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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을 빌어주는 사랑(06-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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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8,951회 작성일 06-02-28 14:51

본문

복을 빌어주는 사랑
벧전3:8-12

미국 과학전문 잡지 라이브 사이언스가 바다, 육지, 하늘 등 지구상의 동물 중 인간에게 가장 위험한 동물 ‘top10’을 선정 발표했는데, 제일 무서운 것은 연간 200만 명의 사람을 죽게 만드는 것으로 모기라고 합니다. 이 모기는 말라리아 등의 질병을 일으켜 사람을 가장 괴롭힌다는 것입니다. 2위가 매년 50,000명 이상의 사람을 죽게 하는 코브라이고, 3위는 60명의 사람을 한꺼번에 죽일 수 있는 독을 지닌 호주산 박스 해파리가 선정되었습니다. 그 뒤를 이어 북극곰, 독 개구리, 백상어, 코끼리, 아프리카 물소라고 합니다. 놀라운 것은 가장 작은 것이 가장 위험하고 무섭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우리 지체 중에서 가장 작은 혀가 가장 무섭고 위험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있기(약3:) 때문입니다. 말 한마디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말 한마디에 상처를 받기도 하고 치료를 받기도 하며, 낙심하기도 하고 격려와 용기를 얻기도 합니다. 이것이 말의 위력입니다.

본문은 혀의 아름다운 사용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잘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극적으로, 혀를 금하고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않는 것이고(10~11), 적극적으로 복을 빌어주는 것(9)입니다. 특히 본문은 고난을 당한 사람들에게 준 교훈입니다. 8절은 고난 중에 있는 성도를 대하는 태도이고, 9절은 핍박자를 대하는 태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나를 핍박하고 부당하게 대하는 사람에게까지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를 위하여, 즉 복을 빌어주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복을 빌어 주는 것이 영생의 유업을 차지하는 비결이라고 말합니다.

복을 빌어 주는 사랑
다같이 10,11절 말씀을 읽어 보시겠습니다.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을 보려고 하는 사람은 혀를 다스려서 악한 말을 못하게 하며, 입술을 다물어서 거짓말을 하지 못하게 하여라.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며, 평화를 추구하여 그것을 좇아라.”(표준새번역) 이는 복을 빌어주는 사랑의 특징을 잘 나타내 주는 말씀입니다.

1. 다른 사람을 향하여 부정적인 언어, 부정적인 혀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복음 빌어 주는 사람은 우선 혀를 금합니다. 함부로 혀를 사용치 않습니다. 말을 가려서 하게 됩니다. 아무리 극한 상황이라도 입에서 나온 대로 막말을 하지 않고 말을 가려서 합니다. 즉 긍정적인 말, 긍정적인 언어, 축복의 말을 사용합니다. 항상 좋은 말, 은혜로운 말만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상대에게 복이 되는 말만 하게 됩니다. 상대방이 행한 대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욕을 한다고 하여 욕을 하지 않고, 비난한다고 하여 비난하지 않습니다. 거짓말을 한다고 하여 거짓말로 상대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축복의 말을 하고, 복을 빌어줍니다.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구원해 달하고 기도를 합니다.

세상을 축복하도록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복을 빌어 주는 생애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은 누구든지 복을 받았습니다. 앉은뱅이가 얼어나 검고, 절뚝발이가 온전해 지고, 소경이 보고, 귀머거리가 듣고, 벙어리가 말을 하고, 문둥병자가 깨끗해졌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고, 창기가 성녀가 되고, 세리와 죄인이 의인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모두에게 복이 되었던 삶이 예수님의 생애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십자가형이라고 하는 극형을 받아 죽게 되었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온갖 욕설과 비난을 예수님께 쏟아 부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말에 상대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당해 주셨습니다. 오히려 십자가 위에서 저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저희를 구원해 달라고 하나님께 복을 빌며 임종하셨습니다. 끝까지 복을 빌어 주는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훗날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과 같은 길을 걷게 됩니다. 어떤 부당한 대우에도 그들의 입에서 부정적인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나오고, 감사의 말이 흘러 나왔습니다. 스데반의 경우는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예수님처럼 핍박자들을 용서하고, 저희를 위해 기도를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이렇게 한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극한 상황에서도 복을 빌어 주는 사랑을 보여준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자는 세상을 저주하도록 보냄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축복하도록, 세상에 복이 되도록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9).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도 세상에 복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세상이 복을 받도록, 아브라함이 축복의 기관이 되도록 부르셨습니다(창12:1~3). 예수님이 제자들을 전도실습을 보내시면서 너희가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그 집에 평안을 빌라(마10:12)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복을 빌어 주는 사람이 되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의 사명이요, 또한 우리 신자의 사명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자기가 당하는 부당함을 개의치 않고 상대방을 위하여 복을 빌게 된 것입니다.

