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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5,047회 작성일 11-09-18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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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5:21~26

2011. 9/18   08:00, 11:00

타락한 종교의 특징

‘도둑이 도둑질을 하기 위해 남의 집에 들어갔다가 현관에 붙잡혔다면 절도죄로 처벌할 수 있을까?’ ‘처벌할 수 없다’는 대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법원은 아직 훔칠 물건을 찾기 이전이기 때문이라고 판결이유를 밝혔다. 일반적으로 법(률)은 행위나 결과를 중심으로 판단하기 마련이다. 마음속으로 아무리 잔인하고 나쁜 생각, 음란한 상상을 하더라도 행위로 이어지지 않으면 제재하거나 처벌할 수 없다. 아무리 의도가 분명해도 그 의도만 가지고는 범죄의 구성요건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점을 보완하는 것이 도덕이고, 종교다. 특히 종교는 행위보다는 마음에 관심을 갖는다. 결과보다는 마음의 동기, 숨은 의도를 중요하게 여긴다. 종교의 본질이 드러난 행동이 아니라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고, 보이지 않는 심오한 세계를 탐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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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타락한 종교는 그 반대의 길을 걷게 된다. 마음보다는 행동에 주목하고, 원인이나 동기, 숨은 의도보다는 결과에, 정신보다는 형식에 관심을 갖는다. 보이지 않는 것보다 보이는 것에 더 정신을 쏟는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형식에 치우치면서 외양만 꾸미게 된다. 정신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는다. 예를 들면 웅장한 성전, 사제들의 화려한 복색, 복잡한 예배의식, 신자들의 행위를 규제하는 수많은 규례가 그것이다. 예수님 당시 유대교가 그랬다. 예배의 정신이나 예배를 드리는 자의 자세보다는 예배를 드리는 장소나 횟수, 제물의 양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열심히 기도했으나 은밀히 보시는 주님과의 교제가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경건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고, 눈에 보이는 성전을 신성하게 여기며 겉치레에만 힘쓸 뿐 자기 자신이 주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임을 일지 못했다. 특히 그들은 하나님의 법인 율법을 일반 법률수준으로 끌어내렸다. 그들은 율법을 613개 조항으로 만들어서, 그것으로 사람들의 행위를 판단하고, 정죄하고, 위협하는 수단으로 사용했다. 분문에서부터 시작된 주님의 율법 재해석에서 이와 같은 유대교의 잘못된 율법관이 잘 드러나고 있다.

 

제6계명의 정신

본문은 십계명 제6계명(“살인하지 말라”)에 대한 해석이다. 당시 유대교 전통의 해석과 주님 사이의 차이를 잘 보여준다. 유대인들은 ‘살인’을 사람을 죽이는 구체적인 행위로만 제한시켰고, 그 행위의 결과로 ‘심판’이라는 내용을 첨부했다(21). 이는 율법을 일반 법률수준으로 끌어내려 해석한 것이다. 그러니 사람을 죽이지만 않으면 제6계명은 잘 지킨 것이 된다. 이 정도는 일반 법률도 말하고 있는 것이고, 종교인이 아니라도 누구든지 지키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율법의 탁월성, 신안인의 탁월성이 그 설 자리를 잃게 되고 만다. 이런 이유로 세상은 종교의 시대가 끝났다고 선언한 것이다. 사실 이것이 신앙의 법이고, 신자들의 삶이라면 맞는 주장 아닌가!

 

반면에 주님의 율법 재해석은 율법의 정신을 회복하는데 있다. 이로써 ‘율법의 완성자로 오셨다’(:17)는 당신의 말씀을 증명해 보이신 것이다. 본문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의 정신이 무엇이고, 근본취지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주님은 율법의 정신을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이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핵심)이라 하셨다(마22:37~40). 곧 사랑이 성경전체의 기본정신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모든 계명의 기본정신 또한 ‘사랑’이다. 제6계명도 마찬가지다.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은 단순히 생명을 해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은 물론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사랑하고 존중하라는 것이다.

