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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행하신 하나님 (06-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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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9,092회 작성일 06-02-19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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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행하신 하나님  
신1:29-33

몇 년 전에 매산 고등학교에서 성경과목을 가르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자기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를 사물로 묘사를 해보자.’ 그랬더니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나왔습니다. 그 중에 어떤 학생이 자기 아버지를 ‘커다란 바위같은 존재’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바위는 변함이 없이 항상 그 자리에 있고, 움직일 경우 그 흔적을 뚜렷이 남기 것처럼 아버지 역시 변함없는 존재요, 계시지 않으면 그 흔적이 너무 크게 남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뒤에 안 사실이지만 이 학생의 아버지는 몇 년 전에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의 마음에 바위처럼 변함없는 존재, 커다란 흔적으로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마음에 뭉클함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부모님에 대한 이미지를 사물로 묘사한다면 무엇에 비유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는 하나님에 대한 다양한 묘사가 나오고 있습니다. 바위와 산, 산성, 등대, 목자, 군대장관, 인자한 아버지와 어머니, 남편 등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사랑하는 아이를 품에 안고 가는 어머니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머니같은 마음과 모습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에서 광야 40년 동안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있는 신명기는 모세오경의 다섯 번째 책입니다. 신명기는 세 번에 걸친 모세의 설교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광야에서 태어난 출애굽 2세들을 위한 율법을 재(再)강론한 책입니다, 지금 모세 앞에서 모세의 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들은 광야에서 태어난 출애굽 2세대들입니다. 그들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그들에게 율법 교육을 시킨 것입니다. 아울러 조상들의 불순종에 대하여, 그리고 지난날 동안 그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한 달여 동안에 걸쳐 주어진 교훈입니다. 그 이유는, 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다시는 부모 세대와 같은 죄를 범하지 않도록 교훈하기 위함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은 모세의 첫 번째 설교의 서론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여기서 모세는 하나님을 우리 앞서 행하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30절에 "너희 앞서 행하시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앞서 행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애굽에서처럼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울 것이니 염려하지 말고 가나안 땅을 점령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차 너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너희 앞서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도 귀담아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특히 금번에 졸업을 하여 상급학교에 진학을 하거나 사회로 나아가는 우리 졸업생들이 새겨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 앞서서 행하시는 분이시고, 우리는 그분을 믿고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고 따라야 할, 우리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어떤 분이시기에 우리가 믿고 따라야 하는 것입니까?

첫째, 인도해 주시는 분이십니다(33).
모세의 설교는 과거에 대한 회고에서 시작됩니다. 모세는 지난 40년 동안 싸워왔던 광야생활을 되돌아보고 있습니다. 광야는 거칠고 길이 없는 곳입니다. 마실 물도 부족하고, 먹을 음식도 넉넉지 못하고, 거처도 불편한 참으로 사람이 살기에 적절치 못한 곳입니다. 그곳에서 40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뼈저리게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인도자의 중요성입니다. 길이 없는 광야는 유능한 인도자가 꼭 필요한 곳입니다. 인도자가 없으면 광야에 갇혀서 죽게 됩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하나님이 인도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이 가야할 길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을 탈출하였지만 어디로 가야할지 갈 바를 전혀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계획을 세워서 애굽을 탈출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마치 애굽에서 쫓겨나다시피 애굽을 빠져나오게 된 것입니다. 광야에 대한 어떤 지식이나 준비도 없이 애굽을 뛰쳐나왔습니다. 그야말로 광야에서 떼죽음 당하기 딱 좋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앞서 행하신 하나님'께서 밤에는 불기둥으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 불기둥과 구름기둥은 단순히 인도 역할만 한 것이 아닙니다. 사막에 사는 맹수나 사막의 더위와 추위로부터 이스라엘을 보호하는 기능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안전하게 보호하시면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가나안 맞은편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지금 모세는 저 가나안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저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라는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가나안을 정복하라는 것입니다. 40년 전에 부모 세대들도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렇지만 가나안을 들어가지 못하고 다시 광야를 방황하며 광야에서 모두 죽었습니다. 그 이유는 인도하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전철을 밟지 말자는 것입니다.

시편 23편은 다윗이 임종 직전에 자기 인생을 돌아보면서 지은 시입니다.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임종 직전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 시편을 읽어 주면서 임종을 맞이하게 합니다. 여기서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에 “부족함이 없었다. 두려움이 없었다. 한마디로 넘치는 삶, 승리의 삶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목자 되신 하나님이 자기를 푸른 풀밭, 맑은 물가로 인도해 주셔서 인생의 가뭄과, 인생의 궁핍을 경험하지 않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로 가든지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비록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가고, 메마른 사막을 건널지라도 우리 영혼이 안전하고, 우리의 삶이 풍족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저 내 삶을 잘 인도해 달라, 끝까지 인도해 달라고 간구하는 일입니다.

