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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써야 할 것, ‘日日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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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217회 작성일 14-10-26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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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써야 할 것, ‘日日新’

롬12:1~2

2014. 10/26. 11:00(개혁주일 성찬예배)

苟日新(구일신)

 중국 고대 은(殷)나라를 창건한 탕(湯) 임금은 자신의 세숫대야에 ‘苟日新 日日新 又日新’(구일신 일일신 우일신), 즉 ‘참으로 새로워지기 위해선 나날이 새로워지고, 또 새로워져야 한다.’는 이 아홉 글자를 새겨놓고(盤銘) 세수를 할 때마다 마주하면서 자신을 정진하는데 힘썼다고 한다. 이 말을 줄여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日新又日新’(일신우일신)이라고 한다. ‘날마다 새롭고 또 새롭게’ 라는 뜻이다. 이는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자기 변화를 위해 부단히 정진할 것을 요구하는 말이다. 뭔가를 이룬 사람들의 공통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해서 배우고, 부단히 노력하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하게 도전한 사람들이다. 이 변화는 현재형이고, 또 진행형이어야 한다. 지금 변화되어야 하고, 계속해서 변화되어야 한다. ‘나날이 새롭게’(日日新), ‘또 새롭게’(又日新) 될 때, ‘참으로 새롭게’(苟日新) 된다. 즉 새롭게 변하게 되고, 새롭게 발전하게 되고, 새롭게 성장하게 되고, 새롭게 성숙하게 된다.

 

챨스 다윈은 ‘살아남는 것은 크고 강한 종(種)이 아니다. 변화하는 종만이 살아남는다.’고 했고, ‘변화를 강요당하기 전에 스스로 변화해야 한다.’고 잭 웰치는 말했다. 스스로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되거나 변화를 강요당하는 쫓기는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 고여서 썩어버리는 물이 되지 않으려면 정체해 있으려는 나태함을 떨쳐내고 변화를 위해 끊임없이 힘써야 한다. 이것은 지나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찬란한 문화와 문명을 자랑하던 제국들이 무너지고, 시대를 풍미했던 많은 철학이나 사상들도, 잘 나가던 기업이나 제품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 이유는 변화를 거부했기 때문이고, 변화에 유연하게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재의 성공에만 안주하다가 스스로 썩어버린 것이다. 교회도 신앙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잠들지 말라고, 깨어있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변화나 개혁은 깨어있는 사람의 몫이다. 종교개혁이 좋은 예다.

 

항상 개혁되는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

오늘은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함으로 종교개혁을 일으킨 지 ‘497주년’이 되는 기념주일이다. 타락하고 부패한 중세교회의 문제점을 개혁하고자 일어났던 한 신부의 개혁의 불길이 교회가 새롭게 거듭나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었다. 즉 시대의 어둠에도 잠들지 않고 깨어있던 한 사람에 의해 일어난 것이 종교개혁이다. 이 종교개혁의 정신으로 세워진 교회를 ‘개혁(된)교회’(Reformed Church)라고 한다. 우리 교회 역시 이 종교개혁을 본받아 세워진 교회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개혁(된)교회의 사명을 이렇게 외쳤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 현재에 만족하지 말고 끊임없이 개혁을 추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변화를 추구하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개혁교회의 전통을 이어받은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개혁하고, 교회를 개혁하고, 나아가 이 나라와 열방을 개혁해야 할 사명이 있다.

 

변화(개혁)는 마음에서부터

변화(개혁)를 말할 때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첫째는 내 자신도 변화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변화에는 항상 내가 포함되어야 하고, 나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래야 다른 사람이, 세상이 변화되는 것이다. 사실 천하가 변해도 내가 변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고, 설령 모두가 변하지 않아도 내가 변하면 문제될 것이 없다. 중요한 것은 내가 변하면 주변도 변하게 된다. 둘째는 제도나 구조보다 사람이 먼저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집주인이 바뀌면 집도 바뀐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사람의 마음이 변해야 한다. 철수가 수철이로 그 이름을 바꿨다고 해서 그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 그 속사람, 곧 마음이 변해야 한다. 그래서 본문은 새롭게 변화되어야 할 대상으로, 변화의 출발점으로 우리의 ‘마음’을 꼽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에서 ‘변화를 받아’(be transformed)는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된 것과 같은 의미다. 그러므로 변화는 단순히 보여 지는 어떤 것 하나를 바꾸는 문제가 아니다. 내면을 바꾸고, 내면의 체계를 바꾸고, 본질을 바꿔서 속사람이 변화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닮는 것이다. 예수님의 형상을 덧입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처럼 영광스럽게 변화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까? 본문은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한다고 말씀한다. 왜 마음인가? 마음이 곧 그 사람이고(잠23:7), 중심이기(삼상16:7) 때문이다. 우리는 마음으로 생각하고, 마음으로 판단하고, 마음으로 인지하고, 마음먹은 대로 행동한다. 그래서 마음을 새롭게 하면 생각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고, 인생이 바뀌고, 운명이 바뀌게 된다. 그 사람(의 본질)이 바뀌게 된다. 그래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말씀한 것이다.

