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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하고 간략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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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3,271회 작성일 11-10-02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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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하고 간략하게

마5:33~37

2011. 10/2   08:00, 11:00

정직하면 손해 본다?

정치인들을 태운 버스가 시골길을 가다가 길가의 가로수를 들이 받고 전복되었다. 버스는 한 논에 처박혔는데, 논의 주인이 사고가 난 버스에 달려가서 살아 있는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고는 사람들을 전부 매장해 주었다. 며칠 후, 경찰서에서 조사관이 나와서 이 농부에게 정말 생존자가 아무도 없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농부가 대답했다.

 

‘뭐, 몇 사람은 자기가 안죽었다고 말을 하긴 했는데, 어떻게 정치인의 말을 믿을 수가 있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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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에 대한 불신을 풍자한 이야기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신뢰를 받지 못한 집단이 정치인인 것 같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게 지역살림을 맡기고, 나라살림을 맡긴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결국은 똑같은 사람들이란 뜻이 아닌가? (물론 정치가 사람을 정직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의미도 있지만)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을 뽑아서 그들에게 지역살림, 나라살림을 맡긴 것이다. 30년간 거짓말을 연구한 거짓말 심리 관련 최고의 권위자 로버트 펠트만(R. Feldman)은 ‘사람은 10분에 세 번 거짓말을 한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속이는 사람이 항상 유리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거짓이 사라지지 않고 더욱 지능화되고 발전하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정직하면 손해 본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어느 대학교수가 삼만 명을 대상으로 표본조사를 했다. 조사 대상자 73%이상이 ‘한국에서는 정직해선 살 수가 없다.’고 대답했다. 정직하게 세금내고, 정직하게 시험보고, 정직하게 장사하고, 정직하게 사업하면 정직한 사람만 손해를 본다고 생각한 것이다. 틀린 말이 아니다. 정직하고 진실하면 손해 본다. 실재로 현실에서 악인은 일평생 평안한 삶, 부요하고 풍요로운 삶, 거만한 태도로 권력을 누리고, 자녀들도 형통한데, 반면에 깨끗하고 정직하게 사는 의인들에게는 계속해서 시련이 끊이지 않는다(시73:1~). 이런 현실 때문에 욥을 비롯한 성경에 나온 많은 의인들이 고통과 고민을 한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인 승리는 ‘정직’이고, ‘진실’이다.

 

맹세하지 말라.

본문은 맹세에 대한 교훈으로 십계명 제3계명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에 대한 주님의 해석이다. 맹세는 히브리어로 신성한 숫자 ‘7’과 같은 단어인 ‘쉐바’(עבש)이다. 이는 맹세 그 자체가 신성하다기보다는 맹세를 할 때 그 증인되시는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서약이나 선서를 할 때 한 손을 들고 하는 것처럼 맹세할 때도 두 손을 하늘을 향해 뻗어 올렸다. 하나님께서 증인이 되어주심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맹세는 하나님과 깊은 관련이 있기에 맹세하고 지키지 못하거나 고의로 깨뜨리는 것, 또한 거짓맹세는 모두가 제3계명을 범하는 죄가 된다. 그래서 탈무드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우상 숭배자와 같다.’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맹세의 구속력을 벗어나기 위해서 이 계명을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임의로 해석하였다. 한마디로 교묘한 핑계거리를 만든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않은 것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하늘이나 땅, 예루살렘을 걸고 맹세했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말을 믿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제외한 여러 가지를 걸고 맹세했지만 정작 그것을 지켜야 할 때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않았다며 지키지 않았다. 주님은 이와 같은 맹세에 대한 유대인들의 잘못된 해석과 태도를 두고 본문의 말씀을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제외하고 하늘과 땅과 예루살렘과 머리카락에 걸고 맹세했을지라도 이것들 역시 모두가 하나님의 것이므로 무엇을 걸고 맹세했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 것과 같다고 하셨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34~36).

 

정직하고 진실하게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제외한 다른 것들을 걸고 한 맹세는 처음부터 지킬 마음이 없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을 과정하거나 위장하려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당시 율법을 사랑하고 헌신한다던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모습이었다. 이것이 소위 그들의 ‘의’였다. 이런 의로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20). 그러니 지킬 마음도 없으면서 다른 사람을 속이기 위해 자신을 과장하거나 위장하는 맹세의 행위를 그치라는 것이다. 주님께서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34)고 하신 것이 바로 이런 의미다. 원래 맹세는 자신의 결연한 의지를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고백적인 표시인데, 자신을 과장하거나 위장하는 수단으로 전락시킨 것이다. 때문에 주님은 맹세라는 형식대신 삶으로 증명해 보이라는 것이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37).

 

어떤 정신분석학자에 따르면, 거창한 권위를 내세워 진실을 말한다고 맹세하는 사람은 십중팔구 거짓말을 한다고 했다. 하나님이니 천지신명이니 손에 장을 지지겠다는 식으로 맹세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겠다고 작정을 한 것이라는 뜻이다. 정말 ‘든’ 사람, 정말 ‘난’ 사람, 정말 ‘된’ 사람은 과장이나 위장으로 자신을 꾸미지 않고 허세를 부리지도 않는다, 그저 물처럼 담담하게 일을 뿐이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은 응당히 맹세보다도 더 신임할 수 있는 인격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 신자의 생활과 성품은 맹세가 필요 없는 인격과 삶이어야 한다. 정직과 진실은 신자의 브랜드(brand)가 되어야 한다. 말이 그대로 보증수표처럼 되어야 한다. 그러면 맹세할 필요가 없어지게 된다.

