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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야 할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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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458회 작성일 09-09-13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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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야 할 복음

딤후4:1~2

 

2009. 9/13 11:00

종을 치는 사람

스위스의 알프스 산에 한 오두막이 있다고 한다. 일명 ‘종치는 집’이라고 불리는데, 아들을 잃은 한 어머니의 정성으로 만들어진 집이라고 한다. 이 깊은 골짜기에 겨울이면 눈이 많이 내려서 등산객들이 길을 잃어 자칫 생명까지 잃기가 쉽다고 한다. 그래서 눈보라가 치는 날이면 누구든지 이 집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종을 치기 시작한다. 혹시 눈보라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이 종소리를 듣고 구조를 받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 세상에서 교회의 존재가 이와 같다. 죄로 인하여 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을 향해 종치는 집이 교회다. 그래서 그들을 구조하고, 그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는 곳이 교회다. 아울러 이런 세상을 향해, 그리고 세상 사람들을 향해 구원의 종을 울리는 사람이 신자이다.

 

지난 주일(6) 아침에 일어난 일이다. 북한이 예고도 없이 황강댐을 방류한 바람에 임진강 가에 있던 낚시꾼들과 야영객들이 갑자기 불어난 물에 휩쓸려 소중한 생명을 잃고 말았다. 예고도 없이 댐을 방류한 북한도 문제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런 비상시를 대비해서 만들어놓은 임진강수자원공사의 홍수경보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은 것이다. 경보시스템만 작동했어도 이런 인명피해를 막을 수 있었는데 말이다. 저는 이 울리지 않은 경보시스템에 대한 기사를 접하면서 교회와 신자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교회와 신자는 세상과 세상 사람들을 향해 위험경보를 알리는 종과 같은 존재이다. 그래서 저들의 생명을 구원하는 것이 사명인데, 그 사명을 잘 하고 있는가?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독일 작가 카프카(F. Kafka)는 ‘자신의 사명을 회피하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했다. 오늘날 카프카의 이 말로부터 자유로운 교회와 신자가 몇이나 될까?

 

 

본문은 전도의 심각성과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말씀이다. 이는 사도바울이 로마감옥에 갇혀 자신의 임박한 죽음 앞에서 믿음의 아들이요, 동역자인 디모데에게 준 전도에 대한 교훈이자 명령이다. 여기에 전도자로서 그의 태도와 열정이 잘 나타나 있다.

 

 

1. 엄히 명하노니. -전도는 준엄한 명령이다

이 부분을 보면서 참 바울답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원래 바울의 표현은 긴 수사보다는 간단하고 명료한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여기선 수식을 길게 늘어놓고 있다. 전도의 명령을 4중으로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 앞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이렇게 장엄하고 엄숙한 분위기로 전도를 명한 것은 전도가 주님의 준엄한 명령임과 전도의 심각성, 그리고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전도는 우리가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뜻이다. 전도가 명령임을 말씀하고 있는 곳은 여기뿐이 아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8-20).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전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마28:18)의 지상명령(至上命令)이요, 유언이다. 전도가 주님의 뜻이고, 가장 큰 관심이라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은 전도를 위해 이 땅에 오셨다(막1:38). 그래서 동네에 가셔서 전도하셨고(마11:1), 여러 회당(눅4:44), 빈 들(눅9:10~), 바닷가(눅5:1~), 산 위에서도(마5:1~), 심지어는 유대인들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사마리아(요4:4~)에까지 가셔서 전도하셨다. 사람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나 전도하셨다. 또한 전도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사도들도 성령을 받은 후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않았다(행5:42). 그러므로 전도는 주님께서 몸소 실천하셨고, 또한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부탁하시고 명령하신 일이다. 여기서 전도가 명령이라 함은 전도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뜻이고, 신자라면 누구든지 반드시 해야 할 일, 곧 ‘사명’이란 말과 같은 의미다. 전도는 우리를 향한 주님의 명령으로 우리가 순종해야 할 거룩한 사명이다. 따라서 전도는 복음을 통하여 구원받은 신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최고의 사역이고, 복의 통로다.