 

1. 생명사랑, 인격존중

‘인격살인’(character assassination)이라는 말이 있다. 말로 행해지는 정신적인 가혹행위를 총칭하여 인격살인이라고 한다. 요즈음 인터넷 문화와 함께 기승을 부리고 있는 악성소문, 신상털기, 악의적이고 모욕적인 댓글 등도 여기에 속한다. 사실 신체살인만큼 인격살인도 심각하다. 인격살인은 곧 신체살인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주님은 신체적 살인은 물론 인격살인까지 금하신 것이다. 오히려 인격살인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22).

 

주님은 여기서 세 가지를 금하고 있다. 첫째는 형제에게 ‘노’(怒)하는 것이다. 주님은 형제에게 노하는 것 자체를 이미 살인으로 간주하셨다. 그것은 결과보다 마음과 마음의 동기를 중요하게 여기신 까닭이다. 살인은 사람의 손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분노는 마음의 독이고, 마음에 품은 칼이다. 특히 이 분노는 상대방을 죽이기에 앞서 자신을 먼저 죽이고 만다. 마음에 독을 품고 칼을 품으면 그 독과 칼이 누구에게 먼저 향하겠는가? 그것은 자기 자신이다. 상대방을 괴롭히는 사람의 특징은 자신이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다. 분노로 자신이 망가진 사람은 상대방도 무너뜨리게 된다. 그러므로 분노는 살인의 출발점인 동시에 마음의 살인이다.

 

둘째는 형제를 ‘멸시’하는 것이다. 여기서 ‘라가’라는 말은 ‘바보’, ‘천치’, ‘돌대가리’ 등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멸시는 상대방을 고의로 깎아내리는 것, 상대방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멸시는 분노보다 더 나쁜 악이다. 분노는 상대방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행해질 수 있으나 멸시는 상대방의 가치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행위다. 따라서 멸시는 상대방에 대한 인격살인이다. 그리고 셋째는 형제에게 ‘욕’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미련한 놈’이란 ‘하나님을 부정한 자’, ‘멸망 받을 자’란 뜻으로 ‘라가’보다 더 적극적인 악한 태도다. 저주를 담은 심한 욕설이다. 상대방에 대한 분노, 멸시는 심한 욕설로 이어지게 된다. 욕은 말로서 상대방의 인격을 무너뜨리고, 상대방의 마음에 칼을 꽂는 것과 같다. 몸의 상처보다 말로 입는 마음의 상처가 더 오래가는 법이다. 욕은 언어폭력이고, 말로 하는 살인이다.

 

주님의 이 말씀에서 살인의 메커니즘(구조)을 발견할 수 있다. ‘분노→멸시→욕설→살인’이다. 그렇지만 욕도 살인이고, 멸시도 살인이고, 분노도 살인이다. 따라서 살인이란 상대방의 인격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없는 모든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형제에 대한 일체의 분노, 멸시, 욕설을 금하신 것이다. 분노와 멸시, 욕설은 상대방에 대한 사랑과 존중하는 마음이 없기에 나타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6계명은 단순히 형제의 목숨을 해치지 않는 소극적인 태도를 넘어서 적극적으로 형제를 사랑하고 그 인격을 존중하라는 말씀이다.

 

2. 화목한 생활

그러나 우리가 살인을 하지 않기 위해서 욕하지 않고, 멸시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나와 다른 사람과의 잘못된 모든 원한관계를 청산해야 된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품는 분노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에게 대해 품고 있을 분노도 없애야 한다. 살인하지 말라는 것은 살인이 일어날, 욕설과 멸시와 분노가 일어날 씨앗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그것은 잘못된 관계를 적극적으로 바로 잡는 것이다. 적대감을 해소하는 것이다. 미움의 관계에 있는 사람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다. 화해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23).

