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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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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0,637회 작성일 17-04-09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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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눅23:33-38

2017. 4/9. 11:00

잃어버린 기술, 용서

존 크리스토프 아놀드가 지은 「잃어버린 기술, 용서」(The Lost Art of Forgiving) 라는 책에 나온 이야기다. 크리스 캐리어라는 초등학생이 크리스마스 날 낮선 사람에게 유괴를 당한다. 크리스는 범인에 의해 산속으로 끌려가 송곳과 같은 고드름으로 얼굴과 가슴을 잔인하게 찔렸다. 그리고 숲속에 버려졌는데, 다행히 사냥꾼에 의해 발견되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과 온몸은 엉망이 되었고, 특히 한쪽 눈을 잃었다. 그는 자신에게 닥친 불행으로 인해 깊은 절망과 분노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을 만난 다음 그의 생각에 변화가 일어났다. 전에는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냐고 생각했는데, 이렇게라도 살아난 것이 주님의 은혜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22년이 지난 1996년도에, 경찰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범인이 그를 만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되살아난 분노를 누르며 범인을 찾아갔는데, 범인은 그의 아버지에게 원한을 품었던 사람이었다. 범인의 모습은 참으로 비참했다. 시력을 잃고 외롭게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범인을 보자 오히려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범인은 그의 두 손을 꼭 잡고 정말 미안하다며 용서를 구했고, 그는 괜찮다고 용서한다고 했다. 이후, 그는 범인을 돌보기 시작했다. 아내와 두 딸과 함께 찾아가 외로움을 달래주고, 책을 읽어주고, 함께 손을 잡고 기도를 하며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사랑을 베풀었다. 그러자 범인은 편안해했고, 얼굴에 화색이 돌아왔다. 어느 날 피곤하다기에 침대에 눕혀주었더니 그의 품속에서 편안히 숨을 거두었다.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린 원수를 용서하고, 그것도 모자라 죽는 순간까지 돌보는 놀라운 사랑을 베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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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에게는 그가 가해자였지만, 그 역시 피해자였다. 사람을 미워하고 세상을 증오하다 크리스에게 못할 짓을 저질렀다. 그래서 평생 지옥과 같은 삶을 살았다. 그러다 용서를 구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세상을 떠날 수가 있었다. 그것은 그가 용기를 내어 용서를 구했고, 이에 크리스가 사랑으로 응답했기 때문이다. 이런 크리스에게 기자가 물었다. ‘용서를 넘어 화해, 사랑까지 베풀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용서는 하나님의 선물이고 은총입니다. 용서의 선물을 거저 받았기에 저도 나눠주었을 뿐입니다.’ 

 

이 땅을 천국처럼

천국과 지옥은 죽어서만 가는 곳이 아니다. 천국과 지옥은 ‘지금’, ‘여기’에서의 현재적인 문제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는 지옥과 같은 현실을 죽지 못해 사는 사람이 많다. 반면 현재를 천국처럼 즐겁게 사는 사람도 있다. 미움과 증오에 사로잡혀 살면 지옥의 한복판에 있는 것이고,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면 천국의 삶을 누리는 것이다. 미움과 증오는 우리 마음을 지옥으로 만들고, 용서와 사랑은 천국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땅을 천국처럼 사는 비결은 용서에 있다. 미국의 시인 디킨슨의 말이다. ‘이 땅에서 천국을 찾지 못한 사람은 하늘에서도 천국을 찾지 못한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 천사가 내 옆집을 빌리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천사가 내 옆집을 빌린다는 말이 참 의미가 있다. 내 곁에 있는 사람들-아내(남편), 아이들, 부모, 친구, 이웃, 교회지체, 직장동료-이 모두가 천사라는 것이다. 아니 천사처럼 생각하고 살라는 것이다. 그러면 현재(이 땅)가 천국이 될 것이고, 현재(이 땅)를 천국처럼 산 사람이라야 미래(하늘)의 천국도 기대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주변 사람을 모두 천사로 여긴다면 그들과 다투고, 미워하고, 시기질투하고, 싫어할 이유도 사라지게 된다.

 

용서의 모델, 예수님

본문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용서의 모범이다. 주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일곱 마디 말씀(架上七言) 중에 첫 번째 말씀으로, 주님의 삶을 가장 빛나게 한 순간,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와 목적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순간이다. 주님은 로마 병사들에 의해 한참 동안 채찍질과 희롱을 당하시다가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까지 오르셨다. 그리고 양 손과 발에 못이 박혀 십자가에 높이 달렸다. 물과 피를 다 쏟고 계시는 그 고통의 순간에 주님은 절규하듯 첫 말씀을 외쳤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알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34). 자기 몸도 가누기 힘든 상황인데도, 피 맛을 보고 달려드는 맹수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 죽이려는 광기에 사로잡힌 원수를 위해 이런 기도를 드린 것이다. 본문을 읽으며 이 장면을 떠올리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사실 주님의 이 기도가 있어서 생명의 주님을 거역한 죄, 그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에서 용서받고,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성경을 읽다가 이 부분에 와서는 건너뛴다고 한다. 자신에게 피해를 주고 고통을 준 원수를 어떻게 용서하고, 용서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죽으면 죽었지, 눈에 흙이 들어가기까지는 잊을 수도 용서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사실 상처를 받아보지 않은 사람은 이 심정을 이해할 수가 없다. 얼마나 그 상처가 깊고 컸으면 이렇게까지 하겠는가? 그러니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 말은 쉽지 참으로 어렵다. 그것도 상처를 받은 당사자에게는 용서란 말 자체가 상처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어려운 용서를 친히 실천하셨다. 그리고 그 혜택을 저와 여러분이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님의 모습에서 용서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원리를 적용한다면 우리 역시 용서하는 삶이 가능해지리라 생각한다.