마귀의 점령지가 되지 않기 위해서
복을 빌어 주는 사랑. 이것이 신자가 자신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는 비결입니다. 마귀는 틈만 있으면 우리 마음으로 비집고 들어오려고 합니다. 악한 말, 부정적인 말은 마귀가 우리 마음으로 들어오는 틈입니다. 우리의 혀가 부정적으로 사용되고, 우리의 말이 부정적일 때 마귀는 우리 마음으로 들어와서 우리 마음을 점령하게 되고, 결국은 우리의 삶을 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모습을 욥기의 삶을 통하여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마귀는 욥으로 하여금 부정적인 말을 사용하도록 종용합니다. 욥은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루아침 그 모든 복을 다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욥은 입술로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내가 모태에서 빈손으로 태어났으니 죽을 때에도 빈손으로 돌아갈 것이라. 주신 분도 주님이시요, 가져 가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그런데 이 때 마귀가 욥의 아내를 통하여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저주하라고 종용합니다. “당신이 이런 상황에서 신실함을 지킨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는 것이 낫겠다.” 그러나 욥은 이에 개의치 않고 “어찌하여 당신까지 어리석은 사람들처럼 말하는가, 우리가 누리는 복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는데, 어찌 재앙이라고 해서 못 받는다 하겠소.”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욥은 말로 하나님께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부정적인 말을 사용하는 순간 우리 마음은 마귀의 점령지가 되고, 우리의 혀는 마귀의 도구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온갖 악한 말들을 쏟아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을 빌어 주는 말은 하는 우리 마음을 지키는 비결입니다.

2. 악을 멀리하고, 선을 추구하게 됩니다.
말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의 생각이나 감정을 나타내는데 쓰는 음성, 또는 그것을 문자로 나타낸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은 마음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말은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악한 말은 악한 마음에서 비롯되고, 선한 말은 선한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그런데 그 역도 진리입니다. 의도적으로 선한 말, 좋은 말, 사랑의 말을 하다보면 선한 마음, 좋(아하는)은 마음, 사랑(하는)의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악한 말, 거짓말을 그치면 악에서 떠나 악을 멀리하게 됩니다. 아니 자연히 악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대신 선을 행하고, 선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은 그 말대로 되는 것입니다. 자기 말이 자기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못 살겠다. 못 하겠다. 못한다. 죽겠다. 등등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은 부정적인 사람이 되고, 결국 자기가 말한 대로 못한 사람, 못된 사람이 됩니다. 하지만 할 수 있다. 하겠다. 해보겠다. 한다. 등등 긍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은 긍정적인 사람이 되고, 하는 사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호빙 이펙트(The Hoving Effect)
여기 선을 행한다는 말에는, ‘인정해 주는, 있는 그대로 보는’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선을 행한다는 것은 그를 인정해 주고, 있는 그대로 보아주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엄청난 일을 행하는 것이 선이 아니라 그저 그를 인정해 주는 것. 이것이 그 사람에게 행하는 선입니다. 여기에 말과 연결을 시켜서 상대방을 인정해 주는 말, 상대방에게 복을 빌어 주는 말이 그 사람에 대해 선을 행한 것입니다. 사람은 인정해 주면 힘이 납니다. 반면에 무시당하면 힘이 빠지고 의욕이 없어집니다. 무시당하는 것을 좋아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이 바보야, 멍청아, 그것도 못해!” 그러는데 좋아 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반대로 ‘넌 할 수 있어!’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란다. 힘내라!’하면 의욕이 생깁니다. 바로 이 같은 격려, 칭찬이 선을 행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에게 복을 빌어 주는 것은 최선의 사랑입니다. 인정해 주고, 칭찬해 주고, 격려해 주고, 축복해 주는 것. 돈 드리지 않고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행입니다.

