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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원리로서, ‘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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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6,977회 작성일 23-03-12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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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원리로서, ‘절제

3:1~6

2023. 3/12. 11:00

만족지연(Delayed Gratification) 능력

만족지연 능력이란 말이 있다. 더 큰 가치를 위해 당장의 욕구나 만족을 참아내는 능력을 말한다. 다른 말로 마시멜로 법칙’(marshmallow's law)이라고도 한다. 미국 스텐포드 대학 월터 미셀 박사가 40여 년간 연구한 결과다. 1966, 당시 4~5세의 어린이 653명을 대상으로 특별한 실험을 했다. 마시멜로 1개를 주면서 ‘15분 동안 먹지 않고 기다리면 2개를 더 주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다수의 아이들은 먹고 싶은 욕구를 참지 못하고 먹어버렸다. 금방 먹기 시작한 아이들이 있었는가하면 15분 가까이 가서 무너진 아이들도 있었다. 연구팀은 얼마나 빨리 마시멜로를 먹기 시작했는지부터 기록하기 시작해 개별적으로 그들의 성장과정과 사회생활을 45년간 추적 조사했다. 욕구를 통제하지 못한 아이들은 대체적으로 허덕이는 삶을 살고 있었는데, 마시멜로를 빨리 먹은 아이일수록 약물중독이나 비만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반면 15분을 참고 기다렸던 아이들은 비교적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었고, 현실의 감각적 욕구보다는 미래에 치중하는 특성이 있었다 한다. 미셀박사는 작은 차이가 큰 차이를 만든다는 평범하지만 기적 같은 사실, 욕구를 참아낸 아이들이 성공한다.’마시멜로의 법칙을 완성시켰다. 아울러 그는 행복한 삶은 머리(IQ)가 아니라 자기통제 능력(절제)이라고 덧붙였다.

 

행복지수 세계1위 덴마크가 사랑하는, 덴마크 서점가를 약2(106) 동안 연속 석권한 베스트셀러 작가 스벤 브링크만이란 사람이 있다. 사람들에게 철학열풍을 이끈 라디오 철학강의로도 유명한데, 그는 행복의 비결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행복은 인생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덜어내는 데 달렸다.’ 간단하지만 아주 명쾌한 정의다. 생각해보면 누군가에게서 들어본 것 같은 말이다. 미켈란젤로가 비슷한 말을 했다. 그의 조각품을 보고 사람들이 어떤 이런 걸작을 만들었냐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했을 뿐입니다.’ 우리를 행복으로 인도하는 것은 더 가지거나 채우려고 하는 욕망이 아니라 절제하는 것이란 뜻이다. ,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라는 것이다. 덜 필요한 것, 덜 중요한 것들을 덜어내면서 지금 있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 행복의 비결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유혹과잉 시대. 유혹하는 것이 지나칠 정도로 많다. 반면에 자제력을 발휘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졌다. 기술의 발달로 새로운 유혹거리와 그것을 즉각적으로 충족시킬 수단이 엄청나게 많이 생겨났다. 전화 한 통이면 수고와 시간을 들이지 않고 밤늦게라도 뜨끈뜨끈한 치맥을 마음대로 즐기게 되었다. 이렇게 편리한 현실은 심사숙고할 틈을 주지 않고 충동에 대해 즉각적인 만족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현대인은 자제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절제의 계명

최초 인간의 비극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이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환경 에덴동산을 주셨다행복’ 혹은 기쁨이란 뜻을 가진 에덴이란 단어가 말해주듯 에덴동산에는 모든 좋은 것이 다 갖추어진 말 그대로 기쁨이 가득한 행복한 곳이었다아담과 하와는 그곳에 살면서 그곳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었다단 한 가지만 제외하고그 한 가지는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였다. 그 외는 모두가 그들에게 허용이 되었고, 누릴 수가 있었다. 인간에게 먹고 싶은 본능과 먹을 수 있는 자유를 주셨지만 절제를 해야 복을 누리게 될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누릴 자유와 행복과 기쁨을 지키는 일종의 울타리와 같은 것이다. 히브리어로 동산을 ’(גַּן)이라고 하는데, 이는 울타리로 둘러싸인 땅이란 뜻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주어진 자유는 울타리 안에서의 자유이고, 행복이고, 기쁨이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계명이라고 한다면 에덴의 계명은 곧 절제의 계명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욕망을 절제해야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만드신 것이다. 이것이 에덴의 자유원칙이고, 행복원칙이고, 기쁨원칙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울타리가 있다.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씀 안에 자유가 있고, 행복이 있고, 기쁨이 있다. 날씀 안에 거하면서 말씀을 따라 살면 자유도, 행복도, 기쁨도 보장을 받을 수 있다.

 

절제는 에덴의 행복과 기쁨과 자유를 누리는 유일한 계명이었다. 하지만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는 절제하지 못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이것을 잘 보여준 것이 본문이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6). 하나님의 말씀이 하와에게 더 이상 작동하고 있지 않는 상태, 그래서 자제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하와의 모습이다. 유감스럽게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모든 나무를 뒤로 하고, 유독 하나님께서 금하신 한 나무에만 집중한 것이다. 사실 이것이 유혹의 특징이다. 별 것도 아닌데, 그것이 아니면 죽을 것만 같고,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이것이 유혹에 빠졌던 사람들의 보편적인 고백이다. 그러니까 그것을 강하게 갈망하게 되고, 그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고 급기야 선을 넘게 된다. 절제하지 못하고 자제력을 잃고 만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다. 그 결과 행복도 기쁨도 자유도 모두 잃고 에덴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오늘을 사는 우리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의 탐욕을 절제해야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던 사단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우리의 행복을 빼앗아가려고 끊임없이 우리의 본능적 욕구를 자극하고 있다. 그래서 절제는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복을 소중히 지킬 줄 아는 지혜다.

