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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어야 할 복음Ⅵ, ‘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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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525회 작성일 09-08-30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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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어야 할 복음Ⅵ, ‘치유’

-권세를 사용하라.

행3:1~10

2009. 8/30 11:00

질병과 인간

서울대의대 황상익 교수는 그의 책「문명과 질병으로 보는 인간의 역사」에서 ‘인류의 역사는 질병, 그 극복과 좌절의 역사’라고 했다. 인간의 개인적, 집단적 고통 가운데 질병만큼 시공을 초월하여 인류를 괴롭혀 온 것이 없고, 인간의 노력 가운데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울인 것만큼 지속적인 활동을 찾기도 어려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질병은 한 나라의 존망을 좌우하기도 했고, 더 크게는 사상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문명의 모습과 역사의 방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이런 의미에서 질병이야말로 역사의 동인(動因)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에 의하면, 그리스의 도시국가(천연두)와 로마제국(말라리아)의 멸망이 역병 때문이었고, 신대륙의 원주민(천연두)이나 중세 유럽(흑사병)이 몰락하게 된 것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실패도 발진티푸스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까지도 질병과 인간은 서로 정복하고 진화하며 질긴 인연의 끈을 이어오고 있다. 지금도 ‘적과의 동침’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질병의 긍정적인 영향도 많다. 흑사병이 있기 전 유럽은 한센스 병이 창궐하였다. 그런데 흑사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긴 했지만 희생자 대부분이 한센스 병 환자들이었고, 이로 인하여 한센스 병이 사라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농업중심의 중세가 막을 내리고 상공업 중심의 근대사회로 발전하게 되었고, 질병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과학과 의학의 발전을 가져왔다. 아울러 이런 재난은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하나님께로 향하게 만들었다. 아마도 질병을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활용한 것은 예수님이 최초라고 생각한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질병을 죄의 결과요, 신의 저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9:3)고 해석하셨다. 그래서 이런 시각으로 환자를 바라보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치유하셨다.

 

복음의 도구가 된 질병

아무튼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사역 2/3가 치유와 관련된 것을 보면 질병이 얼마나 인간에게 심각하고, 또한 보편적인 문제인지 알 수가 있다. 본문은 예수님의 사역을 이어받은 제자들의 치유사역과 관련된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치유를 복음전파의 중요한 도구로 사역하셨던 것처럼, 제자들 역시 치유를 복음사역의 중요한 도구로 사용하였다. 바클레이(W. Barclay)는 치유사건을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복음)앞으로 모이게 하는 종(鐘)이라’고 표현하였다. 이는 참으로 절적한 표현이다. 본문의 이 사건은 사도들, 특히 베드로와 요한을 예루살렘에서 유명인사가 되게 했고(행3:11), 이 사건을 통하여 남자만 5천여 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행4:4). 폭발적인 복음의 역사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므로 질병은 이제 더 이상 절망이나 저주가 아니다. 복음으로 치유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소중한 도구다.

 

미문(美門)과 앉아서 구걸하는 사람

정말 서로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여러 개의 문이 있었는데, 미문은 성전 동편의 동문으로 성전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는 성전 구역으로 들어가는 입구 중에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문으로 많은 예배자들이 이 문을 이용하였다. 그런데 거기서 결코 아름답지 못한 일이 날마다 일어나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문 앞에 나면서부터 40여 년 동안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한 남자가 구걸을 하고 있었다. 이는 아름다운 장소에 일어나고 있는 참으로 비극적인 모습이다. 이 모습은 단순히 한 개인의 비극이라기보다는 병든 세상, 병든 인간의 슬픔 자화상이다. 다른 사람에게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되고 아름다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고통이 되고 아픔이 되고 부끄러움이 되고 있는 나의 모습이다. 복음의 능력으로 치유되고 회복되어야 할 나와 우리의 모습, 이 세상의 모습이다.

 

권세를 사용하라.

반면에 베드로와 요한은 신자와 교회가 추구해야 할 모습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이런 세상과 사람들을 향해 강한 도전장을 던진 사람들이다. 이들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지체부자유자를 치유하여 그 아름다운 문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었고, 그곳을 기쁨과 감격의 장소, 영광의 장소가 되게 했던 사람들이다. 신자는 바로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복음으로 그가 있는 곳을 아름답게, 만나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지체부자유자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죽은 자나 다름없었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한 걸음도 움직일 수가 없었고, 날마다 성전에 나오지만 성전 문 앞에만 앉아 있었고,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기보다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구걸하는 삶이 전부였다. 그런 그가 복음으로 치유되어 스스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성전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의 능력과 치유의 능력을 증거하는 도구가 되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에게 이런 삶이 가능할까? 그것은 복음의 권세를 사용하는 것이다. 주님은 제자들을 사역현장으로 보내며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눅10:19). 주님은 우리에게 권세는 주셨다. 이 권세는 장신구가 아니라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것을 사용할까?

 

 

첫째, 기도하라(1). “기도 시간에........성전에 올라갈새.”

본문은 베드로와 요한이 영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었던 이유를 간단하면서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들은 유대인의 기도 시간에 맞춰 매일 성전으로 올라갔다(1). 이는 그들이 매일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는 삶을 살았다는 뜻이다. 신자의 영향력이란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받아서 행사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베드로와 요한처럼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은총을 구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기도의 삶이다. 기도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고, 그 은총을 구하는 방법이다. 아니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은총을 구하는 사람은 자연히 기도의 무릎을 꿇게 되는 것이다. 특히 야고보서를 보면 치유와 관련하여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5:14~16).