교육심리학에 '호빙 이펙트'(The Hoving Effect/기대효과)란 용어가 있습니다. 사람의 능력을 무시하지 않고 인정해 줄 때 나타나는 교육적인 효과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복을 빌어 주는 것이야 말로 최고의 The Hoving Effect입니다. 누군가에게 복을 빌어 주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악을 제거하는 비결입니다. 그리고 선을 행하고 추구하는 일입니다. 동시에 내가 누군가에게 복을 빌어 줄 때, 그 사람 역시 용기를 얻어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선을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3. 화평을 구하게 됩니다.
경상도 아가씨와 서울 총각이 사랑을 하여 결혼을 하였습니다. 어느 더운 날 신부가 시원한 국수를 만들어 신랑에게 내놓으면서 말합니다.
신부: 여보, 국시드세요.
신랑: 이것은 국시가 아니라, 국수라고 하는 거야!
신부: 그게 무슨 국수예요, 국시지!
둘은 팽팽하게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다가 옆집에 사는 국문학자에게 가서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학자: 국시와 국수는 서로 다릅니다.
부부: 국시와 국수가 왜 다르지요?
학자: 국시는 밀가리로 만들고, 국수는 밀가루로 만든 것입니다.
부부: 그러면 밀가리와 밀가루는 어떻게 다릅니까?
학자: 밀가리는 봉다리에 담겨있고, 밀가루는 봉투에 담겨 있습니다.
부부: 봉다리와 봉투는 어떻게 다릅니까?
학자: 봉다리는 손으로 만드는 것이고 봉투는 기계로 만든 것입니다.

하루는 아내가 감자를 삶아서 소금과 함께 내놓으며 남편에게 먹으라고 합니다.
남편: 누가 감자를 소금에 찍어먹나, 설탕에 찍어먹어야지. 빨리 설탕을 가져와요.
아내: 어떤 집에서 감자를 설탕에 찍어 먹어요? 우리 집에서는 항상 소금에 찍어 먹는데.
남편: 그거 참 이상한 집이네. 우리는 대대로 설탕에 찍어 먹는다니까!
그래서 감자를 설탕에 찍어 먹느냐, 소금에 찍어 먹느냐 하는 문제가 양쪽 집안싸움으로 번졌습니다. 그리고 대대로 내려오는 집안의 전통까지 말하게 되자, 그 싸움에 돌아가신 조상들까지 합세하여서 큰 전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급기야 두 사람은 이혼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집은 어떻게 드십니까? 어려서 저희 집에서는 감자를 먹을 때 아무 것도 안 찍고 그냥 먹었습니다. 그 때는 설탕도 소금도 귀했거든요.  

우스개 이야기긴 하나 여기에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이것이 어쩌면 우리의 현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이런 시시한 것(물론 이런 문제에 직면한 당사자들에겐 심각한 문제일 수 있음)들 때문에 좋은 관계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국수냐 국시냐의 문제도 아니고, 설탕과 소금의 문제도 아닙니다. 마음의 문제입니다. 관계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좋은 관계, 화평의 관계를 위해서는 시비(是非)에 앞서 상대방을 전적으로 수용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는 것,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것은 화평을 깨는 일입니다. 살아가면서 화평을 깨면서까지 해야만 하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보다 사람 사이의 화목을 강조하셨습니다(마5:24). 왜냐하면 형제간에 화목이 없는 예배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화평을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평화도구, 평화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어디에 가든지, 어느 곳에서든지 아름다운 분위가, 행복한 분위기, 축복의 분위를 만드는 분위기 메이커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말에 있습니다. 복을 빌어 주는 우리의 말에 있습니다. 서로 간에 복을 한번 빌어 보세요. 반드시 화평이 찾아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말대로 행하십니다.
우리가 복을 빌 때 하나님은 그대로 시행하십니다(12上). 그리고 민6:27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려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언이요, 약속입니다. 우린 성경을 통해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이삭이 야곱에게, 그리고 야곱이 그의 열두 아들들에게 축복한 모든 내용을 하나님께서는 다 들어주신 것을 보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 자녀와 이웃들에게 축복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시행하십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그 복이 나에게로 다시 돌아옵니다(9,10). 남에게 복을 빌어주는 일은 곧 내가 복을 받는 일입니다. 남을 잘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일은 내가 잘되고, 행복해 지는 비결입니다. 특히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복을 빌어주는 것. 이것은 최고의 사랑의 실천입니다. 주님은 그 사랑을 결코 잊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복 받기를 원하면 복을 빌어 주는 사랑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붙인 말입니다만)이것이 은혜의 ‘메아리 법칙’이요, 축복의 ‘거울 법칙’입니다. 복을 빌어 주는 사랑을 실천하여 하나님의 복을 받는 복된 삶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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