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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팔단(眞福八端)Ⅷ, ‘의를 위한 박해’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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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397회 작성일 11-07-17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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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팔단(眞福八端)Ⅷ, ‘의를 위한 박해’①

마5:1~12

2011. 7/17  11:00(신앙수련회, 구례사랑교회)

인생은 바이올린 현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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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ml:namespace prefix = w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word" />사람의 눈은 흰자위와 검은자위로 되어 있다. 그런데 사물을 보는 것은 흰자위가 아니라 검은자위다. 하나님은 사람의 눈을 왜 이렇게 만드셨을까? 왜 흰 부분이 아닌 검은 부분으로 세상을 보게 하셨을까? 이에 대해 탈무드는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너의 인생이 어두울지라도, 너의 현실이 눈동자처럼 캄캄할지라도 결코 낙심하거나 좌절하지마라. 오히려 그 어두움을 통해서 밝은 미래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의 어두움을 뚫고 나아갈 수 있는 희망과 용기를 주시기 위함이라는 뜻이다. 빛의 가치는 어두움 속에서 드러난다. 어두움을 모르면 밝음의 중요성을 모른다. 병이 들어봐야 건강의 가치와 중요성을 알고, 배가 고파봐야 음식의 고마움을 알고, 집을 떠나봐야 가정과 가족의 소중함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우리 인생을 ‘바이올린 현’(絃)에 비유했다. 줄(絃)이 느슨해지면 고은 소리를 낼 수 없다. 줄을 팽팽하게 조여야 아름다운 소리를 내게 된다. 인생의 아름다움이나 감격, 감동도 밋밋한 편안함에 있지 않고, 고난과 고통 속에, 시련의 아픔과 상처 속에서 아름다운 인생의 선율을 만들어낸다. 흰자위가 아닌 검은자위로 세상을 보듯이 말이다.

 

맹장수술과 출산

어느 목사님이 맹장수술을 받은 여 집사님의 병원심방을 갔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목사님이 집사님에게 ‘아이 낳은 것이 더 아픕니까?’ ‘맹장수술이 더 아픕니까?’라고 물었다. 어느 것이 더 아플까? 이것은 말도 안되는 질문이다. 어떻게 맹장수술을 산고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 집사님의 대답은 의외였다. ‘목사님, 제 생각에는 맹장수술이 더 아픈 것 같습니다. 맹장수술은 의미 없는 고통이지만, 해산의 고통은 새로운 생명을 낳는 의미 있는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더 아프냐 하는 것은 불필요한 논쟁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고통은 다 같은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의미’이고,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고통을 당하느냐에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한 의미 없는 고난은 없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땅에 떨어진다(마10:29)고 했다. 단지 우리가 깨닫지 못해서 그렇지 모든 고난에는 그 나름의 뜻이 있고, 의미가 있다. 그래서 고난을 당할 때 이상한 일 당한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도리어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강조한 것이다(벧전4:12,13). 하지만 맹장수수로 인한 고통과 출산으로 인한 고통의 의미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 의미 없는 고난은 없으나 그 차이는 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누려고 하는 여덟 번째 지복(至福)은 가장 의미 있고, 영광스러운 고난에 대한 말씀이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다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그렇다면 영/육간에 소중한 의미로 작용하는 영광스러운 고난은 어떤 것일까? 여덟 번째 지복인 ‘의를 위한 고난’이다. 그리고 의를 위한 고난은 곧 ‘주님을 위한 고난’이다.

 

한자로 옳을 ‘의’(義) 자를 보면, 의로운 삶이 무엇인가를 알 수가 있다. ‘義’ 자는 ‘나’(我) 위에 ‘양’(羊)을 올려놓은 모양이다. 세례요한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1:29)이라고 소개했다. 내 위에 어린 양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것. 이것이 올바른 삶, 의로운 삶, 선한 삶이다. 그리고 이 예수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고, 박해를 당하는 것이 의를 위한 고난이다. 그러면 주님을 위한 고난이란 무엇일까?

 

1. 주님을 믿는 것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다.