둘째, 길을 열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초나라와 한나라 사이의 안휘성(安徽城)전투에서 나온 고사입니다. 안휘성에서 항우가 이끈 초(楚)나라 군대가 한신이 이끈 한(韓)나라 군대에게 겹겹이 포위를 당하게 됩니다. 그러자 한나라에 투항하는 병사가 늘어나기 시작하여 군사도 줄어들고 군량미마저 떨어졌습니다. 그때 장량이라는 한나라 책사가 비책을 내놓았는데, 초나라에서 투항한 사람들에게 사면에서 초나라 노래를 부르게 합니다. 고도의 심리전인 셈입니다. 그러자 그나마 초나라 진영에 남아 있던 병사들까지 그 노래 소리에 전의(戰意)를 상실하고 맙니다. 달빛을 타고 들리는 고향 노래에 눈물을 흘리며 고향의 부모형제, 처자식을 그리워하며 창과 칼을 집어 던지고 한나라로 투항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항우는 이 전투에서 패하여 스스로 자결을 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사면초가란 사방이 꽉 막혀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경우를 두고 한 말입니다.

광야는 길이 없는 곳입니다. 사방이 터져있지만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든 광야에 갇히게 되면 생존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애굽을 나온 지 며칠일이 못되어 이스라엘은 광야에 갇히는 신세가 됩니다. 뒤에서는 애굽 군대가 추격을 해오고 앞에는 홍해바다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애굽 군대와 맞서 싸울만한 군사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홍해를 건널만한 장비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사면초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홍해 바다 가운데로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바다를 육지처럼 건너게 되었고, 추격하던 애굽 군대는 모두 바다에 수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지금 출애굽 2세대들도 그들의 조상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뒤에는 지난 40년 동안 그들을 힘들게 했던 광야가 있고, 앞에는 가나안의 관문인 여리고 성이 홍해 바다처럼 버티고 있습니다. 진퇴양난입니다. 이런 상황에 있는 저들을 향하여 모세는 홍해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앞서서 행하신 하나님이라고 불렀고, 하나님은 길을 열어주시는 분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고 따르라는 것입니다(예, 행12:7~10 참조).

기도할 때 환상을 자주 보는 권사님이 있습니다. 그분 댁에 심방을 갔다가 그분이 본 환상에 대한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환상 중에 자기가 천국으로 가는데 갑자기 시퍼런 강물이 자기 앞을 가로막더라는 것입니다. 강가에서 유심히 보니 강 위로 다리가 놓여 있긴 한데 머리카락처럼 가늘고 미풍에도 흔들리는 다리였습니다. 도저히 건널 용기가 나질 않았습니다. 너무 절망이 되어 강가에 그대로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오라’고 하는 주님의 음성이 들렸고, 이 음성에 믿음의 용기를 얻어 그 머리카락 같은 다리에 발을 내딛었습니다. 그러자 그 강 위로 넓고 튼튼한 다리가 쫙 놓이면서 천국으로 가는 길이 열리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르면 길이 열립니다. 아니 주님께서 길을 열어주십니다.  

상식적으로 강이 얼면 배가 다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러시아에서 언 강으로 배가 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러시아 배들이 특별히 튼튼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나라에 있는 배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쇄빙선(碎氷船)이라는 얼음을 깨면서 뱃길을 내주는 배 때문입니다. 앞에서 쇄빙선이 얼음을 깨면서 길을 내주면 그 뒤를 따라 배들이 갑니다. 우리에게 주님은 쇄빙선과 같은 존재입니다. 꽁꽁 얼어붙은 인생길에 길을 열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앞에 가시면서 쇄빙선처럼 얼음을 다 깨주시고 길을 열어주셔서 우리가 편하게 갈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우리 알 길이 답답하고 캄캄해도 주님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그러면 길이 열립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길을 열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인생길을 열어주시고, 축복의 길, 은혜의 길, 행복의 길, 번영의 길, 승리의 길을 열어주시는 분이십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우리 인생을 ‘질그릇’(5:7)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연약하고, 볼품도, 특별한 가치도 없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여기다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한 존재(5:8)라고 말합니다. 탈출구가 없는, 길을 잃어버린 존재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존이요, 범죄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 신자들은 이 질그릇에 보배를 담은 존재(5:7)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방으로 우겨싸도 싸이지 않고,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고, 거꾸러뜨림을 받아도 넘어지지 않는 존재라고 말합니다(5:8~9). 그 이유는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앞서 행하시면서 우리의 인도자가 되시고, 주님이 앞서 행하시면서 우리의 길을 열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살다보면 인생이 너무 힘들어 우리 인생이 흔들리고, 믿음이 흔들릴 때도 있을 것입니다. 악한 자들은 날로 번영하고 잘되는데 의롭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고통과 고난만 따릅니다. 그래서 낙심할 때도 있고, 좌절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믿음의 눈을 들어 주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선하고 좋은 길을 안내해 주시기 위해, 우리 앞에 가로막힌 장애물들을 제거해 주시기 위해, 앞서서 가고 계시는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을 믿고 나가야 합니다. 앞에서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인도하시고, 우리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예비해 주시고, 우리의 적들을 대신 물리쳐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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