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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죄의 치료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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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1,725회 작성일 17-02-19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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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죄의 치료제

롬3:23~27

2017. 2/19. 11:00

두 종류의 종교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고, 그 종교에서 파생한 종파들이 많다. 그렇지만 본질에 접근하면 결국 두 종류의 종교만 남게 된다. 하나는 행위’종교이고, 다른 하나는 은혜’종교다. 모든 종교의 궁극은 구원인데, 행위종교는 그 구원을 자기 행위로서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인간에 대한 깊은 신뢰가 전제되어 있다.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없을 만큼 타락하지 않았고, 얼마든지 선을 행할 수 있는 선한 의지가 있고, 그 의지로 인한 선행이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기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자력구원’(自力救援)이라고 한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가 자력구원을 강조하는 행위종교다. 반면 기독교는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전적으로 타락(Total Depravity)했고, 죄의 세력에 불가항력(resistless)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스스로 구원할 수가 없다. 구원은 오직 다른 존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즉 외부로부터, 위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타력구원’(他力救援)이다. 인간의 의로운 행위를 통해서가 아닌 ‘그리스도의 의’를 통한 구원이다(롬3:20,21). 이렇게 자기 행위(힘이나 노력, 선행 등)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거저 받은 것이기에 ‘은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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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는 짤막한 민화(民話)를 통해 이를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한 소년이 눈 덮인 벌판을 달리다가 그만 늪에 빠졌다. 나오려고 움직일수록 몸은 점점 늪으로 빠져들었다. 마침 그곳을 한 행인이 지나가다 이 광경을 보았다. 행인이 도와주겠다고 했으나 소년은 스스로 늪에서 벗어날 수 있다며 행인의 호의를 거절했다. 행인은 가던 길을 재촉했고, 소년은 필사적으로 발버둥쳤지만 머리만 남겨두고 온 몸이 늪 속에 잠겼다. 다급해진 소년은 도와달라고 소리쳤다. 스스로 자기 몸을 끌어올리겠다고 자기 머리채를 잡아당겨보았다. 모두 헛수고였다. 톨스토이는 이 이야기를 통해 자력구원의 허상을 폭로하고 있다. 자력구원은 늪에 빠진 사람이 스스로 자기 몸을 끌어올리겠다고 자기 머리채를 잡아당기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반면 늪 밖에 있는 사람만이 늪에 빠진 사람을 건져낼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도 밖에 사람이 있을 때! 구원은 오직 다른 존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구원은 자기 행위가 아니라 은혜다. 그리고 그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고후6:2).

 

모두가 죄인이다.

본문은 은혜의 종교인 우리 기독교 구원론의 핵심에 해당되는 말씀이다. 특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23) 라는 말씀은 로마서의 첫 번째 주제 ‘죄론’(罪論)에 대한 결론이면서 ‘구원론’(救援論)의 대전제다. 바울은 롬1:18~3:18에서 이방인의 죄, 유대인의 죄, 그리고 인류의 죄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리고 본문 23절에 와서 최종 선고를 내렸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선언이다. 이는 한 마디로 죄가 우리에게 얼마나 치명적이고 절망적인 존재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는 내용이다. 바로 여기서 앞에서 말했던 은혜종교와 행위종교가 갈리게 된다. 은혜종교는 죄를 치명적이고 절망적이라고 강조한 반면 행위종교는 죄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죄의 영향력을 가볍게 생각한다. 특히 현대 심리학이나 문화, 교육, 정치, 경제, 사상사에 이런 흐름이 주도적이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역설을 선언한다. 이와 같은 죄로 인한 인간의 절망이 구원의 전제가 된다는 것이다. 병의 심각성을 아는 사람이 병원을 찾고, 의사를 찾는 것처럼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고 그 죄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죄의 치명적인 심각성을 알게 되면 죄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게 된다. 스스로 그 죄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이를 해결해 주실 분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찬송가 280장처럼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외면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하며 주님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는 우리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치명적이고 절망적인 존재이지만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구원의 길을 찾게 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바울은 죄를 구원의 대전제로 생각했다. 죄가 없으면 인간은 구원의 필요성을 가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대신에’, 그리고 우리를 ‘위한’ 십자가