 

무신불입(無信不立)이란 말이 있다. 신뢰가 없으면 서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는 개인이든 공동체든 신뢰가 깨지면 무너진다. 관계의 기초는 신뢰이기 때문이다. 창세기에 나온 소돔과 고모라(19:)가 좋은 예다. 소돔이란 말이 동성애(sodomy)를 뜻하는 단어가 될 만큼 그곳은 성적으로 타락한 곳이었다. 그런데 창세기 본문을 보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유가 성적 타락만이 아니었다. ‘불신’도 중요한 이유였다. 롯이 그의 예비사위들에게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전했으나 그들이 이를 농담으로 여겼다(19:14). 마치 에피소드처럼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지만 이것은 당시 소돔과 고모라 지역에서 롯의 영향력과 그 땅 사람들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롯은 신뢰를 상실한 신자의 상징이고, 그의 사위들은 불신으로 가득 찬 세상의 상징이다. 평소 롯이 주변 사람들, 특히 그의 사위들에게 보여준 그의 말과 삶이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다. 한 마디로 신뢰를 주지 못했다. 말과 행실에 진실과 정직이 결여되어 믿음을 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의 사위들 또한 불신 때문에 눈이 멀고 귀가 막혀서 진리를 외쳐도 깨달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진실을 말해도 그 진실을 외면한 곳이라면 이미 끝장이 난 것이다.

 

어느 인디언이 소위 문명인의 삶을 이렇게 평했다. ‘문명인은 뭐든지 글로 기록하려든다. 그래서 항상 종이를 가지고 다닌다. 그들이 오래 기억하기 위해서 그러는 것도 아니다. 도서관에 가보면 책들이 많지만 누가 그 책을 다 읽는단 말인가? 우리는 종이가 필요없다. 진실이 담긴 말은 그의 가슴에 깊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영원히 기억된다. 인디언은 결코 그것을 잊어버리는 일이 없다. 그러나 문명인은 기록해놓은 종이를 잃어버리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 문명의 발전과 진실, 어느 것이 더 값진 것인가? 우리의 삶은 이 둘 사이에서의 선택을 요구한다. 부흥과 진실, 이익과 진실, 명예와 진실.......우리 사회의 부패지수는 10점 만점에 5.1점이다. 부패지수순위는 39위다(경제순위 12위에 비하면 턱없이 낮은 수치다). 이는 진실이 아닌 발전을 택한 까닭이다. 교회 역시 정직과 진실보다는 부흥을 택하다보니 교회의 부흥은 이루었으나 요즈음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도가니’의 주범으로 지탄을 받는 것이다. 건강한 삶은 이 둘 사이에서의 올바른 선택에 있다. 발전이나 부흥이 지체되더라도 진실을 택하고, 불이익을 당하고 불명예를 당하더라도 진실을 택할 수 있는 용기를 갖기 바란다.

 

나토(NATO)족

‘나토족’이란 말이 있다. 이는 ‘No Action Talking Only’의 약자로 ‘말만 앞서고 행동하지 않는 사람’을 두고 한 말이다. 교회는 말은 많은데 실천이 부족한 곳이다. 그 단적인 예가 ‘구호’문구다. 구호는 군사문화의 잔재인데, 그것이 교회에서 만연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현상이다. 요즈음 교회마다 자극적인 구호들이 물결을 이룬다. 결국 이것은 현재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음을 반증한 것이다. 좋은 의미에서 ‘우리 모두 그렇게 한 번 살아보자’는 뜻인데, 실상은 교회 안에서의 외침으로만 끝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저는 교회야말로 나토족 ‘집합소’내지는 ‘양성소’라 생각한다. 오죽했으면 신자가 물에 빠지면 입만 물위로 떠오른다는 말이 있겠는가? 말만 앞세우는 것 참으로 경계해야 할 일이다. 주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고 하셨다. 물론 말의 고백이 중요하다. 하지만 그 말의 고백이 삶으로 증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서에 기록된 주님의 삶에 이것이 잘 나타나 있다. 주님은 말로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설명하지 않고, 행동을 통해서 사역을 통해서 삶으로 그것을 증명해 보이셨다. 신자는 ‘예수 따르미’이다. 그러므로 주님처럼 말이 아닌 삶으로 우리 자신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는 말씀에는 ‘정직하고 진실하게’ 말하라는 것과 함께 ‘단순하고 간략하게’ 말하라는 뜻도 있다. 원래 진실에는 긴 수식이 필요하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은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대신 행동으로 자신의 말을 증명해 보인다. 그러므로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는 말씀은 말은 단순하고 간략하게 하고 행동하라는 뜻이다. 이것이 내가 한 말의 진실성을 증명하는 길이다. 우리 모두 말만 앞세우는 신자가 아닌 행동이 빠른 신자가 되자. 내가 믿고, 고백한 바를 삶으로 보여주는 신자가 되자.

 

쇼펜하우어는 ‘하나님은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사자에게 발톱과 이빨을 주었고, 소에게는 뿔을 주었고, 문어에게는 먹물을 주었고, 인간에게는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기교를 주었다.’고 했다. 매순간이 시합과 같고, 하루하루가 결승전과 같은 인생, 잘못 살았다고 다시 살 수는 없는 인생살이를 위해 거짓말은 필수품이라는 이야기다. 정말 그럴까? 이런 속임수에 속지 말자! 도스토예프스키는 ‘진실한 생활로 시종일관하십시오. 그것으로 인하여 많은 적을 얻을지 모르지만 얼마 안되어 그 적들은 모두 다 당신에게 굴복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천박함과 야비함과 간교함이 활개 치는 이 세상에서 한 줄기의 희망과 같고, 영원한 생명의 줄기와 같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진실이다.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정직하고 진실하면 당장엔 손해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손해가 나중엔 견줄 수 없는 믿음과 신뢰로 돌아온다. 맹세가 필요 없을 만큼 진실하게 말하고 정직하게 생활하자!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그가 그의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시97: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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