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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새롭게,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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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7,457회 작성일 23-02-05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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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새롭게, ‘

13:11~14

2023. 2/5. 11:00

의복()치료(suit therapy)

차림새와 심리상태를 연구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예를 들어 검정계통의 칙칙한 옷을 입고 다닌 사람은 마음 한 구석에 어두움이 있는 사람이고, 현란한 원색을 좋아하는 사람은 욕구불만이 있고, 밝고 가벼운 색을 좋아하는 사람은 기대감에 부풀어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이렇게 차림새를 보면 그 사람의 심리상태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꿈이 있는 사람과 자포자기(自暴自棄)한 사람은 입는 옷부터 다르다. 자포자기한 사람은 대충입고 다닌다. 얼룩이 묻어도 닦아내지 않고 그냥 입고 다닌다. 냄새가 나도 상관하지 않는다. 사실 사람의 마음은 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다. 그렇지만 마음도 겉으로 드러난다. 특히 잘 드러나는 것이 입고 다니는 이다. 이와 같이 그 사람이 입은 옷을 보고 그 사람의 심리를 파악하는 것을 소위 의상심리(Psychology of suit/dress)라고 한다.

 

또한 거꾸로 차림새가 마음에 영향을 준다. 흔한 예로 점잖은 남자도 예비군복 입으면 험한 행동을 한다반면에 정장을 입으면 달라진다. 정장을 입고 다닐 때와 아무렇게나 옷을 입었을 때의 마음자세가 틀리기 때문이다. 아무렇게 걷고, 아무 곳이나 앉던 사람이 새 옷, 깨끗한 옷을 입혀놓으면 걷는 자세가 달라지고 아무 곳이나 앉지 않고 자리를 가려서 앉게 된다. 또한 성격이 내성적인 사람에게 밝은 색상의 옷을 입고 다니게 하면 성격이 밝게 변하고, 반대로 덜렁대는 성격의 사람에게 검은 색 계통의 웅장한 색감의 옷을 입게 하면 점잖아지고 엄숙해 진다. 차림새와 마음가짐은 서로 긴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옷이 그 사람의 행동양식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어떤 옷을 입느냐에 따라 말이나 행동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옷을 통해 성격을 개조할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의상심리를 이용하여 치료하는 것을 의상()치료(Suit Therapy)라고 한다.

 

의복에 대한 다양한 의미

성경에도 의복과 관련된 내용이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가장 먼저 나온 내용이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다음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3:7)는 내용과 이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셨다(3:21)는 내용이다. 여기서 의복의 기능은 그저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는 것이 목적이었다. 물론 그 이후 인간은 계속해서 옷을 만들어 입었겠는데, 그러면서 옷의 역할과 기능도 부끄러움을 가리는 것에서 추위나 공격으로부터 지켜주는 보호의 역할, 더 나아가 자신을 꾸미는 역할 등으로 확장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옷은 점점 더 다양화되고, 그리고 옷은 심층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옷은 곧 신분과 직위를 상징하는 것이 되었다. 우리도 같은 의미로 경찰관이나 소방관에게 제복을 입힌다. 그러나 계급사회에서는 이러한 직위는 단순히 업무적인 역할을 넘어서는 신분을 보여주었다. 노예의 옷을 입으면 아무리 일을 잘하고 성공해도 결국 노예이고, 총리의 옷을 입은 자는 아무리 못해도 다스리는 총리인 것이다. 이렇듯 옷은 신분을 부여한다. 그래서 성경에 옷이 벗겨지고 입혀졌다는 은유적인 표현이 자주 등장하고 있는데, 이는 그의 신분이 추락하거나 세워질 때 사용되었다.

 

이제 옷은 신분, 직책을 드러내는 것을 넘어서 정체성을 나타낸다. 인간관계에서 기본이 되는 것이 정체성을 아는 것이다. 상대가 누구인지,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 관계가 성립된다. 나는 사람이고 상대가 개라면 그것을 알아야 상대를 사람처럼 대하거나 자신이 개처럼 행동하지 않게 된다. 서로 간에 자신의 정체성을 명확히 하는 것이 관계를 위한 기본이다. 그런데 이 정체성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것이 이다. 의사 가운을 입고 있으면 의사고, 작업복을 입고 있으면 노동자, 와이셔츠를 입고 있으면 회사원일 가능성이 많다. 왕이 거지 옷을 입고 밖에 나갔는데, 사람들이 자신을 거지취급 한다고 탓할 수 없다.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이 그렇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옷은 그 사람의 정체성의 상징이다. 그러니 어떤 옷을 입고, 어떻게 입느냐가 중요하다. 이는 성경이 상당히 주목하고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

