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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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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419회 작성일 11-09-11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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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삶

마5:17~20

2011. 9/11   08:00, 11:00

무례한 신자들

어느 주일 늦은 낮 시간, 모녀가 식당에 들어서는데 딸은 아기를 업고 있었다. 그들은 주문한 식사를 마친 후, 태연하게 옆자리 빈 식탁에 아기를 눕히더니 주변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기의 똥 기저귀를 갈아주고 있었다. 이 모습에 모두가 아연실색(啞然失色)했다. 그 식탁 끝자락에는 그들이 들고 들어온 성경찬송 두벌이 놓여있었다. 주일예배를 마치고 식당에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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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날 비슷한 시간 다른 식당, 젊은 부부가 고만고만한 아이 셋을 데리고 들어와 식사를 주문했다. 그런데 세 아이의 소란스러움은 다른 사람들이 식사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 부부는 아이들을 제지할 생각은 전혀 안 하고 그저 태연했다. 그런데 주문한 식사가 나오자 다섯 식구가 모여앉아 머리를 숙였고, 그 아빠가 간절히 감사기도를 드렸다. 주변 사람들은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그들이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성경과 찬송가를 가지고 다니지도 않고, 식사시간에 기도도 드리지 않는 사람들에 비하면 딴에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상식’이 없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는 물론, 폐를 끼친다는 기본예의를 모르는 것이다. 신자가 아니라도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하는, 그 상식이 결여되어 있는 무례한 신자들이다. 그렇다면 신자는 모두가 상식이 부족한 사람들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상식적인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문제는 상식이 없는 신자들의 무례한 행동이 더 크게 ‘노출’되는데 있다. 일단 노출되면 모두가 경멸을 받게 되고, 경멸을 받으면 설득력을 상실한다. 설득력이 없어지면 어떤 기능도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이 믿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 되고, 이런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죽은 교회가 된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위기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의의 기준

‘종교’(宗敎)라는 한문 글자는 ‘근본을 가르친다.’는 뜻이다. 보이지 않는 그 심오한 세계를 탐색하는 것이 종교다. 그런데 보이는 세계에서조차 ‘자격미달’인 사람들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심오한 세계를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을 말한들 누가 관심이나 가질까? 본문 20절은 이와 같은 우리의 삶에 대한 주님의 강한 도전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우선 이는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대한 말씀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의 기준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의 기준보다 엄격하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무도 하나님의 의의 기준을 만족함으로서 스스로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어떤 의로운 행위로도, 심지어는 율법의 의로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음을 강조하는 반어적 표현이다(롬3:10). 사실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은 굉장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에 익숙한 우리들에게는 당연하게 들리지만, 지금 주님의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유대인 신자들이다. 당시에 이런 이야기가 돌고 있었다고 한다. ‘만약 하나님이 천국 문을 열어 놓고 단 두 사람만 받아들이겠다고 하신다면 그 두 사람이 누구누구일까?’ 이에 대하여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하나는 서기관이요, 다른 하나는 바리새인이다.’ 그만큼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당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주님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다. 인간의 어떤 의로운 행위, 심지어는 율법의 의로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19절에서 주님은 율법의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소중히 여기며 순종하고 그것을 올바로 해석해서 가르치는 것이 천국에서 큰 자가 되는 길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20절에서는 그와 같은 것이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율법을 지키는 것과 천국에 가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라는 것이다. 이는 율법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를 구원의 조건으로 오해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대신 ‘더 나은 의’가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쉬트렉커(G. Strecker)는 ‘더 나은 의’를 ‘질적으로 다른 의’, ‘새로운 의’라고 해석하였다. 하나님의 의의 기준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의 의와는 전혀 ‘새로운’, ‘질적으로 전혀 다른’ 의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의’이다. 믿음의 의를 가져야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다.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많은 사람들이 본문 20절을 ‘마태의 구원관’을 나타내는 중요한 구절로 보고 있다. 그 이유는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표현 때문이다. 그래서 이에 대한 구원론적인 면에서의 해석이 여러 가지다. 저 역시도 앞에서 그렇게 설명을 했다. 하지만 이를 구원론적인 면보다 신자의 삶에 대한 적극적인 권면으로 해석하는 것이 정황상 더 바람직하다고 본다. 지금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이 이미 주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이고, 21절부터 시작되는 주님의 율법에 대한 재해석과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기 때문이다. 20절은 17절부터 시작된 ‘주님과 율법’에 대한 결론이면서 21절부터 시작되는 주님과 율법의 재해석에 대한 서론이다. 그러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이 부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통일신라 말기 대학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라는 분이 있다. 〈태조왕건〉이란 드라마에도 나왔지만, ‘계림황엽 곡령청송’(鷄林黃葉 鵠嶺靑松, 계림은 시들어가는 누런 잎이고, 개경 곡령은 푸른 솔이다)이란 말로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새로 일어날 것을 미리 내다보고 있었다는 일화로도 유명하다. 그는 12세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18세에 장원급제하여 당나라에서 벼슬살이를 했다. 그가 당나라로 유학의 길을 떠날 때 그의 아버지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10년이 되도록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 가서 힘써 노력하라.’ 다행히 최치원은 6년 만에 장원급제하였다. 하지만 그가 10년이 되도록 급제하지 못했다고 하여 그의 아버지가 그를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을까? 이는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에만 열중하도록 격려하기 위해서 한 말이다. “너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 또한 같은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이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아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천국의 백성이라면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삶을 살고 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아야 함을 강조하기 위한 말씀이다. 믿음의 의로 거저 받은 구원이지만 율법준수를 통해 구원에 이르고자 했던 사람들보다 더 탁월한 삶을 살아야한다는 뜻이다.

