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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며 기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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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1,325회 작성일 14-12-21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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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며 기다리라!

마25:31~46

2014. 12/21. 08:00, 11:00

잠시 노숙자가 된 목사

 이 사진의 주인공은 미국에서 페이스북 등 인터넷 사이트에 크게 화제가 되었던 사람이다. 그는 예레미야 스티펙(J. Steepek)이란 목사다. 그는 만 명의 신자가 모인 대형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던 주일 아침, 노숙자로 변장하고 30분간 교회에 들어오는 신자들 앞에서 서성댔다. 그 많은 신자들 중 단 3명이 그에게 hello했다. 하지만 음식을 사먹게 동전을 요구하자 아무도 동전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교회에 들어가 앞자리에 앉자 안내로부터 뒤에 가서 앉아 달라는 요구를 들었다. 사람들은 그를 못마땅한 눈초리로 쳐다보았고, 개중에는 멸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예배가 시작되고 광고를 마친 다음 장로들이 일어나 새로 부임한 담임목사를 청중에게 소개하였다. Jeremiah Steepek! 신자들은 기대에 넘쳐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그런데 뒤에 앉아 있던 그 노숙자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박수는 멈추고 모든 눈이 그를 주시했다. 장로에게 마이크를 넘겨받은 스티펙 목사는 오늘 본문 말씀을 또박또박 읽어 내려갔다. 그러자 신자들 중엔 흐느끼면서 회개하는 사람들이 나왔고, 부끄러움에 고개를 떨군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말씀을 읽고 나서 스티펙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 아침 교인들이 모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세상에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제자는 부족합니다. 여러분은 언제 예수님의 제자가 될 것입니까?’ 그리고 이렇게 끝을 맺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당신이 믿는 것 이상으로, 이웃과 함께, 그리고 그들 옆에서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아마 이런 일이 우리에게서 일어났어도 결과는 비슷했으리라 생각한다. 이 기사를 읽으면서 가장 먼 거리는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슴에서 손발까지’ 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그러니 믿는 것과 실천하는 것 사이의 간격을 좁히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 모쪼록 오늘 말씀을 통해 믿음과 실천 사이의 간격이 좁혀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믿음은 사랑의 실천으로 나타난다.

본문은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신 주님께서 심판하신 장면이다. 주님은 당시 사람들에게 아주 익숙한 것을 비유로 최후 심판의 모습을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에서는 낮에 양과 염소를 섞어서 방목을 한다. 하지만 저녁에 잠을 재울 땐 양과 염소를 분리한다. 양은 추위에 잘 견디지만 염소는 추위에 약하기 때문에 분리해서 따뜻한 곳에서 잠을 재운다.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리해서 재운 것처럼 최후의 심판에서도 의인과 악인, 구원과 멸망, 영생과 영벌로 분리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양을 구원의 상징인 오른 편으로 염소를 심판의 상징인 왼 편으로 분리한 것은 양이 생명과 구원의 상징인 흰색이고, 염소는 죽음과 멸망의 상징인 검은 색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심판(분리)의 기준’이다.

 

본문은 구원 받은 사람과 멸망 받은 사람의 기준을 그들이 사는 동안 ‘어려운 형제를 어떻게 대하였는가?’로 삼고 있다.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힌’ 가난하고 고통을 당하는 형제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들은 영생을 받고, 그런 사람을 외면한 사람들은 영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마치 믿음이 아니라 행위, 곧 사랑의 실천이 구원의 조건인 것처럼 보여 진다(그래서 ‘오직 믿음’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즐겨 인용하는 말씀). 달란트 비유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달란트 비유에서 ‘충성’이나 본문에서 ‘사랑의 실천’은 믿음의 결과로서 충성이고 사랑의 실천이다. 주님에 대한 올바른 믿음의 고백을 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주님이 맡겨주신 일에 충성해야 하고, 주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 수 있는 것처럼 산 믿음 역시 그 행위로서 증명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죽은 것이다(약2:17). 믿음은 추상적인 교리가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사랑의 실천으로 그 믿음이 증명된 사람이라야 영생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즉 주님께 대한 자신의 관계를 지극히 작은 형제에 대한 구체적인 사랑의 보살핌으로 입증해야 한다. 믿음의 증거로서 이와 같은 구체적인 행위를 보이지 않는 사람은 누구도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될 수 없다.

 

형제 사랑이 곧 주님 사랑이다.

이것을 입증한 사람들이 주님의 오른 편에 있는 의인들이다. 주님은 그들에게 그들이 보여준 사랑의 실천을 크게 칭찬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구제)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영접)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나눔)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위로)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위문).”(35,36). 그러자 그들은 ‘언제 우리가 그리 하였나이까?’ 하며 주님께 잘한 적이 없다고 부정했다(37,38,39). 어려운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한 것은 맞지만 주님께 그렇게 한 적은 없다는 것이다. 반면 왼 편의 악인들은 사랑하지 않은 것을 꾸짖자 그들은 주님께 직접적으로 잘못한 적이 없다고 반발했다(44).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지 않고 외면한 것은 사실이지만 주님을 직접 외면한 적은 없다는 것이다. 그 때에 주님은 의인과 악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4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45). 직접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만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당장 내 앞에 있는 어려운 형제를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마음으로 사랑하고 섬기라는 것이다.

