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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 기쁨이 되는 삶, ‘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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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9,448회 작성일 22-09-25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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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 기쁨이 되는 삶, ‘순종

1:4~10

2022. 9/25. 11:00

아버지와 어린 딸

어린 딸이 눈을 반짝이며 선물로 받은 예쁜 구슬상자를 아빠에게 보여주었다. 예쁘다고 고개를 끄덕여주며 감탄하던 아빠가 갑자기 뜻밖의 말을 하였다. ‘그렇지만 얘야, 그것을 불속에 던져버려라.’ 아이는 영문을 몰라 잠시 당황하며 망설였다. 아빠가 계속 말하였다. ‘네게 강요하지는 않겠다. 너에게 맡기겠다. 이유도 말하지 않을 것이니 네가 나를 믿는다면 그렇게 해라.’ 아이는 고민을 하다가 결국 아빠의 말대로 그 상자를 불속에 던졌다. 그 후 어느 날, 아빠는 아이가 선물로 받은 것보다 훨씬 예쁜 구슬상자를 아이에게 사 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내 딸아, 그 동안 아빠의 행동 때문에 많이 힘들었지? 사실 내가 이렇게 한 것은 네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단다. 너의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은 여러 차례 네가 이유를 모르는 가운데 포기하고 버릴 것을 요구하실 것이다. 그때 네가 나를 신뢰하여 순종했듯 하나님을 신뢰하다면 너는 언제나 그것이 최선임을 알고 순종하게 될 것이다.’ 가스펠 헤럴드지에 실린 이야기다.

 

순종이 중요하다.

경건한 부모가 자녀에게 물려줄 최고의 영적 자산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순종이다. 물론 어린 아이에게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순종의 중요성에 비하면 참으로 의미있는 훈련이라 생각한다. 사실 신앙의 모든 열매는 순종에서부터 나온다. 순종이 성도의 삶의 시작과 마침을 결정한다. 구레네 사람 시몬은 영문도 모른 채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 골고다까지 갔다. 시몬에게 자원하는 마음이 하나도 없었지만, 그 순종은 열매를 맺어 시몬의 집안이 믿음의 가정이 되었고, 바울의 자랑스러운 동역자가 되었다. 주님의 삶은 그 자체로 순종의 삶이었고 끝까지 순종하셨다.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심으로 이 땅에서의 순종사역을 마감하셨다. 주님께서 본을 보이셨던 순종이라야말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주님께 기쁨이 되는 삶 네 번째로 순종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나는 아이라!

본문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소명과 관련된 말씀이다. 성경에는 모세를 비롯한 여러 사람의 소명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성경에 나온 소명 이야기에는 두 가지 패턴이 있다. 하나는 대화형식이고, 다른 하나는 천상회의 환상형식이다. 모세, 기드온,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 그리고 예레미야의 소명은 대화형식에 속하는데, 이 대화형식 소명에는 4가지 대화패턴이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 소명자의 거부’, 하나님의 설득약속이 그것이다. 이런 패턴을 잘 보여주는 것이 예레미야의 소명 이야기다. 그래서 이 대화형식 소명을 가리켜 예레미야식이라고도 부른다.

 

예레미야는 유다나라 말기(요시야 13년 주전 627), 20대 이전의 어린 나이에 선지자로 부름을 받아 나라가 망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였고, 그 이후까지 40년 이상 활동하였다.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그의 사역은 무척 힘들고 어려웠다. 본문은 이런 어려운 시대를 위해 하나님께서 그를 강권하여 부르신 장면이다.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5b). 그리고 이에 예레미야 역시 강한 거부를 표명했다.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6). 자신은 어려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할 수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 아이를 히브리어로 나아르’(נער)라고 하는데, 이는 아이’, ‘소년’, ‘젊은이라는 뜻이다. 겸양의 표현으로 소인’(小人)이란 뜻도 있다. 이와 같은 예레미야의 거부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이는 단순한 겸양의 표현이 아니다. 다음은, 경험도 없고 배움도 없고 그래서 지식도 없고, 재능도 능력도 없다는 뜻이다. 어리고 미숙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감당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뜻이다. 충분히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감당할만한 그릇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거부는 나름 이유가 된다. 말 그대로 아직 여러모로 미숙한 젊은이기 때문이고, 그가 상대해야 할 사람들은 온 땅과 유다의 왕들과 그 지도자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이었기 때문이다(18).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라!

