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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어야 할 복음Ⅱ,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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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333회 작성일 09-08-02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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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어야 할 복음, ‘생명’

요10:10

 

2009. 8/2 11:00

왜곡된 복음

1930년대에 조선교회의 영성회복을 위해 몸부림쳤던 감리교 이용도 목사(1901~1933)는 당시 교회들을 향하여 ‘교회는 있는데 예수님은 없다. 설교는 있는데 복음은 없다. 찬양대는 있는데 하나님은 없다.’고 탄식했다. 오늘날 교회 상황도 여기서 크게 나아진 것이 없는 것 같다. 오히려 더 세속화 되어 있다. 교회의 규모는 커지고, 외양은 화려하고, 예배의식은 정교하고, 신학교와 신학자의 숫자는 늘어나고, 각종 예배와 집회는 성황을 이루는데,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딤후1:7)은 찾아보기 힘들고, “청결한 양심과 거짓없는 믿음”(딤후1:3,5)의 자녀들이 드물다. 예수 믿어 복을 받고 잘살게 되기를 바랄 뿐,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딤후1:8)을 받으려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을 볼 때, 능력의 복음에 대한 회의가 든다.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롬1:16)이라고 했는데, 그 복음을 담지(擔持)한 교회, 복음을 믿고 있는 신자들이 이 모양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복음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아니다. 복음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문제다. 믿는다면서 복음을 왜곡(복음적 신앙의 왜곡)시키고 있는 것이다. 잘못된 것을 신앙으로 착각하고 있기에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같은 물인데 뱀이 먹으면 ‘독’이 되고,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신학자 폴 틸리히(P. Tillich)는 그의 책 「믿음의 역동성」(Dynamics of Faith)에서 복음적 신앙의 왜곡 상태를 이야기하고 있다.

 

첫째는 신앙의 지적 왜곡(intellectual distortion of faith)이다. 지식을 극대화시켜 아는 것을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성경의 내용이나 구절, 혹은 신앙교리를 많이 알면 저절로 신앙이 보장된다는 생각이다. 아는 것으로 하면 우리는 사단을 당할 수 없다. 그렇다고 우리는 사단을 믿음의 존재라고 말하지 않는다. 올바른 신앙은 지식을 요구하지만 지식이 신앙은 아니다.

 

둘째는 신앙의 도덕적 왜곡(moral distortion of faith)이다. 계명을 잘 지키고, 성수주일하고, 술 담배를 안하고, 구제활동에 열심히 참여하면 저절로 영성이 좋아지거나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경우이다. 계명을 잘 지키고, 성수주일하고, 술 담배 안하고, 구제활동에 열심히 참여하는 것,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이고 신자로서 마땅한 바다. 하지만 이런 외형적인 도덕적 진지한 생활이 꼭 신자의 영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셋째는 신앙의 감성적 왜곡(emotional distortion of faith)이다. 초감각적이고, 초심리적인 신비적 체험을 전부로 생각하는 신앙이다. 신앙 영역에서 신비적인 요소는 중요하다. 그리고 성경이 인정하고 강조하는 바다. 성령의 불 체험, 방언, 예언, 통역, 병 고침, 귀신을 쫓아냄 등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이런 체험들은 소중한 은사이고, 개인이나 신앙공동체의 신앙에 열정을 가져다준다. 그런데 이러한 신비체험이 반드시 건강한 바른 신앙이거나, 올바른 영성이라는 보장은 없다.

 

 

복음의 본질은 무엇인가?

위에서 말한 지식, 윤리, 감성 이 모두는 신앙의 중요한 내용들이다. 신앙은 어느 하나에 치우치지 않고 이 모두를 포함한다. 올바른 신앙은 지적 동의나 도덕적인 실천, 그리고 감성적 공감이나 체험 그 이상이다. 신앙은 전인격의 문제이고, 존재의 문제다. 폴 틸리히는 신앙을, ‘새로운 존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새로운 존재의 능력과 의미에 옛 인간존재가 부딪혀 무너지고, 새 생명의 능력에 붙잡힘을 받아 그 인간존재가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는 것이라.’고 했다. 즉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옛 사람이 죽고,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우리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는 말이다. 여기에 복음의 본질이 잘 드러나고 있다. 그렇다면 복음의 본질은 무엇인가? 본문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말씀하신다. 그것은 ①“생명을 얻게”(생명을 주는 것) 하는 것, 그리고 ②“더 풍성히 얻게”(그 생명을 더 풍성하게 하는 것) 하는 것이다. 이는 동시에 우리 기독교 복음의 본질에 대한 말씀이기도 하다. 그것은 곧 ‘생명’이다.

