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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써야 할 것,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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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3,694회 작성일 14-10-12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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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써야 할 것, ‘찬양’

히13:15

2014. 10/12. 08:00, 11:00

곡조가 붙은 고백, 기쁨이 있는 기도

 신자가 드리는 찬양에는 위대한 능력이 있다. 곡조가 붙은 신앙고백이고, 기쁨이 있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찬양은 일반 노래와 다르다. 특히 만들어진 것부터 다르다. 찬양은 글재주 많은 어떤 사람이 가사를 쓰고, 재능이 있는 작곡가가 거기에 곡을 붙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대부분이 평범한 신자의 깊은 신앙적 체험에서 흘러나온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고 고백이다.

 

제가 장례식에서 자주 부른 〈우리 이 땅에〉라는 찬양도 그렇다. 최용덕이란 분이 작사/곡한 것인데, 대학시절 신실한 후배를 졸지에 잃고 슬픔에 젖어 몸부림을 치다가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지체를 잃은 슬픔이 절절하면서도 천국에 대한 기대와 소망으로 그 절망적인 슬픔을 극복하는 믿음의 고백이다.

 

우리 이 땅에 몸으로 태어나 무슨 일 하다가 무엇을 남기랴.

우리의 인생을 누가 대신 살아주나

너와 내가 남남으로 주 앞에 설 때에 우리 무엇으로 주님께 드리랴.

 

혹은 긴 인생 어떤 인 짧은 인생 그러나 누구도 영원히 살 수 없네.

천국이 없다면 인생이란 허무한 것

너와 내가 영혼으로 만날 수 없다면 우리 이별을 어떻게 견디랴.

 

주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 얻어 언젠가 또다시 만날 수 있기에

우리 헤어져도 슬프지 않을 수 있어

너와 내가 영혼으로 또 다시 만나세. 주님 그때까지 함께 계시리라.

 

찬양은 영혼의 노래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찬양을 듣고 부르면 은혜와 감동을 받고, 위로와 용기를 얻고,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찬양이 눈물어린 배경을 가지고 있다. 〈성부 성자와 성령〉(3장)이라는 찬송은 아득한 초대교회시절부터 불려졌다. 사도요한의 제자였던 폴리캅을 비롯한 무수한 신자들이 순교현장에서 드렸던 찬송이다. 〈구주예수 의지함이〉(542장)는 남편이 물에 빠진 소년을 구하러 뛰어들었다 함께 익사하는 장면을 지켜본 아내가 비통한 기도 속에서 쓴 곡이고, 〈내 평생에 가는 길〉(413장)은 19세기의 욥이라 불리는 호레이쇼 스패포드가 시카고 대화재로 전 재산을 잃고 유럽으로 가던 네 딸마저 여객선 침몰로 희생된 후 밤새 울부짖다가 시편 23편을 읽으면서 지은 것이다. 애절하고 아름다운 〈내주여 뜻대로〉(549장)는 심방을 마치고 돌아온 벤자민 슈몰크 목사 부부가 불에 타 잿더미로 변한 집에서 죽어있는 어린 두 아들을 발견하고 눈물로 기도하며 지은 것이다. 잔잔한 감동을 주는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314장)은 전염병으로 두 자녀를 한꺼번에 잃은 시인 프렌티스가 절망적인 슬픔 속에서 지은 것이다. 그리고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315장)는 혀 암에 걸린 신자에게 의사가 혀 절단수술을 하기 전에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말을 해보라고 하자 불렀다는 찬송이다. 이렇게 찬송가는 곡마다 눈물어린 탄생배경과, 3장이나 315장처럼 감동적인 일화들을 가지고 있다. 인간으로서 견디기 힘든 고통 속에서, 구원받은 감격과 환희 속에서, 혹은 온갖 박해에 시달리면서 부르다 생명을 얻은 노래들이다. 때문에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달라져도 신자의 심금을 울리는 영혼의 노래가 된 것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이런 찬송을 드리면 은혜와 감동을 받고, 위로와 용기를 얻고,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찬송가 저자들처럼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세상이 이해할 수도, 말로 표현할 수도 없는 충만한 기쁨을 맛보게 된다. 그러니 우리 모두 열심히, 그리고 뜨겁게 찬양을 드리자.

 

찬양의 이유

성경에 많이 나온 단어 중 하나가 ‘찬양’이다(300회 이상 나옴). 그리고 대부분이 ‘찬양하라!’ 혹은 ‘찬양하자!’는 명령형과 청유형으로 되어 있다. 물론 인간은 하나님을 찬양도록 지음 받았기 때문에 찬양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우리에게 찬양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만큼 하나님께서 우리의 찬양을 좋아하시고, 찬양이 우리에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본문은 찬양의 특징과 중요성, 그 이유를 함축적으로 잘 보여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1. 예수로 말미암아