 

주님은 여기서 형제와의 관계개선, 이웃과의 관계개선이 예배라고 하는 종교적인 행위보다 우선해야할 시급한 문제라고 말씀하고 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예배다. 그런데 그 예배에 선행되어야할 것이 형제와의 화해라는 것이다. 물론 예배가 화해의 중요한 열쇠이다. 예배를 통해서 모든 불편한 관계들이 개선되고 회복된다. 막힌 것이 뚫리고, 끊긴 것이 다시 이어진다. 병든 것이 치료되고, 깨지고 무너진 것이 회복된다. 무엇보다도 주님과의 화해가 형제와의 화해를 결정하는데, 주님과의 화해를 회복하는 시간이 예배이다. 주님이 이것을 모르실 리가 없다. 그런데도 주님은 여기서 화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의 선행조건이라고 하셨다. 이는 화해의 ①중요성과 ②시급성을 강조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화해의 방법으로 “먼저 가서”(24), “급히”(25), 그리고 “남김없이”(26)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다. 형제를 향한 분노와 멸시, 욕설을 ‘남김없이’ 버리고, 내가 ‘먼저 가서’ 그리고 ‘급히’ 화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화해가 없으면 서로 노하고, 서로 멸시하고, 서로 욕하는 살벌한 세상이 될 수밖에 없다(창4:). 불화의 현장, 갈등의 장소에 가보라! 분노, 멸시, 욕설만 난무하는 그야말로 인격살인이 자행되고 있음을 확인할 것이다. 그러나 서로 화해해서 화목하면 분노도, 멸시도, 욕설도 사라진 서로 사랑하며 존중하게 되는 그런 생활, 관계, 공동체를 만들게 된다. 이것이 제6계명의 정신이고, 취지이다.

 

sorry works movement(사과하기 운동)

‘사과하기 운동’(Sorry works movement)은 미국 켄터키주 렉싱턴에 있는 재향군인병원에서 2001년부터 시작된 프로그램이다. 의료과실이 생겼을 때 환자나 보호자가 알기 전에 먼저 병원측에서 이를 공개하고 사과하는 운동이다. 그 결과 환자의 만족도가 크게 증가했음은 물론 의료사고 건당 배상액도 1/6로 줄어들었고, 의료소송이나 분쟁제기도 절반이하로 줄었다. 소송기간도 20.7개월에서 9.5개월로 떨어졌다. 병원이 얻은 더욱 큰 소득은 정보를 모두 공개한 후 의료진의 잘못이 발견되지 않으면, 환자측이 이를 인정하는 문화가 형성됐다는 점이다. 현재 이 프로그램은 하버드, 스탠퍼드, 일리노이대 등 미국 주요 대학병원에서 운영되고 있다. 의료소송 변호사들에 따르면, 의사가 인간적이거나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뉘우치면 대부분의 환자들은 소송을 걸지 않는다고 한다. 건방지고 환자에게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의사가 주로 소송에 휘말린다는 것이다.

 

이런 이치가 어디 의료분쟁뿐이겠는가? 사람은 갈등공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부부갈등, 직장에서의 다툼, 교회나 정치사회 전반에서 끊임없이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 문제는 잘못을 해도 인정하지 않다보니 갈등이 증폭되고 폭발하는 것이다. 이는 사과하는 것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사과는 오랜 기간 ‘패자’들의 언어로 취급되어 푸대접을 받아왔다. 하지만 사과는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강력한 갈등조정도구이다. 시끄러운 세상사, 시끄러운 인간사를 잠재우는 최선의 방법은 ‘먼저 사과’하는 일에 있다. 주님 말씀처럼 “먼저 가서”, “급히, 그리고 남김없이” 사화할 때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는 화목의 삶이 가능해 진다. 용서가 필요없을 만큼 완벽한 사람은 없다. 인간은 피차 용서받고 용서하며 살아야 한다.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먼저 가서’ 사과하고 ‘급히’ 화해해서 모두가 사랑하고 존중받는 건강하고 행복한 공동체를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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