 

 

1. 복음은 생명을 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요14:6)고 말씀하셨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11:25,26)라고도 하셨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생명’을 위해서 왔다고 하셨다. 예수님이 생명이고,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말씀이다. 기독교는 이 예수님을 믿고, 또한 전파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 생명을 위한 종교라고 말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이 복음이기에 복음 역시 ‘생명’이다. 바울은 이 복음을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롬1:16)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구원은 생명이다. 즉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복음이다. 복음은 인간을 살리는, 죄로 인하여 죽은 영혼은 물론 실제적인 삶에까지 생명을 주는 능력이다. 때문에 복음은 모든 사람이 반드시 믿어야만 한다.

 

창1:2절은 갓 창조된 세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여기 밑줄 친 세 단어는 아직 각 요소가 갖추어지기 전 우주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혼돈(chaos)은 무질서를 뜻하고, 공허(empty)는 무의미, 그리고 흑암(darkness)은 죽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예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심령상태, 즉 예수님을 믿기 전 죄로 물든 우리의 모습을 상징한다. 죄인의 심령은 혼돈과 공허, 그리고 흑암 그 자체다. 그런데 3절에서 빛이 창조됨으로 혼돈이 사라지고, 공허가 사라지고, 흑암이 사라졌다. 그곳에 질서가 생기고, 의미로 채워지고, 생명이 약동하기 시작했다. 요한은 이 빛이 ‘예수님이시라’(요1:4)고 했다. 예수님은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빛이신 예수님을 만나면 길을 잃고 방황하던 사람이 자기가 나아가야 할 분명한 방향과 길을 발견하게 되고(길), 왜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고 자신의 존재감을 잃고 허무의식에 시달리던 사람이 삶의 이유와 목적을 발견하게 되고 의미와 가치로 충만한 삶을 살게 된다(진리). 그래서 흑암의 세력, 죽음의 세력을 이기고 생명으로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생명).

 

복음서에 나온 예수님의 삶을 보면, 모두가 고치고 먹이고 회복시키고 세워주고 살리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심지어는 자신 목숨까지 주시면서 이 일을 이루셨다. 예수님은 생명을 주기 위해 오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새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고 외친 것이다. 여기서 ‘이전 것’이란 혼돈과 공허, 그리고 흑암을 말한다. 그런데 예수님 안에서는 어떤 혼돈이나 공허도, 흑암도 그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그리고 새로운 생명을 가진 새로운 존재로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예수님이 복음이다. 이것이 없으면 신자가 아니고, 교회도 교회가 아니다. 이 생명의 복음, 생명을 주는 이 복음이 여러분의 삶에 충만하기를 원한다.

 

 

2. 복음은 그 생명을 더 풍성하게 하는 것이다.

신약성경에 생명이란 뜻으로 두 가지 헬라어가 나온다. ‘프쉬케’(ψυχη)와 ‘조에’(ζωη)가 그것이다. 또한 ‘비오스’(βιος)란 단어가 있지만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프쉬케(psyche)는 목숨, 즉 ‘지상적 생명’을 뜻하고, 조에(zoe)는 지상적 생명을 뜻하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구원의 선물로 주어질 생명, 즉 ‘영원한 생명’을 뜻한다. 그런데 지상적 생명인 육신의 생명이 건강하게 유지되고 풍성하기 위해선 ‘밥’을 먹어야 한다. 밥은 생명이며, 또한 그 생명을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아무리 강한 사람도, 그리고 아무리 깊은 영성을 가진 사람도 먹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영원한 생명인 영적 생명 역시 ‘밥’이 필요하다. 이 영적 생명을 위한 ‘밥’이 곧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자신이 “생명의 떡the bread of life”(6:35,46),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the living bread”(6:51)이라고 하셨다. 우리의 밥으로 오셨다는 말씀이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또 하나의 목적을 “......양으로 생명을......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다. 생명을 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것까지 주님은 관심을 가지셨다. 주님은 우리가 단순히 구원 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구원의 생명을 풍성히 누리기를 원하신다. 이것은 자녀를 향한 모든 부모의 마음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빠 가시고기처럼 자신을 우리의 ‘밥’으로 제공하신 것이다. 생명의 주님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신 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함이었고, 영광스러운 주님이 스스로 그 영광을 포기하고 비천하게 된 것은 우리를 영광스럽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부요하신 주님이 스스로 가난하게 된 것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기 위함이었다(고후8:9). 그러므로 우리의 영적 생명이 살기 위해선, 더욱 풍성해지기 위해선 날마다 이 생명의 양식을 먹어야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예수 그리스도를 마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숨을 쉬어야 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6:53~55).