신약에서도 옷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오고 있는데, 주로 성도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상징적, 혹은 은유적인 표현으로 자주 사용되고 있다. 본문만 해도 두 번이나 나오고 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12). 성도의 정체성을 전제로 한 일종의 은유적인 표현이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단순히 옷을 벗고 입는 행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옷을 벗고 입는 행위를 통해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의 자세를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인류의 종말,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가 가까웠으니 영적으로 깨어있어 성도로서 합당한 생활을 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영적으로 깨어있어 성도로서 합당한 생활을 하는 것을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고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어 나온 말씀도 비슷하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14). 여기서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도 은유적 표현이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은 주님을 닮는’ 이다. 닮는다는 것은 모방하는 것이다. 20세기 대표적인 기독교 변론가 C.S. 루이스는 이를 가장하다.’는 아주 파격적인 말로 설명하고 있다. 가장에는 나쁜 의미와 좋은 의미가 있다. 나쁜 의미로는, 진짜를 밀어내는 가장이다. 실제로는 돕지 않으면서 돕는 척만 하는 것이다. 좋은 의미로는, 진짜로 나아가는 가장이다. 실제로는 미워하지만 사랑하기로 결심하고 억지로라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면 나중에는 진짜 사랑하게 된다. 맥스 비어봄(max beerbohm)행복한 위선자라는 단편소설이 있다. 주인공 조지 헬(hell: 지옥)은 이름대로 악행을 일삼는 전형적인 악인이었다. 게다가 생긴 것까지 험악했다. 그런 그가 그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은 아름다운 여인을 만난다. 그리고 사랑을 고백했다. 하지만 그녀는 험악하게 생긴 사람과는 결혼할 수 없다며 그의 청혼을 거절했다. 그는 그녀를 포기할 수가 없어 밀랍으로 성자의 가면을 맞춰 쓰고, 이름도 조지 해븐(Heaven: 천국)으로 바꾼 다음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여 결혼을 하게 된다. 그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게 되는데, 그럴수록 자신의 정체가 들통 날까 조바심을 가지고 성자처럼 살았다. 그러면서 항상 아내에게 미안함과 무거운 죄책감을 가졌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정체를 알고 있던 사람이 찾아와 그의 아내 앞에서 그의 정체를 폭로하며 그의 가면을 벗기고 만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가면 속의 그의 얼굴은 옛날의 험악한 조지 헬의 모습이 아니라 그가 쓰고 있었던 인자하고 경건한 성자의 모습 그대로였다. , 조지 해븐의 모습이었다. 가면 뒤에서 끊임없이 회개하고 성자를 닮으려고 애써 노력하였더니 그의 얼굴이 바뀐 것이다. 성도의 삶도 이와 같다. 물론 진짜 변화되면 좋지만, 그리고 진짜 변화가 되어야 하지만, 처음부터 진짜 변화가 가능하지 않다. 억지로라도 기도하고, 억지로라도 성경을 읽고, 억지로라도 예배를 드리고, 억지로라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다. 이렇게 변화된 듯이 행동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옷 입다.’로 표현한다. 사실 이것이 신앙생활이다. 닮아가는 과정이 신앙생활이다.

 

다른 하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은 주님과 연합하는’ 이다.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to put on)는 것은 재킷처럼 걸친다.’(throw on)는 뜻이 아니다. 그것으로는 우리 몸의 모든 부분을 충분히 덮을 수 없다. 헬라어 원문에서 이 말은 마치 자루 속에 푹 집어넣듯이 잠기는(sinking into)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이를 갈라디아서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위해 세례를 받는 것이라고 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3:27).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다는 것은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우리 기독교 세례는 주님의 죽으심과 합하여 옛사람이 죽고, 주님의 부활하심과 합하여 주님 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다는 것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으로 옷을 입는다는 것은 주님과 연합하는 신앙을 뜻한다. 루터는 이를 주님께 달라붙는 믿음(fides apprehensiva)이라고 했다. 말세를 성공적으로 잘 살아가는 비결, 곧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 것, 주님께 꽉 달라붙는 믿음을 갖는 것이다. 이것이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의 자세여야 한다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께도 이미 말씀하셨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18:8). 이는 물음이 아니라 선언이다. ,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다는 선언이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에서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자고 한 것이다. , 주님과 연합하는 삶, 곧 주님께 달라붙는 믿음의 삶을 살자고 한 것이다. 이를 옷 입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라바쉬(לָבַשׁ)

또한 옷을 입는다는 것에는 임하다.’, ‘사로잡다.’, ‘감동시키다.’는 의미도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사람에게 결과적으로 주어지는 복과 은혜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영(성령)이 임하다.’, ‘성령이 사로잡다.’ ‘성령이 감동시키다.’ 히브리어로 라바쉬(לָבַשׁ)이다(6:34). 이 단어는 입다.’의 뜻에서 왔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이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주시는 데서 유래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3:21). 타락한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살수 없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은혜의 옷을 입혀주셨다. 라바쉬다.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살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어야만 살 수 있는 존재다. 이것이 라바쉬다. 그러면 누가, 어떤 사람이 주님의 생명으로, 주님의 능력으로, 주님의 은혜와 복으로, 주님의 성령으로 라바쉬하게 될까누구에게,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이런 은혜와 복을 누리게 될까? 주님을 닮기 위해, 주님처럼 되기 위해 억지로라도 기도하고, 억지로라도 성경을 읽고, 억지로라도 예배를 드리고, 억지로라도 섬기고, 억지로라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님의 성령이 라바쉬하게 된다. 또한 주님과 연합한 삶, 주님께 달라붙는 믿음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 주의 성령으로 옷을 입혀주신다. 그래서 이런 은혜와 복을 누리게 된다. 매일 옷을 입고 일상을 시작하는 것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 일상이 되어 더욱 주의 영이 임하고, 주의 영에 사로잡히고, 주의 영으로 감동되는 금년 한 해가 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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