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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써야 할 것, ‘거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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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908회 작성일 14-10-05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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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써야 할 것, ‘거룩함’

히12:14~17

2014. 10/5. 08:00, 11:00

사랑한다는 것

유행가 중에 〈노란 샤스의 사나이〉라는 노래가 있다. 50여 년 전에 유행했던 노래인데,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시작하고 있다.

 

노란 샤스 입은 말 없는 그 사람이

어쩐지 나는 좋아. 어쩐지 맘에 들어.

미남은 아니지만 씩씩한 생김생김

그이가 나는 좋아. 어쩐지 맘이 쏠려.

 

노란 샤스를 입은 그 사람이 어쩐지 맘에 들고 어쩐지 좋은 것, 우린 이것을 사랑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사랑을 ‘눈먼’ 사랑, ‘맹목적인’(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 한다. 하지만 ‘어쩐지’ 맘에 들고, ‘어쩐지’ 좋은 것이 아니다. 이렇게 그가 마음에 들고 그가 좋은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노란색을 좋아하고, 말 없는 것을 좋아하고, 씩씩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그 사람 속에 있기 때문에 특별한 미남은 아니지만 그를 볼 때마다 마음이 설레고, 마음이 쏠리고, 그래서 좋아하게 된 것이다.

 

사회 심리학자 에릭 프롬(E. Fromm)의 책 「사랑의 기술」에 이런 말이 나온다.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 속에 들어 있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이 없으면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 속에 있는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그 사람에게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발견한 사람은 사랑하게 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사랑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사랑에 대한 매우 중요한 정의라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가지려고 하고, 하려고 하고, 그 사람을 닮으려고 한다. 그 사람이 좋아하는 옷, 좋아하는 장신구, 좋아하는 노래,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말, 좋아하는 행동, 좋아하는 습관 등 모든 것을 그 사람에게 맞추려고 한다. 그래서 사랑을 키워간다. 반면에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고집한다. 그러니까 사랑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 사람에게서 자신과의 공통점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사소한 공통점만 가지고도 좋아하고 기뻐한다. 반면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사람에게서 차이점만 찾고, 다른 점만 본다. 그러면서 자신과 너무 다르다고 불평한다. 이 때문에 프롬은 사랑을 ‘기술’이라고 한 것이다. 이는 사랑도 연습과 훈련을 통하여 아름답게 가꿀 수가 있고, 또한 잘 가꿔야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죄를 짓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난 인간, 반역을 밥 먹듯 하는 인간을 하나님께서는 왜 사랑하신 걸까? 그것도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고 자신의 생명과 같은 외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걸까? 왜 그랬을까? 그것은 인간이 모든 피조물 중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범죄와 반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이유다.

 

신앙생활은 이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다. 그리고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더 깊이, 더 풍성하게 확장시키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적이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이 서로 더 많이, 더 깊이, 더 간절히 사랑하기 위해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자기 안에 가지려고, 행하려고, 닮으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실 수밖에 없도록, 기뻐하실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 곧 ‘성화’(聖化, sanctification)라고 한다. 베드로는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것’(벧후1:4)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도록 우리 자신을 준비하는 것이다. 프롬의 표현대로 하면 우리 안에 하나님이 좋아하시고 기뻐하시고 사랑하시는 것들로 채우는 것이다. 지금 여러분의 삶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가? 무엇으로 채워가고 있는가? 그 모두가 주님이 기뻐하시고 좋아하실 만한 것들인가?

 

거룩함을 따르라!

 흔히 사람들은 인간의 목적을 ‘행복의 추구’(pursuit of happiness)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 신자의 목적은 행복의 추구가 아니라 ‘거룩의 추구’(pursuit of holiness)이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지만 14절에 나온 ‘화평함’과 ‘거룩함’은 신자가 가져야 할 중요한 두 가지 덕목이다. 굳이 구별을 하자면 화평은 사람에 대한 덕목이고, 거룩은 하나님께 대한 덕목이라 할 수 있다. 거룩은 하나님의 여러 성품 중에 하나로 성경에 자주 나온다(구약에만 830회 이상). 그렇지만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대표적인 성품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거룩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말씀한 것이다. 거룩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코데쉬’(קדשׁ)는 ‘잘라냄’, ‘분리함’을 의미하는 말로 더러움과 분리된 상태를 뜻한다. 이 단어의 종교적 의미에서 본 근본개념은 ‘일반 세속적인 것이나 부정한 것으로부터의 탈퇴’(떠남), ‘신상하고 성스럽고 순수한 것에 대한 헌신’(지향)을 뜻한다.