이는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우리에게는 매우 낯설게 느껴지는 말이다. 주님을 믿는다고 고난당할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곳에서 주님을 믿는 것은 고난과 박해를 각오해야 하는 일이다. 심지어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곳도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슬람권에서는 주님을 믿으려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지금 네팔이란 나라에서 ‘세례’는 곧 ‘투옥’을 의미하고, 과거 소련이나 동구권 국가들에서도 세례는 ‘사망진단서에 사인하는 것’과 같았다. 불과 100여 년 전 우리나라에서도 그랬다. 요즈음 사람들은 주님을 믿고 세례를 받는 것에 그다지 감격이 없는데, 당시에는 순교를 각오하는 일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선교사에 의해 최초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노도사(盧道士)라 불리는 ‘노춘경’(盧春京)이라는 사람이다. 그는 의료 선교사 알렌(H. N. Allen)의 어학선생으로 기독교를 반박하는 문서를 통해 기독교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되었고, 한문성경을 통해 복음을 알고 믿게 되었다. 그는 1886년 7년 18일 주일에 언더우드(H. G. Underwood)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지금으로부터 125년 전이다. 언더우드는 각종 세례문답으로 엄격하게 시험하였고, 그는 모든 질문에 대해 매우 분명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언더우드는 마지막으로 국법이 아직도 신앙을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과, 믿기로 했다가 다시 돌아서면 안된다는 사실을 주지시켰다. 이에 노춘경은 그것들이 자신에게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고, 만약의 경우 목숨까지도 버릴 준비가 되었다고 대답했다.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세례는 이렇게 베풀어졌다. 이는 노춘경 뿐만 아니고 이후에도 비밀세례가 계속되었는데, 세례를 받는 모든 사람들이 이런 서약을 했다. 주님을 믿는 것 때문에 온갖 고난과 박해, 심지어는 목숨까지 내놓은 것이다. 이런 의로운 고난이 있어 오늘의 한국교회가 있고, 우리가 이렇게 평안한 가운데 주님을 믿을 수 있는 복을 누리게 된 것이다.

 

최소한 현재 우리나라에서 주님을 믿는 것 때문에 외적인 고난이나 박해는 없다(물론 개인적인 사정은 예외다). 그렇다고 내적인 문제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어쩌면 더 교묘하고 지능적이고 설득력 있게 우리를 괴롭힐 수 있다. 때로는 문화라는 이름으로, 관습이나 가치관으로, 다양한 이데올로기로 공격해 오고 있다. 여기에 타협이나 편승하지 않고 과감히 맞서는 믿음이 필요하다. 이로 인하여 당하는 불이익이나 부당한 대우가 주님을 위한 의로운 고난이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편리함과 편안함을 추구하다보니 신자도 교회도 세속화의 물결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주님을 믿는 것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새겨볼 수 있기를 바란다.

 

2. 주님의 복음을 위한 고난이다.

주님을 믿는 것은 엄청난 특권이다. 비참한 죄인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특권에는 책임도 따른다. 특권이 클수록 책임 또한 막중하다. 우리 신자의 책임은 복음전파다(행1:8). 내가 믿게 된 이 주님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 일이 또한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이다. 그래서 초대교회시절부터 증인이란 말과 순교자란 말이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영어로 ‘순교자’(martyr)란 말은 헬라어 ‘증인’(μαρτυϛ)이란 말과 어원이 같다. 이런 사실을 우리는 성경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 사도행전을 보면 스데반(기독교회 첫 순교자)과 야고보(제자들 중 첫 순교자)는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당했고, 베드로와 요한을 비롯한 사도 바울, 초대 일곱 집사 등 수많은 사람들의 박해당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복음이 우리에게 전파되기까지 복음전파의 역사는 피흘림의 역사였다.

 

3대를 이어서 온 가족이 주님의 복음을 위해 헌신했던, 특히 우리나라의 복음화를 위해 희생했던 사람들이 있다. 셔우드 홀(S. Hall) 선교사 가정이다. 「닥터 홀의 조선회상」이라는 책도 나와 있다. 양화진에 이들 가족이 함께 묻혀있는데, 아버지 윌리암(W. J. Hall), 어머니 로제타(R. S. Hall), 그의 묘비가 있고, 그 옆에는 아들 프랭크(F. S, Hall), 아내 마리안(M. B. Hall), 그리고 여동생 에디스(E. M. Hall)가 있다. 이 땅에 와서 복음을 전하다 3대가 그 곳에 묻혔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의료선교사였다. 어느 날 아버지 윌리엄 선교사에게 화상으로 손가락이 붙은 소녀가 찾아왔다. 붙은 손가락을 떼어내는 수술을 하던 중에 피부가 모자라자 그는 자기의 피부를 떼어내 그 상처에 붙여서 치료해주었다. 이를 본 사람들이 ‘자기 껍질을 벗겨 병자를 치료해준 귀한 분’이라고 그를 칭찬했다. 그래서 고쳐진 손을 보는 사람마다 주님의 사랑을 보게 되고 깨닫게 되어 주님 앞에 돌아왔다.