 

이를 지금 우리의 삶에 이렇게 적용해 볼 수 있다. 요즈음 안철수 교수가 연일 화제가 되고 있는데,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영향을 줄 수 있는 훌륭한 사람이 우리 신자들 중에 몇이나 있을까? 아니 신자들 중에는 왜 이런 사람이 없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신자라면 안철수 교수보다 더 탁월해야한다는 것이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신자의 목표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주님 앞에 서는 것(1:22)이라고 하였다. 구원을 ‘중생’(과거), ‘성화’(현재), ‘영화’(미래) 3단계로 표현한다. 여기서 중생(거듭남)의 사건은 ‘완성’이 아니라 ‘시작’이다. 새로운 삶의 출발이다. 주님 안에서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완전한 자로 세워져 가는’(골1:28) 성화의 삶을 위한 출발이다. 그리고 신앙생활은 이것(성화)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다. 영화는 이것의 완성이다. 본문은 ‘성화의 삶’을 강조한 말씀으로, 이것을 이루지 못하면 결코 천국(영화)에 들어갈 수 없다는 각오로 분투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중생과 성화, 그리고 영화는 서로 깊은 연관이 있다. 중생(과거)하지 못하면 성화(현재)의 삶을 살 수 없고, 성화를 이루지 못하면 영화(미래)를 보장받을 수 없다. 결국 신앙과 삶은 서로 별개가 아니다. 믿음으로 출발한 구원은 삶을 통해서 완성되어야 한다.

 

더 나은 의

 

“.......너희의 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20).

.

여기서 ‘의’(δικαιοσυνη)는 ‘옳음’, ‘올바름’, ‘올바른 행동’을 의미한다. 현대적인 개념으로는 ‘바른 행동’이 될 것이며, ‘상식적인 행동’도 이 범주에 포함된다. 그리고 ‘더 나은’(περισσευσῃ)이란 ‘넘쳐흐르다’, ‘범람하다’, ‘탁월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보다 더 탁월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흔히 우리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의 의를 형식적이라고 비판하면서 배척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주님께서도 저들의 이런 점을 심하게 책망하셨다. 그렇지만 대개의 경우, 저들이 자신들의 의를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에만 한정된다. 본문에서 저들의 의를 언급하신 것은 주님 역시 저들의 삶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신 증거다. 주님은 비록 저들의 의가 형식에 치우쳐 있긴 하지만 거기에 내용(정신과 의미)을 덧붙여서 저들의 의를 넘어서라고 하신다(마23:23).

 

그러므로 신자들은 올바른 행실, 바른 행동, 상식적인 행동에서 세상 사람들을 능가하는 탁월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주님은 신자를 세상을 위한 소금이고 빛이라 하셨다(마5:13~16). 소금과 빛의 기능을 다하기 위해서는 더 나은 사람들이 되지 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처음 전파되었을 때, 복음전도가 국법으로 금지되어 자유롭게 전도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믿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고 심지어는 목숨을 걸고 세례를 받겠다는 사람들이 나왔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신자들의 ‘보다 나은 의’를 보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목숨을 바쳐 배고픈 사람을 먹여주고, 병든 사람을 고쳐주고, 신분을 뛰어넘어 사람대접을 해주고, 무지한 사람들에게 글을 깨우쳐서 사람답게 사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일찍이 어느 누구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탁월한 삶에 감동했던 까닭이다. 신자와 교회가 높이 솟은 망대처럼 신뢰를 회복하고 존경과 사랑을 받는 길, 부흥의 불길을 치솟게 하는 길이 여기에 있다. ‘더 나은 의’를 갖는 탁월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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