 

신학자 에밀 브루너(E. Brunner)는 ‘전도하지 않는 교회는 죽은 교회다. 살아 움직이는 교회는 전도하는 교회다.’ ‘불은 붙어 있을 때 불이 듯이 교회는 전도할 때 교회다.’고 했다.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는 말이다. 그것은 곧 전도다. 전도는 교회의 행사나 사업이 아니라 교회의 본질이다. 시오노 나나미(鹽野七生)의 「로마인 이야기」10권에, ‘중국은 방어를 위해서 5천㎞의 만리장성을 쌓았지만, 로마는 개방을 위하여 15만㎞의 도로를 건설했다.’는 말이 나온다. 중국은 ‘성을 쌓는 나라’요, 로마는 ‘길을 닦는 나라’였다는 뜻이다. 성을 쌓는 것은 폐쇄성과 보수성을, 길을 닦는 것은 개방성과 진취성의 상징이다. 교회도 ‘성 쌓는 교회’가 있고, ‘길 닦는 교회’가 있다. 길 닦는 교회는 교회의 본질인 전도에 전념하는 교회다. 주님의 지상명령을 준행하여 교회의 본질적 사명에 충실한 교회다. 주님은 이런 교회를 사랑하시고 축복하신다. 우리 모두 주님의 이 준엄한 전도 명령에 순종하여 우리 교회가 ‘길을 닦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2. 항상 힘쓰라. -모든 기회를 선용하라.

어느 교회에 남자 집사님이 불행하게도 위암에 걸렸다. 자기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자기 아내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살아보겠다고 이 기도원, 저 기도원 찾아다니면서 안수기도 받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오. 내 생명이 얼마 남았든지 이제부터는 죽는 그 시간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쓰려고 하오. 복음을 전하다 죽으면 이것도 순교가 아니겠소? 그러니 이제 기도원가지 않고 병원에 입원해야겠소.’

 

이 이야기에 아내가 놀라면서 말렸지만 그의 결심이 확고했다. 그래서 아내도 어쩔 수 없이 그를 집에서 가까운 병원에 입원시켰다. 그는 병원에서 병실을 찾아다니며 입원해 있는 환자들에게 고통스러운 몸으로 병상 한 귀퉁이를 잡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여러분, 저는 이 근처 교회에 다니는 집사입니다. 저는 암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회복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치료를 받고 있지만 보시다시피 저는 회복의 가능성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저는 예수님을 믿기에 이 절망과 고통 속에서도 천국에 대한 소망을 품고, 이 아픔을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힘들 때 누구를 의지하십니까? 내가 믿는 예수님을 여러분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는 아픔을 참아가며 더듬더듬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환자 모두가 침상에 누워서 별 이상한 사람을 다 보겠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며칠 뒤에 또 어느 병실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고통스런 몸을 부여잡고 복음을 전했다. 그러자 그 병실에 입원해 있던 한 환자가 일어나서 그가 전하는 복음을 듣기 시작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에게 말했다.

 

‘집사님이라고 하셨죠? 이제 그만하세요. 내가 예수님 믿겠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는 사람들은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처럼 내가 예수를 믿지만 암으로 고통당하고 있다며 정직하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처음입니다. 그렇게 정직하게 전하는 예수라면 내가 믿겠습니다.'

 

