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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아십니다.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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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1,396회 작성일 15-04-12 13:21

본문

주께서 아십니다. ‘베드로’

요21:15~19

2015, 4/12. 08:00, 11:00 

진실한 사랑에 따른 자동적인 용서

 ‘사랑은 미안하다고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는 말이 있다. 이는 「러브 스토리」라는 추억의 명화에 나온 유명한 대사다. 남편 올리버와 아내 제니퍼가 크게 다툰 다음 아내가 집을 나가버린다. 아내를 겨우 찾은 남편이 사과를 하려고 할 때, 아내가 남편에게 했던 말이다. 이 영화이후 많은 연인들이 이 말을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사과를 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오해하여 그들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킨 부작용이 많이 일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아내 제니퍼가 이 말을 한 원래의 의미는 ‘나는 당신이 날 사랑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이미 모든 것을 다 용서했다.’는 뜻이었다. 비록 한바탕 크게 싸웠지만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이에서는 상대방의 잘못 역시 자동적으로 용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본문은 부활하신 주님을 세 번째 만났을 때 일어난 사건이다(14). 이것은 제자들에게만 나타나신 횟수다(첫 번째/ 요20:19, 두 번째/ 요20:26, 그리고 세 번째/ 요21:). 그렇다면 이미 두 번씩이나 주님을 만난 베드로를 비롯한 7명의 제자는 왜 옛 생활로 다시 돌아간 것일까?(3) 물론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주님을 만나긴 했어도 전처럼 주님과 항상 함께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실망 때문이고, 특히 베드로의 경우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것에 대한 심한 자책감으로 인한 자격지심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베드로가 ‘나 고기 잡으러간다.’고 했더니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 따라나선 것이다. 하지만 ‘’(그가 3년 전에 고기잡이했던 )에 올랐으나 ‘그날’(주님을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했다(3). 그러니까 3년 전,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 일어났던 일이 똑같이 되풀이된 것이다(눅5:1~11). 그래서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15:5)는 주님의 말씀을 통렬히 실감한 저녁이었다. 바로 그 실패의 자리에 주님께서 또 찾아오신 것이다. 그들이 뭍으로 나왔을 때, 주님은 밥상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계셨다(9). 그리고 다른 말씀은 않고 그저 “와서 조반을 먹으라.”(12)고만 하셨다. 이것은 집나갔다가 돌아온 자식에게 따뜻한 밥부터 챙겨준 어머니의 모습이다. 이와 같은 주님의 모습은 제자들을 용서와 용납과 이해, 그리고 사랑한다는 뜻이다. 사람은 이런 모습에 감동을 받고, 회복이 되고, 다시 일어서게 된다. 이와 같은 주님의 모습에서 ‘진실한 사랑에 따른 자동적인 용서’를 확인할 수 있다.

 

베드로의 회복을 위하여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를 비롯한 7명의 제자들이 고기를 잡고 있는 디베랴(갈릴리) 호수로 찾아오신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베드로와 특별히 나누실 말씀이 있으셨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지금 그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것도 모자라 저주까지 한 것에 대한 심한 자책감 때문에 자격지심에 시달리고 있었고, 제자로서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있었다. 이런 그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주님이 찾아오신 것이다. 그것을 본문이 잘 보여준다. 주님은 식사 후에 그와만 개인적으로 면담을 시작하셨다. 그에 대한 유명한 사랑의 문답이다(일명 ‘베드로의 위임식’이라고도 부름). 본문은 주님의 세 번 ‘물음’에 베드로의 세 번 ‘대답’, 그리고 주님의 세 번 ‘당부’(명령)로 되어 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심리학자 로저스(C.R. Rogers)는 심리적으로 건강하기 위해서, 혹은 병든 심리가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우선 ‘무조건적인 존중’이 중요하다고 했다. 존중은 옆에서 바라보는 것도 아니고,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도 아니다. 그저 상대방을 높이 보는 것이다. 사랑의 대상을 높이는 것이다. 이렇게 존중하는 것이 건강한 심리를 창출한다는 것이다. 누군가로부터 존중받는다고 여겨질 때 심리적으로 건강해진다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다. 주변으로부터 사랑과 존중을 받고 사는 사람은 건강한 자존감을 가지고 있지만 무시나 거절의 경험이 많은 사람은 대부분 병든 심리, 곧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공감적인 이해’다. 상대가 내 마음을 알아주고, 내 뜻을 이해해주고, 내가 처한 상황을 충분히 공감해줄 때, 그래서 함께 아파하고, 함께 울어주고, 함께 기뻐해줄 때, 치료가 일어나고 건강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주님께도 베드로를 이와 같은 방법으로 회복시켰다.