 

1. 떠남(separate from)

거룩의 첫 번째 의미는 ‘구별’ 혹은 ‘분리’다. 거룩은 더러운 것, 부정한 것, 오염된 것으로부터 분리하여 떠나는 것이다. 즉 죄로부터 분리하여 떠나고, 세속적인 것으로부터 분리하여 떠나는 것이다(separate from). 성경은 많은 곳에서 죄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막7:18~23, 롬1:29~31, 고전6:9~10, 갈5:19~21, 골3:5~8 등). 그래서 성경을 ‘죄경’(罪經)’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이런 모든 죄로부터 분리하여 떠나는 것이 거룩이다. 본문이 강조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점이다. 거룩은 지난 주일에 말씀 드린 것처럼 내 안에 있는 모든 ‘쓴 뿌리’를 제거하고(15), 또한 ‘육체의 욕망’과 ‘망령된 것’을 제거하는 것이다(16).

 

특히 본문은 이삭의 장자 ‘에서’(Esu)를 거룩하지 못한 사람의 모델로 제시하고 있다. 그를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망령된 자’라고 한다. 여기서 ‘망령된 자’란 ‘신성을 더럽힌 자’(profane), 혹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 자’(godless)란 뜻이다. 신적인 가치, 즉 신령하고 영적인 가치를 가볍게 여기거나 무시하는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현실에 치우쳐 영원한 것을 중요성을 모르고, 육적인 것에 치우쳐 영적인 것의 중요성을 모르고, 보이는 것에 치우쳐 보이지 않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지상의 것에 눈이 멀어 신령한 것 하늘의 것을 소홀히 하는 것이다. 결국 에서가 신령한 복의 상징인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넘기게 된 원인이 여기에 있다. 참으로 유감스러운 것은 오늘날 신자들 중에 이런 에서족(族)이 많다는 것이다. 분명히 이름은 신자인데, 신령하고 영적인 가치를 무시하거나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롯의 사위들, 엘리의 아들들). 믿는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망령된 문화, 망령된 사상, 망령된 가치로부터 분리하여 떠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룩은 우리를 더럽게 하고 부정하게 하고 오염시키는 죄와 세속적인 것들로부터 떠남에서부터 시작이 된다. 철저하게 떠나지 못하면 신발 속의 모래알처럼 늘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결국은 신앙의 길에서 벗어나도록 만든다.

 

2. 지향(separate to)

본서는 우리 신자를 운동장에서 달리기를 하는 경주자에 비유하며 경주자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한다.’(12:1)고 한다. 그리고 이어서 벗어버려야 할 이유를 말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12:2). 벗어버리는 것은 예수님을 바라보기 위함이다. 바라본다는 것은 모든 것을 주님께 집중하고 헌신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거룩의 또 하나의 의미가 있다. 거룩은 하나님께 ‘바쳐진 것, 곧 헌신’이다.

 

거룩은 분리해서 떠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분리해서 ‘지향하는’ 것이다(separate to). 죄로부터 분리해서 떠나고, 세속적인 것들로부터 분리해서 떠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을 지향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을 좋아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기뻐하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원하고,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또한 버리고 떠나고 비우는 곳에 하나님이 좋아하시고 기뻐하시고 사랑하시고 귀하게 여기시는 것으로 채우는 것이다. 이것이 분리해서 떠난 이유이고 목적이다. 바울은 비운 곳에 채워야 할 것으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온유, 충성, 절제)를 소개하고(갈5:22~23), 베드로는 신성한 성품 일곱 가지(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우애, 사랑)를 소개하고 있다(벧후1:5~7). 우리가 버리고 떠나고 비우는 목적이 바로 이것들을 채우기 위함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것, 곧 ‘거룩’이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 즉 거룩을 추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고 싫어하시고 좋아하시지 않는 것들로부터 분리하여 떠나고, 하나님이 좋아하시고 기뻐하시고 사랑하시고 귀하게 여기시는 것들을 추구하며 채워가는 것이다.

 

거룩을 연습하라!

거룩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11:45). 그리고 거룩은 하나님의 뜻이자 소원이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4:3). 또한 거룩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있어서 능력의 통로다. 하나님은 거룩하지 않은 사람을 들어서 사용하신 적이 없다. 하나님은 깨끗한 그릇에 당신의 영광과 능력을 부어주신다. 그 어떤 자격보다 더욱 하나님이 찾으시는 조건이 거룩이다(딤후2:20,21). 그러니 거룩한 삶을 위해 더욱 힘써야 한다. 해리 에머슨 포스딕(H. E. Fosdick)은 우리 신자가 한 번 쯤 귀 기울여야할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채찍질을 하지 않고 말을 원하는 곳으로 끌고 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압력을 가하지 않고 수증기나 기체를 원하는 방향으로 몰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동력기를 통과하지 않고 물을 빛이나 힘 에너지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도 어떤 한 가지 일에 집중해서 헌신하고 훈련되지 않고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신앙생활에도 훈련이 필요하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할 것을 권면하였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7,8). 하나님의 성품인 거룩도 예외가 아니다. ‘말씀과 기도’(딤전4:5)를 통한 부단한 연습과 훈련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닮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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