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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 기쁨이 되는 삶, ‘속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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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11,114회 작성일 22-09-11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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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 기쁨이 되는 삶, ‘속사람

3:14~21

2022. 9/11. 11:00

개에게 유산을 물려준 아버지

한 노인이 자기가 기르던 강아지에게 우리 돈으로 1,560억을 유산으로 물려주었다. 그리고 강아지를 돌보는 사육사에게 5천만 원의 연봉을 주라고 유언했다. 개가 죽고 난후에는 개의 유산 중에 남은 것은 동물보호소에 기증하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외동아들에게는 10억만 주라고 했다. 이에 화가 난 아들은 법원에 유산상속에 대한 소송을 재기했다. ‘내가 아들인데 어떻게 개보다 못하단 말입니까? 개에게는 1,560억을 주고 나에게는 10억을 주다니 이것이 말이 됩니까? 판사님, 억울합니다. 바로잡아 주세요.’ 그 아들에게 판사가 물었다. ‘젊은이, 1년에 몇 번이나 아버지를 찾아봤는가?’ ‘아버지가 즐겨 드신 음식이 무엇인지 아는가?’ ‘전화는 얼마 만에 한 번씩 했는가?’ ‘아버지 생신은 언제이고, 몇 번이나 챙겨드렸는가?’ 판사의 질문에 아들은 유구무언이었다. 그때 판사는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찍어놓은 영상을 보여주었다. ‘내 재산 1,560억을 내 사랑하는 개에게 물려주고, 사육사에게는 매년 5천만 원씩을 주고, 내 아들에겐 10억 원을 물려줍니다. 혹 아들이 이에 불평을 하거든 그에게는 1불만을 물려주세요.’ 이 영상을 보여주고 나서 판사가 판결을 내렸다. ‘1불을 상속하도록 허가합니다.’

 

 

이 이야기가 실화라고 하는데, 출처는 찾지 못했다. 얼마나 아들이 한이 맺히게 하고 섭섭하게 했으면, 재산 대부분을 개에게 물려주고, 아들에게는 10억만 주면서 불평하거나 원망하면 단돈 1불만 주라고 했을까? 그래도 부모자식 사이인데 말이다. 가까운 사이라도 섭섭하게 하고 화나게 하면 이럴 수 있다는 것이다. 하여간 하나님과 우리 사이도 깊이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지금까지 우리의 삶이 주님께 얼마나 기쁨을 드렸는지, 혹시 주님의 마음을 섭섭하게 하고, 아프게 하지는 않았는지, 지금 우리의 삶이 주님께 기쁨이 되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겠다. 그래야 이런 안타까운 일을 미리 막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 주일에 주님께 기쁨이 되는 삶으로 믿음에 대하여 은혜를 나눴다. 이 시간에는 주님께 기쁨이 되는 삶 두 번째로 속사람의 강건함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려고 한다.

 

 

영적 성인아이

심리학 용어 중에 성인아이(Adult-child)란 말이 있다. 외형상으론 어른인데 살아가는 모습이 어쩐지 믿음이 안가고 철이 덜든 사람, 곧 신체적, 사회적으로는 어른이면서 정신적으로 아이인 경우를 말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현상은 성도에게서도 나타나고 있다. 신앙의 연륜과 직분은 어른인데 영적인 모습이 어딘지 연약해 보이고 미숙해 보이는 사람이 있다. 영적 초보를 벗어나지 못해 신앙이 불안하고, 사소한 일에도 흔들리거나 갈등하고, 세속적인 가치나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 있다. 성인의 성숙함을 이루어야할 때임에도 영적으로 어린아이의 성향과 행동을 벗어버리지 못하여 쉽게 상처를 받고, 상처를 주며 신앙공동체를 어렵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서 영적 성인아이라고 한다.

 

 

그 좋은 예가 고린도 교회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16개월이라는 꽤 긴 시간을 보내면서 세운 교회다. 그런데도 바울이 세운 교회들 중에 문제가 가장 많은 교회였다. 서신의 양과 길이가 그 증거다. 학자들에 의하면 바울이 고린도에 보낸 편지가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린도 전후서 외에 적어도 3편 이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만큼 고린도 교회가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는 뜻인데,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문제가 파벌이었다. 바울파, 게바파, 아볼로파, 그리스도파가 그것이다. 여기에서 교회의 여러 문제가 발생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원인을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미숙함으로 규정하였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전3:1,3). 그들이 교회 안에서 여러 문제를 일으킨 것은 그들이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영적 어린아이라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비단 고린도 교회만 아니고, 정도 차이만 있을 뿐 당시 다른 교회들도 마찬가지였다.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옵시며

본문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 당시 에베소 교회도 영적 미성숙으로 인한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의 영적 성숙, 속사람의 강건함을 위하여 기도한 것이다.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16). 여기서 속사람은 겉으로 보이는 외모나 체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눈으로 보이지 않은 마음과 영혼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믿음을 말한다. , 속사람이란 믿음으로 거듭나 새롭게 창조된 자아로 주님 안에 사는 사람을 가리킨다. 바울은 이러한 속사람이 잘되고 강건하기를 기도한 것이다. 왜냐하면 속사람이 강건하고 잘 되어야 겉사람이 잘되고 그 인생이 잘되기 때문이다(31:2). 이것을 나무로 말하면 땅속에 감추어져 보이지 않는 뿌리가 든든해야 보이는 나무가 잘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건물도 땅속에 감추어진 기초가 든든해야 지상으로 보이는 건물도 든든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신앙도 겉으로 잘 보이지 않은 속사람이 강건하고 든든해야 그 인생이 복되고 강건하게 된다. 속사람이 강건한 사람은 믿음직스럽고 든든하다. 웬만한 시련 따위에는 흔들림이 없다. 이겨낼 능력이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영적 면역력이라고 하는데, 속사람이 강건한 사람은 영적 면역력이 강하다. 그러기에 성도를 향한 바울의 관심은 속사람이 건하고 잘되는 것이다.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려면