 

 

용서는 인간에 대한 폭넓은 이해에서 비롯된다.

지난주일 설교에서 말씀을 드렸지만 생각에 따라 관점이 바뀌고, 관점이 바뀌면 해석과 의미가 달라진다. 이것은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에게 큰 상처를 받았다. 이 때 ‘그가 내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라고 생각하면 그가 내게 한 것들을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게 된다. 그렇지만 ‘그럴 수도 있지!’ 혹은 ‘나라도 그럴 수 있었겠다!’ 라고 생각하면 이해의 여지가 생기고, 용서의 문이 열리게 된다. 본문에서 주님의 용서의 기도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주님의 이 기도는 인간을 깊이 이해한 차원에서 나온 것이다. 주님은 죄 없는 자신을 그들이 비난하는 것이 그들의 굳고 굽은 마음에서 나온 것을 아셨고, 굳고 굽은 마음은 그들의 죄로 인한 것임을 아셨다. 그들의 악한 생각도 말도 행동도 모두 죄에서 왔음을 아셨다. 미움, 증오, 조롱, 폭력도 죄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아셨다. 주님이 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십자가에 넘긴 빌라도의 우유부단한 태도도, 유대 종교지도자의 시기심도, 백성의 무지도 모두가 죄로부터 왔다는 것을 아셨다. 그들의 무지, 그들의 어리석음, 그들의 깨닫지 못하는 어두운 마음, 모두가 죄 때문임을 아셨다. 그래서 생명의 주님을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 주님은 이런 그들은 이해하시기에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용서의 중요한 원리는 상대방에 대한 폭넓은 이해다! 그렇다. 오해는 비난과 불평과 원망과 분열을 낳지만 이해는 용서와 사랑의 출발점이다.

 

용서를 위해 기도하라!

어떤 사람이 하늘을 날고 싶었다. 그래서 물리학적으로 계산을 해봤다. 계신을 해보니 1초에 손을 500번만 흔들면 하늘을 날 것 같았다. 그런데 이렇게 계산은 나왔지만 실제로 하려고 하니 안됐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계산과 실제가 달랐다. 사실 세상사가 다 그렇다. 우리에게는 반드시 해야 할 필요성과 의지도 있지만 막상하려고 보면 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다. 용서도 마찬가지다. 용서가 얼마나 중요한가? 또한 얼마나 필요한가? 그런데 실제로 실천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하늘을 나는 것만큼 어려운 것이 용서다.

 

주님의 십자가는 그 자체가 메시지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일곱 마디 말씀을 남기셨는데,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을 맺고 있다. 이는 기도가 습관이었던 주님의 삶을 잘 보여주고 있고, 또한 기도생활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하는 기도의 내용이 ‘용서’에 대한 것이다. 성도의 삶에서 용서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용서는 우리의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힘으로는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본문에서 주님께서도 ‘내가 너희를 용서한다.’고 직접 선포하시지 않고,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용서에서 기도의 중요성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용서는 기도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또한 기도하면 용서할 수 있다. 이것이 용서의 또 하나의 원리다.

 

용서의 달인

앞에서 소개했던 책을 검색해 보았더니 제목이 두 종류로 번역이 되어 있었다. 하나는 「잃어버린 예술, 용서」이고, 다른 하나는 「잃어버린 기술, 용서」이다. 물론 영어 ‘아트’(art)라는 단어에 ‘예술’과 ‘기술’이란 뜻이 있으니까 둘 다 문제될 것은 없지만 그래도 후자(일어버린 기술, 용서)가 더 나은 번역인 것 같다. 왜냐하면 용서도 기술처럼 훈련이 가능하고 잘 훈련하기만 하면 기술을 넘어 예술이 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생활의 달인〉이라는 모 방송국의 TV프로그램을 잘 알 것이다. 우연히 25살의 청년이 나와서 병을 따는데, 1분 32초에 300개를 따는 영상을 보았다. 비공식 세계 최고의 기록이라고 했다(현, 기네스북에는 3명이 1분 47초에 300개). 그 손놀림이 예술적 경지였다. 이와 같이 소소한 기술도 잘 숙련하면 사람들에게 감탄과 감동을 주는 예술이 될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용서도 마찬가지다. 용서 또한 훈련이 가능한 기술이니까 처음엔 서툴지만 용서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고, 상대방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면서 훈련에 훈련을 거듭하다보면 용서의 달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용서의 달인이 되기를 바란다. 정말 우리 교회 안에 용서의 달인을 비롯해서 사랑의 달인, 기도의 달인, 감사의 달인, 전도의 달인, 섬김의 달인, 말씀의 달인 등 경건생활의 달인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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