 

셔우드가 태어난 다음 해에 청일전쟁(1894~1895)이 일어났다. 일본과 청나라의 전쟁이었으나 피해를 입은 것은 우리나라였다. 전쟁으로 인하여 많은 부상자들이 생기고, 전염병이 창궐했다. 그러자 미국선교본부는 위험하다며 모든 선교사들에게 귀국을 명했다. 하지만 그는 돌아가지 않고 혼신의 노력을 다하여 병자들을 돌보다가 과로와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세상을 떠났다(1894.11). 죽기 전에 그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평양에 갔었던 것을 원망하지 마시오. 나는 주님의 뜻을 따른 것이오. 나는 주님의 은혜를 받았소.’ 우리나라에 온 지 2년 만에 일어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렇게 남편을 먼저 보낸 그의 어머니 로제타 선교사에게는 두 살 된 아들(셔우드 자신)과 뱃속에 일곱 달 된 아이가 있었다. 그녀가 출산을 위해 미국으로 갔더니 교우들이 남편의 죽음을 애도하며 많은 조의금을 주었다. 그녀는 그것을 모아 우리나라에 보내서 평양에 기념병원을 세웠다. 그리고 딸을 낳고, 자신이 선교사로 파송 받은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던 중에 ‘사랑하는 딸아, 네 남편이 이루지 못한 조선 사랑을 네가 이루어라.’는 성령의 음성을 다시 듣게 된다. 그래서 그녀는 어린 아들과 딸을 데리고 다시 우리나라에 들왔는데, 귀국한지 20일 만에 어린 딸이 전염병에 걸려서 또 죽었다. 딸의 시신을 함께 사역하는 목사님 등에 업혀서 양화진까지 와 남편 곁에 묻고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사랑하는 내 아들 셔우드와 이 땅에서 평생사역을 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어린 아들과 함께 평생을 섬기겠다고 기도했던 그녀는 68세가 되기까지 43년 동안 우리나라를 위해 헌신했는데, 그녀가 한 일들은 처음으로 맹인교육을 시작하였고, 현재 이대부속병원이 된 동대문부인병원, 현재 고대의대가 된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를 세웠다. 아들 셔우드 선교사 역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결핵환자를 위한 결핵요양원을 설립하고, 크리스마스 씰(Christmas seal)을 발행하여 선교활동을 하다가 일본에 의해 강제추방 당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인도로 가서 선교하면서 우리나라를 위해 기도했다. 은퇴하고 캐나다에 있을 때, 대한결핵협회와 그의 아버지가 세운 광성고등학교의 초청을 받아 91세의 나이로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그는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이 묻힌 양화진에 가서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유언했다.

 

‘저는 여전히 한국을 사랑합니다. 제가 죽거든 미국이나 캐나다에 묻지 마시고 제가 태어나 자랐던 사랑하는 이 나라, 내가 사랑하는 어머니, 아버지, 누이동생이 잠들어 있는 이 땅에 묻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는 9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고(1991.4), 그의 유언대로 부인(1991.9)과 함께 양화진에 묻혔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의 복음을 위한 한 가문의 의로운 삶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참으로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삶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부모의 큰 희생으로 내가 이 땅에 존재한 것처럼 우리가 주님을 믿고 섬길 수 있는 것 또한 이처럼 피를 흘리기까지 수고한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 바턴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우리 역시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위해서 고난과 박해를 감수해야 할 것이다. 희생을 각오하며 기회 있는 대로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나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일을 위하여 당하는 고난이 곧 의를 위한 고난이다.

 

더욱 의미 있는 고난

인생은 한 번 뿐이다. 연습도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엇이든 마음껏 즐기고 누리면서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성경은 그 끝에 주님의 심판이 있음을 기억하라(전11:9)고 경고하고 있다. 그러면 신자인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연습도 없는 한 번 뿐인 인생이 심판자이신 주님 앞에 섰을 때,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25:21,23)고 하는 칭찬을 들을 수 있는 인생이 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고난과 박해를 무릅쓰고 더욱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것이 주님을 믿는 일이고, 또한 주님의 복음을 위한 일이다. 이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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