 

행복을 누리는 비결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도 행복도 기쁨도 모두 허용하셨지만 제한을 두셨다. 무엇이든 먹을 수 있으나 선악과는 먹지 말라는 말씀처럼 성낼 수는 있으나 죄는 짓지 말고, 가질 수 있으나 도적질은 하지 말고, 말할 수는 있으나 더러운 말은 하지 말라고 했다. 이렇게 항상 절제가 요구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할 수 있는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을 구별하는 지혜가 절제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주려면 화끈하게 주어버리지 왜 자꾸 제한을 두느냐고. 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들어 아담과 하와로 유혹에 넘어지도록 만들었냐고. 그러나 생각해 보라! 책임감이 있고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는 자녀가 해달라는 대로 다해주지 않는다. 돈이 없어서도 그럴 수 있지만 돈이 있어도 마찬가지다. 자녀 입장에선 당장은 섭섭할 수 있으나 결국은 그것이 자녀를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부모의 제한을 통해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자신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 곧 절제하는 법을 훈련하게 된다. 사실 자녀가 해달라는 대로 다해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하지만 이것은 자녀를 망치는 지름길이다. 절제를 배우지 못하면 자제력이 부족하고, 자제력이 없으면 욕구만 점점 커지게 되고, 충족되지 않는 욕구는 불만으로, 혹은 비행으로 번지게 된다.

 

행복은 절제에서 피어나는 꽃이다. 절제가 없는 곳에서 느끼는 행복은 신기루일 뿐이다. 스토아학파의 창시자 제논에게 허영이 심하고 겉치레에만 치중하는 제자가 있었다. 절제하지 않는 그를 불러 제논이 야단을 쳤다. 그러자 그가 오히려 반문했다. ‘나에게 그만한 돈이 있어서 쓰는데 그것이 무슨 잘못입니까?’ 그 때 제논이 말했다. ‘소금이 많이 있다고 요리사가 요리할 때 소금을 잔뜩 집어넣어도 맛이 좋단 말이냐?’ 절제란 없거나 모자라기 때문이 아니라 많지만 아끼고 삼가는 것을 의미한다. 할 수가 있고, 자유도 있고, 권리도 있지만 스스로 포기하거나 제한한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10:23,24). 이것이 곧 절제의 정신이다. 모름지기 성도의 삶이 이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은 성숙하고 행복한 사람이다. 행복을 만드는 사람이다. 절제는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을 선택하는 믿음이다. 행복은 욕심을 채움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욕심을 다스리는 절제의 마음에 주어지는 것이다. 게다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스스로 절제한다면 행복을 주변으로 퍼뜨리는 일이다.

 

행복을 훈련하는 뜻깊은 절기 사순절

오늘이 사순절 셋째주일이다. 사순절에는 너나없이 ‘~하지 않기를 강조한다. 과욕(過慾), 과식(過食), 과용(過用), 과락(過樂) 등 말 그대로 모든 지나침()을 삼가는 것이다. 경건의 절기에 크든 작든, 많든 적든 지나침을 끊는 훈련은 중요하다. 비교적 세속적 습관에 관대한 독일 개신교회도 사순절 기간만큼은 경건생활 운동을 벌인다고 한다. 그 이름은 일곱 주간의 포기’(Sieben Wochen ohne). 술은 물론 초콜릿 등 달콤한 군것질 금지, 육류소비 줄이기, 텔레비전 오락 프로그램 시청절제, 과도한 취미생활과 고질적인 습관의 중단 및 고치기에 힘쓰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경건생활 참여자가 약 200만 명 이상에 이른다고 한다. 기독교 환경운동 단체에서 사순절 기간에 이런 활동을 펼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사순절 기간만이라도 리모컨금식’, ‘종이금식’, ‘소비금식’, ‘탄소금식등을 권장하는 운동이 그것이다. 사소하지만 이러한 절제와 금식운동은 기후변화 시대에 필요한 미덕을 넘어 생존전략이고, 나아가 공동체 행복 회복운동이라고 생각한다(참고자료를 가지고 가서 실천해 보기 바람).

 

이와 같은 사순절 절제운동은 평소 습관을 당분간 포기하려는 실천을 의미한다. 일상의 욕심을 자제하고, 일상생활에서 경건의 훈련을 습관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주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려는 자기 비움(Kenosis)이다. 억지 경건과 무리한 절제가 아닌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을 닮고, 배우는 신앙훈련이다. 그래서 주님의 마음으로 나와 화해하고, 세상의 아픔과 연대하며, 이웃의 고민과 공감하는 것이다. 고난의 십자가와 눈높이를 맞추면서 주님의 뜻을 더 잘 이해하려는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사순절은 주님과 더 가까이 친밀한 행복을 누리고, 그 행복을 주변으로 퍼뜨리는 절기다. 이렇게 주님과 동행하며 경건행진을 이어가면서 하루하루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고, 의로운 삶을 결단하는 것이 성도의 모습이다. 이런 가운데 사순절은 고난주간을 거쳐 부활로 향하게 된다. 이처럼 사순절을 경건하게 지키려고 한 사람에게 부활의 감격과 기쁨, 그리고 행복은 훨씬 클 것이 자명하다.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을 닮고, 배우는 신앙훈련을 통해 덜 필요하고, 덜 중요한 것들을 스스로 제거하고 포기하여 심령과 가정, 교회에 에덴이 회복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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