본문은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24,25). 죄의 대가는 사망이다(롬6:23). 죄는 그것을 지은 사람이 죽어야만 해결이 된다. 그런데 사랑의 하나님은 죄인이라도 죽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욘4:11). 그래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다. 죄 없으신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이다. 본문은 바로 이 점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므로 우리의 죄가 용서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의 십자가가 죄에 대한 치료제인 셈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가 아니고는 아무리 사소한 죄도 용서받을 수 없고, 주님의 십자가만 있으면 어떤 흉악한 죄도 모두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죄인을 위한 대리적’ 희생이다. 구약시대에는 죄인을 대신하여 희생동물에게 죄를 전가하여 죄 문제를 해결했다(레17:11). 이것이 구약의 제사제도다. 비록 임시적이고 일회적이었지만 이것이 십자가의 그림자였다(히9:22). 그래서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을 구약의 제사에서 희생된 희생동물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요1:29, 고전5:7). 무엇보다도 히브리서는 구약의 제사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온전히 성취되었다고 말한다(히10:12,14). 이 대리적 희생에는 우리의 죄가 주님께 전가되고(사53:6,12, 고후5:21, 히9:28), 주님께서 우리를 처벌하는 법적 의무를 대신지신 것이다. 주님의 죽으심은 모든 사람을 ‘대신한’(ἀντι), 그리고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한’(ὕπερ) 희생이다(딤후2:6). 십자가는 우리를 ‘위한’(for) 사건이었고, 우리 ‘대신에’(in place of) 일어난 사건이었다. 본문은 주님의 이와 같은 대리적 희생으로 우리가 누리게 된 구원의 복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는 절망적인 죄인이 죄의 용서를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아 영생을 얻게 되었다. 하나님과 원수였는데, 이제는 화목하게 되었다. 이 모두가 우리를 위한, 우리 대신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우리 주님의 대리적인 희생 때문이다.

 

값없는 구원

지금 우리는 빵 한 조각, 물 한 모금도 값없이 공짜로 먹을 수 없는 ‘계산문화’ 속에 살고 있다. 값을 치루지 않고는 어떠한 혜택도 누릴 수 없는 문화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공짜가 사라진 세상, 오직 이윤추구의 가치관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한마디로 상업적 논리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세상이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다. 우리 하경이가 서울에 있는 교회에 가서 느낀 첫 번째 문화충격이 바로 이 점이었다. 출석한 교회에 대한 소감을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아빠, 이 교회는 돈을 내야 밥을 먹을 수 있어!’ 우리 교회에서 공짜로 밥을 먹다가 돈을 내야하니 어색했던 것이다. 교회 역시 알게 모르게 계산문화에 물들어 있다.

 

그런데 본문은 절망적인 죄인인 우리가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받고, 공짜로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는데,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우리 대신에 십자가에서 죽어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받은 이 구원을 타력구원’(他力救援)이라고 한다. 나와 상관없이 주님께서 직접 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은혜’라고 말한다. 내가 아무런 값도 치루지 않고 공짜로 거저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은혜이기에 누구에게나 차별’이 없다. 흉악한 강도도 죄용서와 함께 값없이 의롭다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심지어는 주님을 핍박하는 사람에게도 이러한 구원의 은혜가 주어졌다. 복음이 기쁘고 놀라운 소식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내 노력과 상관없이 그저 공짜로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 구원의 특징이다. 그리고 신앙생활은 이와 같은 은혜에 대한 응답이다. 거저 받은 구원에 감사해서 선행을 하고, 그 은혜가 감사해서 봉사도 하고, 교사도 하고, 식당봉사도 하고, 차량운행도 하고, 기도도 하고, 헌금도 한다. 우리가 매주일 외치는 ‘우리의 다짐’도 베풀어주신 주님의 은혜에 대해 보답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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