그런데 이와 같은 그의 거부에 하나님께서 신속하게 반응을 보이셨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7a).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고 부르셨을까? 아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를 다 아시고 부르셨다. ‘내가 너를 모태에서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5a). 하나님은 그를 모태에서 짓기 전에 알았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알았다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야다’(ידע)는 단순히 지식적으로 안다는 의미가 아니라 경험적으로 아는  체험적인 지식을 뜻한다, 지식을 넘어 친밀함을 뜻한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다 아시면서도 그를 부르신 것이다. 그가 아직 경험도 배움도 지식도 재능도 능력도 부족하다는 것을 아시고 부르셨다. 그가 아직 충분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미숙하다는 것도 아셨다. 게다가 그가 어떤 사람을 상대로 사역해야 할지도 아셨다. 이렇게 하나님은 그가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부르셨다. 왜 그랬을까?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 계획이 다 있으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고, 또한 사람을 사용하시는 방법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역방식을 알아차린 바울이 이렇게 고백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29). 세상은 사람을 사용할 때 다 갖춰진 사람, 잘 준비된 사람을 골라서 사용한다.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 유능하고 재능있는 사람을 뽑아서 사용한다. 그래서 요즈음 젊은이들이 취직을 위해 얼마나 열공을 하면서 준비를 하는가?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사람을 뽑지도 않으시고, 또한 사용하지도 않으신다. 다 갖춰진 사람, 준비가 잘 된 사람, 그래서 스스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맡기신 분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일을 하게 된다. 맡기신 분의 영광, 곧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고 자기 영광을 드러내게 된다. 자기가 잘났기에 자기가 다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부족을 알고,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자신의 무능력을 알고, 자신의 부적합성을 알 때가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기회다. 자격 없음을 절감하면서 할 수 없다고 탄식할 때가 주님의 가능성이 발휘되는 최적의 기회다. 게다가 하나님은 만들어 가시면서 채워 가시면서 사용하신다.

 

부름받은 자의 자세

그렇지만 주님께 쓰임 받는데, 단 하나의 조건이 있다. 그것은 부르심에 순종하는 것이다. 서두에서 신앙의 모든 열매는 순종에서부터 나오고, 순종이 성도 삶의 시작과 마침을 결정한다고 했던 것처럼 순종이 유일한 조건이다. 본문에도 하나님은 바로 이 점을 예레미야에게 강조하신다.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7b). 다른 것은 다 필요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신 곳으로 가고, 말씀하신 것만 말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순종만 하면 된다는 뜻이다. 가라고 하신 곳으로 가고, 말씀하신 것을 말하는데 무슨 경험이나 지식이나 능력이 필요하고, 무슨 준비와 자격이 필요하겠는가? 이는 순종하기만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사실 주님의 일은 순종하기만 하면 너무 단순하고 쉬운데, 자꾸 자기 생각이 많아 어렵게, 부담스럽게, 힘들게 보이도록 만든다. 주님의 일에 대한 생각과 태도를 왜곡시켜 버린다. 그래서 순종을 주저하게 만든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의 형편을 다 아시고 부르셨다는 것이다. 이는 주님께 이미 계획과 대책이 있으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사용하실지 기대하면서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이다.

 

주님은 부름에 대한 순종을 통해 일하신다. 그래서 주님은 유력하고 유능한 사람보다 순종의 사람을 좋아하신다. 12제자의 삶이 좋은 예다. 앞에서 소개한 바울의 주장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12제자 중에 유력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 대부분이 당시 유대사회에서 소외의 땅이었던 갈릴리 출신이었고, 핵심 제자들 모두가 유대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한 어부와 세리였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사람들을 제자로 삼으시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기둥으로 사용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이 일을 이루셨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 모두 주님의 부르심에 주저하거나 거절하지 않고 즉시순종했다는 것이다.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는 주님의 부르심에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즉시주님을 따랐고, 세리 마태는 세관에 앉았을 때 부르심을 받아 즉시주님을 따랐다. 모두가 순종의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주님의 제자로 쓰임을 받게 된 것이다.

 

제사보다 나은 순종

군대에 입대하면 가장 먼저 시킨 훈련이 무엇인지 아는가? 총검술이나 사격과 같은 전투훈련이 아니라 제식훈련이다. ‘앞으로 나란히’, ‘앞으로 가’, ‘뒤로 가’, ‘좌향좌’, ‘우향우’, ‘제자리에 서등등지휘관의 구령에 따라 그대로 움직이도록 하는 훈련이다다음으로 전투훈련을 시킨다. 장정을 데려다가 무슨 이런 유치한 훈련을 시키는가 싶겠지만 매우 중요한 훈련이다제식훈련이야말로 민간인을 군인으로 만드는 중요한 과정이다. 명령에 복종하는 훈련이 곧 제식훈련이기 때문이다. 흔히 하는 말로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것이 군인이고 군대다.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도 순종훈련이다. 그래서 성경은 구약예배의 핵심인 제사보다 순종을 강조한 것이다. 순종이 제자됨의 조건이고, 사역의 출발점이다. 주님은 우리를 제자로 사역자로 부르셨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는 자명하다. 그것은 곧 순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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