에리히 프롬(Erich Fromm)생산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라고 했다. 어떤 사람은 말할 때마다 힘들다. 못살겠다. 안 된다.’고 말한다. 항상 부정적이고 비생산적이다. 이런 사람은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생각이 생산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생산적이고 긍정적인 생각을 가져야 한다. 남을 격려하고 배려할 줄 알아야 한다. 항상 힘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말 한마디를 해도 상대방을 일으키는 말을 해야지 상대방을 주저앉게 하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이를 신앙적으로 해석하면 속사람이 건강하지 못해서 이런 것이다. 건강한 인격은 건강한 영혼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은 속사람을 향해야 한다. 

 

 

1.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러면 어떻게 우리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할 수 있을까? 무엇으로 속사람이 강건해질 수 있을까? 바울의 기도를 보자.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dh며...’(16). 여기에 성령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씀이 나온다. 이는 우리의 속사람이 성령의 작품이라는 뜻이다. 이는 매우 중요하다. 속사람은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한 실존이라는 것이다. 속사람을 새롭게 하고 강건케 하는 것은 성령의 소관이라는 것이다(5:22~23 성령의 열매). 성령이 주장할 때 하나님에 의해서 의도된 목표로 참된 의로움과 거룩함이라는 새로움을 입는 존재로 변화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속사람의 특성이고, 또한 존재방식이다. 어떤 사람은 겉사람이 육적인 활동으로 실존이 가능하고, 생존과 건강을 유지하니까 속사람 또한 그런 줄 알고 있다. 누가복음 12장에 나온 어리석은 부자가 그 전형이다. 이것은 착각이다. 속사람은 성령의 작품이고, 성령을 통해서만 실존이 가능한 존재이기 때문에 성령의 능력으로 강건하게 된다. 그러므로 속사람의 강건함을 위하여 항상 성령 충만함을 구해야 하고,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한다.

 

 

2.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또한 본문에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16a) 라고 했다. 속사람의 강건함은 하늘의 영광과 관련이 있다는 뜻이다. , 속사람의 강건함은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겉사람은 시간과 환경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시간의 변화와 환경에 따라 겉사람의 변화도 일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속사람은 시간이나 환경과 무관하다. 신앙의 연륜이 깊고, 직분을 가지고 많은 신앙적 활동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속사람이 강건해지지 않는다. 속사람의 강건함은 주님과의 뜨거운 만남이 중요하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야만이 심령의 평강을 누리고 강건함의 은총을 누린다는 것이다. 스데반이 좋은 모델이다. 그는 복음을 전하다 돌에 맞아죽었다. 하지만 죽어가는 가운데에도 하늘을 우러러봤다. 그리고 보좌 우편에서 그를 맞으려 서 계신 그리스도를 보았다. 그 순간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이 되었고,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용서해 줄 것을 기도했다. 이것이 바로 속사람이 강건한 사람의 모습이다. 하나님 영광의 풍성함을 깨닫고 보는 순간, 그 안에서 우리의 영이 소생함을 입는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때 병든 영이 고침을 받아 건강해지고, 하늘의 풍성함을 바라봄으로 현실의 고난과 아픔을 승화하여 삶의 원동력으로 삼을 수가 있다. 그러므로 속사람의 강건함은 하늘 영광의 풍성함을 바라봄으로 가능하다. 여기에 우리 기독교 영성의 핵심이 있다. 우리 기독교의 영성은 바라봄의 영성이다. 하늘 영광의 풍성함을 바라보는 영성이 우리 기독교 영성이다. 그래서 속사람이 강건한 성도를 가리켜 하늘바라기라고 부른 것이다.

 

 

주님이 기억하시는 것

인격을 영어로 캐릭터(character)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철판에 못을 대고 망치로 내려쳐서 글이나 그림을 새기는 일에서 유래했다. 철판에 새겨진 글이나 그림은 쉽게 사라지지 않다. 깊이 새겨져서 오랫동안 남아 있다. 인격이 그런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머릿속에 떠올릴 때 그의 재주와 능력이 생각나기도 하지만, 결국은 그의 인격을 기억하게 된다. 인격이 곧 그 사람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실 때 무엇을 기억하실까? 우리의 살아온 이력이나 경력을 기억하실까? 혹은 그동안 우리가 이룬 업적이나 성취를 기억하실까? 아니면 우리의 재능이나 소유를 기억하실까? 결코 이런 것들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성령의 불로 인침을 받은 우리의 속사람이다. 하늘 영광이라는 신령의 은혜로 강건해진 우리의 속사람이다. 어리게만 생각했던 자식이 철이든 생각, 철이든 말, 철이든 행동을 할 때 부모는 흐뭇해하며 기뻐한다. 우리 주님 또한 우리 안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깊이 새겨진 속사람을 보실 때, 성령의 능력과 풍성한 하늘 영광의 경험으로 속사람의 강건함을 보실 때 기뻐하신다. 이를 위해 우리 또한 바울의 기도에 힘차게 아멘하며, 바울처럼 간절히 기도하자. 기도는 성령으로 충만한 삶, 성령을 따라 사는 삶, 그리고 하늘 영광의 풍성함을 경험하는 삶을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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