노래는 인간의 삶에 비타민과 같다. 노래는 인간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을 다 담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뻐도 노래하고, 화가 나도 노래하고, 슬퍼도 노래하고, 즐거워도 노래한다. 노래로 기쁨과 즐거움을 표현하고, 노래로 화를 견디고, 노래로 슬픔을 달랜다. 때문에 세상에는 많은 노래가 있는 것이다. 찬양도 그 중에도 하나다. 하지만 찬양은 다른 노래들과 다르다. 본문이 이 점을 말씀하고 있다. 찬양은 ‘예수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찬양의 동기(이유)이자 주제이고 내용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찬양을 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 때문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들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의 절망적인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여 주셨다. 사단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저주에서 축복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멸망에서 영생으로 인도하셨고, 육체적인 질고는 물론 일상의 어려움과 불행도 모두 해결해 주셨다. 이 모두가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루어진 일들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우리가 드리는 찬양의 내용이기도 하다. 그래서 본문은 “이는(찬양)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했다. 여기서 ‘그 이름’은 주님의 생애와 사역을 가리키는 말로, ‘예수로 말미암아’와 같은 의미다. 그러므로 찬양은 그 이름, 곧 예수로 말미암아 이뤄진 모든 일들을 고백하고 증언하는 일이다. 이렇게 신자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갚을 수 없는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입었다. 이 때문에 항상 주님을 찬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찬양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증언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주님의 소원이자 우리의 사명인 전도의 중요한 방편이라는 말씀이다. 이 역시 찬양의 중요성과 함께 항상 찬양을 드려야 할 이유다.

 

2. 항상 드려야 하는 제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다.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이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뜻이다. 안타깝게도 이런 놀라운 특권이 인간의 범죄로 무너지고 말았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이런 인간에게 계속해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방법과 기회를 친히 만들어주셨다. 그 방법과 기회가 구약의 ‘제사’제도다. 그러므로 제사는 범죄한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배려이고, 그런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수단이다. 하지만 율법에 따른 제사만으로 불완전하여 이것을 완성시키기 위해 예수님께서 오셔서 당신의 몸을 제물로 삼아 단번에 제사를 드렸다. 이제 제사 없이도 하나님과 교제의 길이 활짝 열린 것이다. 이것이 지금까지 히브리서 저자가 본서에서 강조한 내용이다.

 

그런데 본문은 찬양을 구약에서 하나님이 사람과 교제를 위해 친히 만들어주신 이 제사에 비유하고 있다.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미 제사가 폐지되었다고 말해놓고 여기서 새삼스럽게 찬양을 제사에 비유하고 있다. 그 이유가 뭘까? 이는 그만큼 찬양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구약시대에 제사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처럼 찬양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한 최상의 방법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여기에 우리가 찬양을 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있다. 찬양은 주님과의 풍성한 교제를 할 수 있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구약의 사람들도 찬양이 하나님과의 중요한 교제의 방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시편의 저자는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나이다.”(22:3)고 외쳤다. 주님은 우리의 찬양 중에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찬양을 통해 주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능력을 경험하고,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고, 복을 경험할 수 있다. 이런 놀라운 찬양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드리자.

 

찬양은 신앙의 꽃이다.

부부싸움도 찬양으로 해결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싸움을 하고 화가 난 남편이 ‘나는 갈 길 모르니 주여 인도하소서. 어디 가야 좋을지 나를 인도하소서.’ 하며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그러면 아내가 간절한 목소리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 하고 찬송을 부른다. 밖에 있는 동안 화가 풀린 남편이 ‘멀리 멀리 갔더니’ 하며 문을 두드리면 아내가 곧 ‘처량하고 곤하여’ 라고 부르면서 문을 열어준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유머다. 만약 이렇게 갈등을 해결할 정도의 부부라면 신앙이 깊은 건강하고 행복한 부부일 것이다. 이 이야기가 주는 중요한 교훈이 있다. 그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찬양을 잃지 말자는 것이다. 설령 갈등 중이라도 찬양을 드리자는 것이다.

 

찬양은 신앙의 꽃이다. 내가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 천국의 백성인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찬양이다. ‘혼자 있을 때 찬양이 나오는가?’ ‘인생이 막막하여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혹은 하는 일마다 잘 풀리고 잘 나가고 있을 때 내 입에서 찬양이 나오는가?’ 그렇다면 나는 분명히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다. 또한 찬양은 현재 나의 영적 상태를 말해준다. 그래서 영적으로 충만하면 찬양이 흘러나오게 된다. 나아가서 찬양은 영적 상태를 결정한다. 영적으로 기진하여 피곤할 때 찬양을 하면 물오른 나뭇잎처럼 소생하여 회복이 되고, 충만하게 된다. 그러므로 예배시간에만, 찬양시간에만 찬양하지 말고, 생활 속에서도 주님께 찬양을 드리자. 청소기를 돌릴 때도, 걸레질할 때도, 설거지할 때도, 화장실에서도, 샤워하면서도, 집을 나설 때도, 길을 걸을 때도, 운전하면서도 항상 찬양을 드리자. 또한 어디서든 어떤 상황에서든 항상 할 수 있는 것이 찬양이다. 주님의 제자들은 핍박 중에도 찬양을 했고,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감옥에 갇혀서도 찬양을 드렸다. 그래서 본문은 찬양을 일상에서 항상’ 드릴 수 있는 제사라고 한 것이다. 찬송가 338장을 지은 아담스(S.E.Adams)는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꿈에도 소원이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숨질 때 되도록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고 했다. 이 소원이 우리의 소원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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