이 집사님을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 얼마나 주님께 칭찬을 받을까? 마지막 순간까지도 복음전도에 헌신한 이 모습이 너무나 감동적이다. 바울 사도의 전도 권면을 성실하게 실천한 모델이다. 바울은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너는 항상 힘쓰라.”(2)고 하였다. 모든 기회를 복음전도에 선용하라는 말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어디에 있든지, 어떤 상황에 있든지, 그리고 누구를 만나든지 전도의 기회로 삼으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복음전도에 ‘열정’을 쏟으라는 뜻이다. 이는 바울이 믿음의 아들이요, 동역자인 디모데에게 당부하는 것이지만 사실은 바울 자신의 고백이다. 지금까지 복음전도에 대한 자신의 삶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사도행전(행13:~21:)에 나온 그의 전도여행기를 보면 그가 전도에 얼마나 열정을 쏟았는가를 알 수가 있다. 그는 복음전도에 목숨을 걸었다. 스스로 모든 권리를 다 포기하고, 무자비한 핍박을 받으면서도 전도를 계속했다. 어느 곳,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복음을 전했다. 특히 손과 발이 사슬에 묶인 채 유대 왕 아그립바와 총독 베스도 앞에서 복음 전하는 바울의 모습(행26:)은 감동 그 자체이다. 여기서 바울은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29)고 외치며 설교를 마쳤다.

 

그러면 이런 열정은 어디서 나오는가? 나를 구원하신 주님에 대한 사랑과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뜨거운 관심에서 비롯된다. 말썽꾸러기 청개구리도 뒤늦게 후회하고 어머니의 유언을 받들었는데, 그래서 지금도 비만 오면 어머니 무덤이 떠내려갈까 걱정되어 운다는데, 우리가 정말 주님을 뜨겁게 사랑한다면 주님의 유언인 전도를 쉴 수가 없는 일이다(그런데 실제는 그렇지를 못하여 청개구리만도 못한 신자가 되고 만 것이 문제다.). 또한 죽어가는 영혼을 생각하고, 그 영혼에 관심을 가지면 전도를 게을리 할 수가 없다. 물에 빠진 부모나 형제, 이웃을 보고 아무렇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무슨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구하려고 할 것이다. 우리가 전도를 쉬는 것은 우리에게 영혼에 대한 이런 안타까움과 사랑하는 마음, 구원에 대한 긴박성이 없기 때문이다. 정말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알고, 영혼구원의 긴박성을 알아 전도에 더욱 힘쓰기를 바란다.

 

 

전도는 생명의 나눔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믿는 사람들까지도 전도에 대한 거부반응을 보인 사람이 많다. 이는 전도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그 동안 교회나 신자들이 전도를 왜곡한 면도 없지는 않다. 전도를 단순한 특정 종교, 혹은 교회의 확장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이 전도의 본질이라면 전도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이런 부정적인 견해에도 불구하고 전도를 해야 할 이유는 전도는 ‘복음의 나눔’이고, 복음의 나눔은 ‘생명의 나눔’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일곱 번에 거쳐 말씀드렸던 ‘믿어야 할 복음’이 바로 이 내용이다. 그 동안 제가 이 점을 여러 주제로 오랜 시간 말씀드렸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님이 왜 우리에게 전도를 지상명령으로 주셨고, 우리가 왜 전도를 사명으로 알고 힘써야 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전도는 최고의 나눔이다. 천하보다 귀한 생명의 나눔이 전도다. 이를 위해 이 땅에 교회가 존재하고, 신자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일에 순종하는 교회, 순종하는 신자는 주님께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되었다. 본문의 바울이 바로 그 본보기다. 바울처럼 복음전도에 헌신한 사람도 없지만 바울처럼 주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도 없고, 주님의 복을 받은 사람도 없다.

 

프랑스의 한 의사가 ‘영혼의 무게’를 알아냈다고 주장했다. 죽기 직전에 있는 환자를 섬세한 저울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그 환자가 죽는 순간 그의 몸무게가 21g 줄었다. 이것이 곧 영혼의 무게라고 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영혼의 무게가 아니라 ‘영혼의 가치’다. 영혼은 “천하보다 귀하다.”(막8:36,37). 이 세상 모두를 합친 것보다 귀한 것이 영혼이다. 전도의 관심은 바로 이 영혼에 있다. 영혼을 사랑하고 구원하는 것이 전도이다. 그래서 성경은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단12:3)고 말씀하셨다. 이는 전도자에게 보장하신 주님의 축복의 말씀이다. 전도를 통해 주님의 복을 받은 바울처럼 우리 역시 전도의 사명을 힘써 지켜서 영원토록 빛나는 복된 삶을 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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