 

이런 표현 때문에 로마시대 때 신자들이 ‘사람 고기를 먹고, 사람 피를 마시는 패역한 무리들’로 오해를 받기도 했다. 여기서 예수님을 먹고 마신다는 말은 좁은 의미로는 ‘성만찬’을 의미하고(눅22:19~20), 넓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말씀이 곧 예수님(요1:14)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이 말씀을 영의 양식(마4:4)이라고 말씀하셨다. 복음의 말씀이 우리를 살리고, 우리를 더 풍성하게 한다. 복음은 생명이고, 그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양식이기 때문이다.

 

밥에는 중요한 영적 의미가 있다. 밥은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양식이다. 먹어도 되고 안 먹어도 되는 것이 아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믿어야만 하는 것이다. 밥은 매일 먹는 양식이다. 하루 세끼씩 규칙적으로 먹어야 건강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 복음이신 예수님과의 교제도 매일같이 이루어져야 하고, 복음의 말씀도 매일 묵상해야 한다. 그래야 영적인 풍성함을 경험할 수가 있다. 밥은 힘의 원천이다. ‘밥 심으로 산다.’는 옛말이 있다. 밥을 먹어야 힘이 생긴다. 조상들은 머슴을 뽑을 때 한 가지 시험을 치렀다. 그것은 소위 ‘먹는 시험’이다. 반찬은 간장 한 종지가 전부고 밥은 꽁보리밥, 큰 놋그릇에 위 아래로 가득 담았다. 이것을 가장 맛있게 먹은 사람이 합격이다. 먹은 만큼 힘을 쓰고 일을 잘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복음이 영적인 힘의 원천이다. 복음에 집중할 때 능력 있는 생활, 영향력 있는 삶을 살 수가 있다. 밥은 나누어 먹어야 한다. 함께 나누어 먹을 때 맛도 있고, 더욱 풍성해 진다. 이는 어린 시절 시골생활에서 자주 경험했던 풍경이다. 특히 특별한 것이 하나라도 있으면 이웃과 나누거나 초청했다. 복음은 나누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가장 특별한 음식이기에 반드시 나누어야 한다. 서로에게 밥이 되어야 한다. 밥은 먹히기 위해 존재한다. 밥은 먹힘으로써 없어진다. 그러나 그 없어짐은 그냥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고 그 생명을 이어가게 한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밥이 되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서로 ‘너는 내 밥이다.’고 악을 쓰며 살지만, 우리 신자는 서로 ‘나는 당신의 밥이다.’며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면서 살아야 한다. 서로에게 밥이 되어주는 것, 이것이 진정한 복음의 삶이다. 생명을 살리고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삶이다. 옆 사람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해보자.

 

‘나는 당신의 밥입니다.’

‘당신의 밥이 되겠습니다.’

 

 

시편1편에 한 나무 이야기가 나온다. 이 나무는 시절을 좇아 많은 열매를 맺고, 어떤 가뭄도 걱정이 없다(1:3). 이 나무의 형통의 비결은 두 가지다. 그것은 이 나무의 수종(樹種)이나 어떤 탁월한 생명력과 같은 나무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①시냇가에 심어진 것이고, 그래서 ②지속적으로 수분을 공급받았기 때문이다. 신자의 형통 비결도 마찬가지다. 그 비결이 우리 안에 있지 않다. 하나는 복음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복음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공급받는 것이다. 즉 여호와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이다(시1:2). 이것이 우리 신앙의 본질이고 핵심이다. 여기에 집중할 때 어떤 시련에도 무너지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됨을 선포하는 영향력 있는 신자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신부된 교회의 모습을 회복할 수가 있다. 나를 살리고, 나를 풍성하게 하는 것은 복음이다. 이 복음 안에서, 이 복음의 말씀을 양식 삼고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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