 

한 명의 신자가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악한 세력들은 발버둥치기 시작한다. 더 나아가 두 세 사람이 기도의 사슬을 만들어 합심기도하면 사탄의 세력은 주저 않게 된다. 만약 온 공동체가 인내하면서 계속해서 전심으로 기도한다면 사탄의 진지는 파괴되고, 가정과 교회, 지역사회, 나아가 민족과 세계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부흥과 변화, 회복의 역사가 나타나게 될 것이다. 주님은 오늘도 주님 한분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기도의 사람을 찾고 계신다. 이 부르심에 즐거이 응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란다.

 

 

둘째, 동역하라(1,4).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영적 사역에서 중요한 원리 중 하나가 영적 동반자를 갖는 것이다. 일찍이 주님께서도 제자들을 사역 현장으로 보내실 때 혼자가 아니라 둘씩 짝을 지어 보내셨다(막6:7, 눅10:1). 이는 예수님 당시부터 지금까지 계속되어 온 사역의 모델이자 교회의 존재방식이다. 사역에서 함께 기도하고, 함께 은혜를 나누고, 함께 섬기고, 고난도 함께 당하는 영적 동반자가 필요하다. 앞에서 인용한 야고보서에도 치유를 위해 기도하되 ‘함께’ 기도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즉 교회 장로들을 ‘청’하여 기도하고, ‘위하여’ 기도하라. ‘서로’ 기도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이는 동역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강조한 말씀이다. 본문을 비롯하여 상당한 기간 동안 베드로와 요한이 함께 동역하는 모습이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고,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역자들이 동역했음을 알 수가 있다.

 

동역은 혼자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풀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거기다 서로의 불완전함을 채울 수가 있다. 무엇보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동역을 명령하고 있다. 복음의 능력은 함께 동역하는 가운데 나타난다. 신자의 삶은 동역의 삶이다. 하나님 앞에 크게 쓰임 받은 사람들의 특징 동역을 잘하는 사람이다.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18:19)고 하셨다. 기도도 합심기도가 강력하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4:12). 좋은 신앙의 동지들을 많이 만나 아름다운 동역을 이끌어내기 바란다.

 

 

셋째, 선포하라(6).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걸어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모든 믿는 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이다. 그런데 이 선물에는 능력과 권세가 있다. 특히 예수님은 세상을 치유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다(사53:5). 그러므로 주님의 이름을 의지하고 그 이름으로 선포하면 사단의 권세, 죄악의 권세가 사라지고, 영/육간의 모든 질병으로부터 나음을 받게 된다. 치유의 능력을 경험할 수가 있다. 본문을 보라. 베드로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걸으라.”고 선포했더니 걷기는커녕 평생 스스로 일어서지도 못한 이 사람이 벌떡 일어나서 성전으로 들어가 걷기도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다(7,8).

 

복음의 역사, 치유의 능력은 믿음의 크기에 있지 않다. 믿음의 사용에 있다.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 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17:6). 겨자씨처럼 작은 믿음이라도 사용할 때 큰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성경에 믿음의 선포와 관련된 말씀과 사례들이 많이 나온다. 특히 예수님의 사역에서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난 것이 이 ‘선포’다(마8:3, 13, 26, 32, 9:29, 막5:41, 요11:43 등).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내게 주신 믿음의 권세를 사용하여 선포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향하여, 우리 자녀들과 가족을 향하여, 교회를 향하여, 세상을 향하여 선포해야 한다. 평안을 선포하고, 축복을 선포하고, 치유를 선포하고, 복음의 능력을 선포해야 한다. 주저앉은 사람을 볼 때, 주저앉아 있는 상황을 볼 때마다 선포해야 한다.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걸어라.” 다같이 우리 자신을 향하여 이렇게 믿음으로 선포해 보자.

 

▶ 나는 하나님의 보배로운 자녀다.

▶ 나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잘 될 것이다.

▶ 나는 어둠의 권세에게 무너지지 않는다.

▶ 나의 평안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

▶ 나에게 있는 00질병이 치료되었다.

▶ 우리 교회는 부흥한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이웃에게 기쁨이 된다.

▶ 나는 주변을 아름답게,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 것이다.

 

 

주변을 아름답게, 사람들을 행복하게

1540년 종교개혁자 루터(M. Luther)의 친한 벗, 프리드리히 미코니우스(F. Mikonius)가 중병에 걸렸다. 어느 날 저녁, 그는 떨리는 손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루터에게 작별의 편지를 썼다. 루터는 그 편지를 받고 즉시 다음과 같은 회답을 써 보냈다.

 

‘나는 교회를 개혁하는 일에 있어서 아직도 자네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자네가 살 것을 명령한다. 주님은 내가 사는 동안 자네의 죽음을 듣게 하지 않으시고, 자네를 나보다 더 오래 살게 하실 것이다. 나는 이것을 위해 기도한다. 이것은 나의 뜻이고, 이 뜻이 이루어 질 것을 빈다. 왜냐하면 나는 다만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기만을 구하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치유를 선포하는 루터의 이 편지를 받고 말할 힘도 없던 미코니우스는 회복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루터보다 두 달을 더 살았다.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우정인가? 그리고 우리 신자의 선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음의 권세를 기도로, 동역으로, 선포로 잘 사용하여 베드로와 요한처럼 복음으로 주변을 아름답게, 만나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이 되자. 그리고 지체부자유자처럼 복음으로 치유받아 스스로 걷기도 뛰기도 하며, 성전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의 능력과 치유의 능력을 증거하는 도구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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