 

말씀으로 새롭게

그런데 여기서 ‘변화를 받아’ 라는 동사는 현재/명령형/수동태다. 이는 변화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반복적인 것이고(현재형), 변화의 주체가 자신이 아니라는 것(수동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반드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명령형)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다른 존재에 의해서’ 되는 것이다. 이는 당연하고 중요한 말이다. 내가 내 마음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도 내 마음을 모를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할 수도 없는 것이다. 내 마음을 아시고, 그것을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는 분은 오직 나를 지으신 하나님뿐이시다. 그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시켜 주신다. 말씀은 바위를 깨뜨리는 방망이고, 모든 더러운 것을 태우는 불이다(렘23:29). 심령과 골수를 찌르고 쪼개는 양날이 선 칼이다(히4:12). 말씀은 죽은 것들을 살리고 더욱 풍성하게 하는 물(생명수)이다. 말씀이 지혜이고, 말씀이 능력이고, 말씀이 권세다. 말씀이 생명이다.

 

그래서 개혁자들이 ‘오직 성경’을 개혁의 기치(旗幟)로 내세운 것이다. 말씀만이 나를 새롭게 하고, 말씀만이 나의 존재를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말씀만이 교회를 새롭게 하고, 말씀만이 교회를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루터가 그 바뿐 중에도 일반인이 사용하는 독일어로 성경번역에 심혈을 기울인 이유가 이 때문이다. 변화나 개혁은 카멜레온의 변신처럼 시대적 유행을 따라 그 시대에 맞는 옷을 입는 것을 의미하거나 나름대로의 새로운 것을 내어놓는 것이 아니다. 지극히 회귀적 의미를 갖는다. 주께서 이미 역사 속에서 특별하고 온전하게 이루어 놓으시고 가르치셨던 그 사건과 사실과 내용 안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칼빈의 말처럼 교회는 ‘새로운 것이 교회를 미혹하지 않도록 성경의 내용에 확고히 서는 일에 게으르지 않아야’ 한다. 이것은 교회뿐만 아니라 개인도 마찬가지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변화가 아니라 변질이고, 개혁이 아니라 개악이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닌데 왜 성경은 변화를 받으라고 명령하신 것일까? 그것은 변화의 중요성과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렇지 않으면 신자로서 본받지 말아야 할 이 세상 풍조에 휩쓸려 익사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롭게 하는 것이나 변화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시라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말씀 앞에 자신을 부지런히 노출시키는 것이다. 말씀 앞에 자신을 노출시킨다는 것은 말씀을 부지런히 읽고, 듣고, 배우고, 묵상하는 것이다. 시편 저자처럼 말씀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는 것이다(1:2). 이것이 자신의 변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그러면 말씀이 나를 지배하고, 말씀이 나를 다스리게 된다. 나를 새롭게 변화시켜 간다. 이렇게 변화되면 이 세대의 현상이나 풍조를 따르지 않게 되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알게 되고, 또한 행하게 된다. 그렇다. 말씀으로 변화를 받아야 세속에 변질되지 않고, 마음이 새롭게 변화를 받아야 교회를 세상을 변화시킬 수가 있다.

 

영적 고착상태를 경계하라!

심리학 용어 중에 ‘고착상태(Fixation)라고 하는 말이 있다. 이는 과거의 어떤 습관을 계속 유지함으로써 심리적 안정을 얻으려고 하는 현상을 말한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변화를 싫어하고, 변화를 두려워한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새로운 상황이나 환경에 적응을 못한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모든 것이 변하고, 계속 변화하고 있는데, 나만 변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그대로 있을까? 그것은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퇴보하는 것이다. 생명이란 정지상태가 없다.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 생명의 특징이다. 살아 있는 것은 변한다. 과거에 매어 변화를 거부하는 것은 심각한 심리적인 병이다.

 

신자도 변화되지 않으면 영적 고착상태(Spiritual Fixation)에 빠진다. 영적 고착상태에 빠지면 신앙의 진보는 물론 기쁨도 감사도 열정도 헌신도 다 잃고 껍데기만 남게 된다. 경건의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가룟 유다가 대표적인 사람이다. 제자로 출발을 하였으나 배신자로 마감했다. 고착상태라고 하는 병 때문이다. 이 때문에 주님 안에서의 변화를 전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결국 배신자가 되었다. 사단은 바로 이 점을 노린다. 그리고 이것을 이용하여 우리를 무너뜨린다. 그러므로 이런 영적 고착상태에 빠지지 않기 위해선 날로 새롭게 주님을 만나야 한다. 날로 새로워져야 한다. 늘 새롭게 변화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고,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한다. 바로 이것을 가능하게 해준 것이 말씀이다. 매일 말씀을 듣고, 읽고, 배우고, 묵상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마음을 의와 희락과 평강이 있는 하나님의 나라로 가꾸고, 치열한 영적 전투에서 마음을 지키는 일이다.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 받는 길이다. ‘나날이 새로워지는’(日日新)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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