 

주님은 먼저 그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하고 불렀다. 시몬은 그의 본래 이름이다. 그런데 유대사회에서는 이렇게 상대방의 이름을 ‘~의 아들(딸) 누구’라고 부른 경우가 흔치 않다. 굳이 사용한다면, 제3자를 소개할 때나 자신을 소개할 때, 그리고 상대에 대한 예의를 표할 때이다. 주님은 세 번째 경우다. 그러니 지금 주님은 그에게 예의를 갖추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라고 부르신 것이다. 주님이 이렇게 예의를 갖추어 부르신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의 자존감을 회복시키기 위함이다. 지금 그는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했다는 자책감으로 자격지심에 시달리고 있었다. 제자로서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있었다. 그 치명적인, 그 중한, 도무지 용서받을 수 없는 부끄럽기 짝이 없는 죄로 인하여 수치와 자기 혐오감에 빠져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 주님께서 잘 알고 계셨다. 이런 그를 다시 회복시키기 위하여 이런 자리를 마련하신 것이고, 그리고 주님은 그가 주님으로부터 존중받고 있다는 사실, 주님이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느끼도록 이렇게 호칭한 것이다. 사람은 말 한마디에 무너지기도 하지만 회복되기도 한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렇게 예의를 갖추어 그의 이름을 부르신 주님은 세 번 모른다고 부인한 그에게 주님도 세 번 그의 사랑을 확인하고 다짐하셨다. 그것도 숯불 곁에서 실수한 그에게(요18:18), 또다시 숯불 곁에서 이렇게 하셨다. 끝없는 반성과 은총을 일으켜주는 장면이다. 그러면서 주님은 말 그대로 밑도 끝도 없이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내용의 질문을 하셨다. 주님은 그의 죄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 언급도, 아니 내색조차 하지 않고, 그냥 ‘너 날 사랑하지?’ 하고 묻기만 하셨다. 주님이 이런 질문을 하신 것은 그동안 그가 보여 온 태도와 상관없이 주님은 그를 믿는다는 뜻이다. 그를 신뢰하고 사랑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사람을 회복시키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사람은 끝까지 자신을 지지해주고, 믿어주고, 신뢰해주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무너지지 않는다. 비록 실패해서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게 된다. 그가 얼굴을 들 수 없는 입장에서도 주님의 질문에 ‘주여 그렇습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라고 즉시 대답하며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다. 차마 그가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해서 그랬지, 그가 주님으로부터 가장 듣고 싶고, 그가 주님께 가장 드리고 싶었던 말이 바로 이 말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주님께서 이런 그의 마음을 아시고 ‘너 날 사랑하지?’ 하자 ‘그렇습니다.’ 라고 그가 곧 대답하였던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베드로처럼 실패할 수 있고, 낙심하여 넘어질 수 있다. 부인할 수도 있고, 모든 것 팽개치고 도망칠 수도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낙심하고 넘어져 있을 때, 우리가 주님을 부인하고 배반하고 온갖 못난 짓 못된 짓 다하고 쓰러져서 다시 주님을 뵐 면목조차 없을 때, 주님께서 오히려 먼저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의 죄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시고 그저 ‘너 날 사랑하고 있지?’라고만 물어주실 것이다. 참으로 고마운 질문이다. ‘주가 죄를 살피면 누가 능히 서리요.’ 라는 찬송가 가사처럼 만약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들추어내는 질문을 하시면 정말 우리는 한마디도 대답할 말이 없는 존재다.

 

또 하나 주님께서 그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은 주님에 대한 그의 마음 자세를 묻는 물음이었다. 사실 주님의 이 물음에 중요한 말이 생략되어 있다. ‘난 너를 사랑하는데~’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 질문에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지금도 나를 사랑하고 있느냐?’ 현재형으로 물으신 이유다. 물론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심지어 저주까지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랑하느냐는 것이다. 이는 사랑의 ‘현재성을 강조한 것이다. 정말 나를 사랑하고 있느냐?’ 3번이나 물으신 이유다. 그 사랑이 진정이냐는 것이다. 이는 사랑의 ‘진정성을 확인하고 강조하는 것이다. 사랑의 현재성과 사랑의 진정성! 이것이 주님이 그에게서 확인하고 다짐을 받고 싶었던 점이다. 비록 실패를 하고 실수를 할지라도 사랑의 현재성과 진정성이 있으면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드러난 결과에 주목하지만 주님은 마음의 자세에 주목하신다.

 

내 양을 먹이라!

아프리카에 있는 선교사가 이런 질문을 받았다. ‘당신은 하고 있는 일을 정말 좋아서 하십니까?’ 그의 대답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아닙니다. 나와 내 아내는 먼지와 이 고생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초라하고 냄새나는 이런 오두막에서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다고 주님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되겠습니까? 우리는 가라는 명령을 받았고,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섬김의 동기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다. 사람이니까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호불호(好不好)를 가질 수 있다. 그렇지만 건강한 신자는 호불호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내가 좋아서 하고, 좋아하지 않으니까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사랑에 따라 움직이다. 자기가 좋아서 하는 것은 자기 일이다. 주님의 일은 주님을 사랑해서, 주님의 사랑에 사로잡혀서 하는 것이다. 주님의 사랑에 매여서 하는 것이 주의 일이고, 그 사랑에 매여서 사는 것이 신자의 삶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주님의 질문에 베드로 역시 ‘그렇습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라고 진심으로 대답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는 직관적으로든, 경험적으로든 주님이 가장 잘 아신다는 것이다. 특히 직관적인 지식(οιδας)과 경험적인 지식(γινώσκω)을 뜻하는 단어를 동원하여 주님이 가장 잘 아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즉 주님이 이 일에 증인이시라는 뜻이다. 그러자 주님께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세 번을 당부하셨다. 정말 나를 사랑한다면 그것을 실천으로 보이라는 요구다. 그렇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사랑에는 책임과 의무가 따른다. 그러니 주님을 사랑한다면 그것을 삶으로 증명해야 한다. 성경 안팎의 많은 주님의 종들이 주님을 위해 목숨까지 바쳐서 충성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온몸으로 증명하기 위해서 그랬다. 주님을 사랑하는 여러분, 그 사랑을 삶으로 보여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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