이 없어요. 비록 굶는 한이 있어도 남의 것을 뺏을 생각이 없어요. 하물며 하나님의 것을 뺏는 일은 죽어도 못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기에 절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고 어떻게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 십일조는 물질적인 여유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십일조는 믿음으로 하는 것이다. 믿음의 표현이다. 그래서 비록 두 끼로 식사를 줄일 만큼 어려워도 십일조를 멈출 수가 없는 것이고, 또한 반드시 채워주실 것을 믿고 하는 것이다.

 

복을 담보하는 짐

1786년 샤모니 출신의 한 젊은 의사(M. G. Paccard)가 알프스의 정상 몽블랑을 정복했다. 그런데 그는 정상에 깃발을 꽂고 하산하던 중 베이스캠프에 도착하자마자 긴장을 풀었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것이 귀찮아지고 안전을 위해 감았던 로프마저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는 로프를 풀어버리고 안내원의 도움없이 자기가 앞장서겠다고 했다. 안내원의 만류에도 그는 고집을 부리며 앞서 갔고, 그렇게 하산하다가 얼마가지 못하고 급경사에서 미끄러져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굴러 떨어지는 그를 안내원은 발만 동동 구르며 지켜보아야만 했다. 그가 스스로 로프를 풀어버렸기 때문에 그를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결국 그의 시체는 비탈아래 기슭에서 발견되었고, 그는 자신이 정복했던 산자락에 묻히고 말았다. 이유는 안내원의 경고를 무시하고, 자신을 지켜줄 로프를 거추장스럽게 여겨 풀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인생의 안내자이고,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주일성수나 오늘 말씀드린 십일조는 로프와 같다. 살다보면 이런 것들이 거추장스럽게 여겨질 때가 있고, 무거운 짐으로 여겨질 때도 있다. 그렇지만 이것들 때문에 우리 인생이 건강하고 안전한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 젊은 의사처럼 벗어버리려고 발버둥을 치고, 그래서 불행을 자초하는 경우가 많다.

 

많은 성도가 가장 부담스럽고 거추장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헌금에 대한 설교라고 한다. 그런데 오늘 저는 그것도 경제적으로 민감한 시기에 그 부담스럽고 듣고 싶지 않는 헌금(십일조)에 대한 설교를 했다. 십일조가 우리를 복된 삶으로 인도하는 안내자이자 수많은 영적 위기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로프이기 때문이다. 십일조는 우리를 축복으로 인도하는 안내자이고, 우리를 주님께 든든하게 묶어주는 로프이다. 주님의 복을 담보하는 소중한 짐이다. 힘들어도 이를 잘 실천하면 안전하고 복된 한 해를 보장받게 될 것이다. 십일조는 물질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것이고, 공동체를 위한 사랑의 실천이고, 또한 믿음의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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