 

여기서 주님께서 ‘자신을 지극히 작은 한 사람과 동일시’하신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는 그만큼 형제사랑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주님은 말세에 대한 중요한 특징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24:10~12). 말세의 가장 큰 특징은 ‘사랑이 식어지는 것’이다. 심지어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막13:12)고 했다. 사랑이 없는 살벌한 세상! 이것이 말세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이런 막장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지극히 작은 자에게 묵묵히 사랑을 실천하도록 자신을 사랑의 돌봄이 절실한 지극히 작은 사람과 동일시하신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도 말했듯이 사랑의 실천이 주님과의 관계에 기초한 주님에 대한 태도와 관계의 문제라는 것을 강조한다. 사랑의 실천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믿음의 결과라는 것이다. 또한 사랑의 실천의 구체성과 한 사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사랑의 실천은 구체적으로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모두 사랑의 출발이고, 그 한 사람도 사랑하지 못하면 아무도 사랑할 수 없다.

 

오늘 말씀을 보면 주님께 칭찬을 받은 의인들은 나라를 구하거나 다른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 것과 같은 대단한 일을 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이 한 일이란 배고픈 사람에게 한 끼 식사를 제공하고, 목마른 사람에게 물 한 그릇 주었다. 나그네에게 하룻밤 잠자리를 제공하고, 옷이 필요한 사람에게 옷 한 벌을 주었다. 병든 사람, 갇힌 사람을 찾아가 잠시 위로의 말을 건넨 것이 전부였다. 물론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만 노력하고 관심을 가지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아주 사소한 일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세를 성공적으로 살아내고, 나아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할 수 있는 진정한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선 의인들처럼 지극히 작은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이렇게 지극히 작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자의 자세이다.

 

깨어 있어라!

악어나 거북이와 같은 파충류의 암수 결정과정이 매우 흥미롭다. 파충류는 대부분 알이 형성될 때 암컷과 수컷이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 부화하는 과정에서 부화온도에 따라 암수가 결정된다. 악어의 경우는 섭씨 33도 이상이면 대부분 수컷이 되고, 30도 이하면 암컷이 된다. 33~30도 사이에서는 수컷과 암컷이 골고루 나온다. 거북이는 반대로 온도가 낮으면 수컷이 되고, 그 온도가 높으면 암컷이 된다. 곡식도 처음부터 알곡과 쭉정이로 결정된 것이 아니라 자라면서 그렇게 된다. 신자 중에 ‘알곡’ 신자와 ‘쭉정이’ 신자가 있다. 그런데 처음부터 알곡 신자와 쭉정이 신자로 결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신앙생활 과정 중에 결정된다. 날마다 죄로부터 도망을 다니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로 결단하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씀 안에서 살면 그 결국은 알곡이 된다. 그러나 그 반대는 쭉정이가 된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방심하지 말라고 깨어 있으라고 말씀한 것이다.

 

마25장에 나온 세 비유의 공통점도 방심하지 말고 ‘깨어 있어라!는 것이다. 영적 태만(게으름)에 대한 경계의 말씀이다. 미련한 다섯 처녀는 이 게으름 때문에 다른 그릇에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고, 한 달란트 맡은 종은 그 달란트를 땅에다 묻어두었다. 본문에서 악인들은 사랑해야 할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하지 못했다. 죄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는 것’(sin of commission)과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sin of omission)이다. 영적 태만은 후자에 속한다. 태만은 우리를 쭉정이 신자로 만드는 사단의 효과적인 무기다. 그래서 신앙선배들은 태만을 경계해야 할 가장 무서운 죄로 규정하고 경건의 훈련에 전념하였다. 아무튼 과거에 열심히 했기 때문에 지금도 그 은혜가 남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날마다 새로워야 한다. 때문에 바울이 ‘은혜의 현재성’(고후6:2)을 강조한 것이다. 날마다 새롭게 부어주시는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쭉정이가 될 수도 있다. 끊임없이 경건에의 훈련을 하지 않으면 어느새 우리는 심판의 불에 던져질 쭉정이가 되어 있을지 모른다.

 

어느 권사님 이야기다. 항상 허름한 헝겊가방에 여러 가지 물건을 담아서 들고 다녔다. 그 안에는 사탕을 비롯해서 진통제, 대일밴드, 멀미약, 낡은 성경 등. 이것을 본 사람마다 왜 이런 것들을 무겁게 넣고 다니냐고 했다. 그러면 권사님은 ‘그래도 가지고 다니다보면 필요한 사람들이 있더라.’고 했다. 어린 아이들에게 줄 사탕, 갑작스럽게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에게는 진통제, 상처 난 사람에게 붙여줄 밴드, 멀미약도 본인이 쓸 것은 아니고 필요한 사람에게 주려고 가지고 다녔다.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필요한 사람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어서 이렇게 한 것이다. 사소하지만 남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 항상 섬기려는 자세로 살아가는 마음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것이 사랑이고, 주님의 마음이다. 결국 이런 사람이 주님을 만나게 되고, 또한 주님을 섬기게 된다. 지금 여러분의 주머니나 가방에는 어떤 물건들이 있는가? 그리고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것들인가? 전 호주머니에 물건을 잘 넣고 다니지 않지만 몇 개 있는 것들을 보니 모두가 저를 위한 것이었다. 참 부끄러웠다. 지금부터라도 이 권사님처럼 다른 사람을 위한 것들 한두 개는 넣고 다니면서 필요한 사람 만나면 줘야겠다고 결심한다. 사랑은 이 사소한 실천에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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