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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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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3,261회 작성일 15-07-20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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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시73:25~38

2015. 7/19. 08:00, 11:00

단순노출효과(Mere Exposure Effect)

 지난 7월 9일 터키 어느 야당 대표가 한 말이 인종차별적이라 하여 화제가 되었다. 터키 극우세력이 한국 관광객을 중국 관광객으로 잘못 알고 폭행한 사건을 두고 한 말 때문이다. 그가 이렇게 말했다. ‘한국 사람과 중국 사람은 찢어진 눈이 같아 구별이 어렵다.’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찢어진 눈’이란 말이다. 이 말이 인종차별적인 표현이란 것이다. 하지만 이 말만 빼면 틀린 말은 아니다. 사실 유럽이나 기타 대륙의 사람들이 보기에 우리나라 사람과 중국 사람은 거의 구별이 되지 않는다. 그들 눈에는 다 똑같아 보인다.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보기에 그들도 모두 ‘그놈이 그놈으로’ 보인다. 왜 그러느냐? 우리 안에(그들도 마찬가지) 그들에 대한 ‘템플레이트’(template, 형판)가 만들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즉 그들을 구별할 수 있는 일종의 ‘기준’과 같은 것이 없기 때문에 똑같아 보이게 된 것이다.

 

아무튼 무엇이든 처음 보고 처음 듣고 처음 사용하고 처음 경험하는 것은 낯설고, 서툴고, 불편하다. 사람도 처음 만나면 서먹하다. 하지만 자주 보고, 자주 듣고, 자주 사용하고, 자주 만나다보면 익숙해지고, 편해지고, 좋아지고, 친밀감도 생긴다. 그래서 자주 보면 정든다고 한 것이다. 우리 속담에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좋다.’는 말도 같은 의미다. 이런 것을 심리학적인 용어로 ‘단순노출 효과’, 혹은 ‘에펠탑 효과’(Eiffel Tower Effect)라고 부른다. 프랑스가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해서 만국박람회를 개최하면서 기념 조형물로 이 탑을 만들었다. 철재로 만든 이 구조물을 파리 시민 누구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20년 후에 철거를 조건으로 세웠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늘 보다보니까 호감을 갖게 되어 이제는 파리의 랜드 마크가 되었다. 회사들이 무값을 주면서 자기회사 제품을 광고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주, 그리고 많이 보고 듣게 해야 사람들이 기억을 하고 호감을 갖게 되어 자사의 제품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신앙생활도 얼마나 자주 자신을 말씀에 노출하고, 기도에 노출하고, 찬양에 노출하고, 예배에 노출하고, 주님께 노출하느냐에 달렸다. 이것이 신앙의 깊이, 영성의 깊이를 결정한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간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아삽의 고민과 고백

본문은 시인이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상에서 악한 자들이 번성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믿음을 지키는 의인의 삶속에는 끝없는 고난이 함께 하고 있는 것에 대한 기막힌 실존을 바라보고 절망하였는데, 하나님께 엎드림으로 모든 것을 깨달은 후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이다. 본문은 표제에 나온 대로 ‘아삽’의 시다. 아삽은 다윗시대에 헤만 여두둔(에단)과 함께 4,000명의 찬양대를 이끈 사람이다(아삽은 찬양대장, 헤만은 반주자, 여두둔은 지휘자). 그런데 그의 시가 시편에 12편(50편, 73편~83편)이 수록되어 있다. 본시는 신앙인으로서 현실생활에서 경험한 내용을 아주 사실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는 그의 진솔한 고백이다.

 

그의 고백은 이렇게 시작된다. 자신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중에서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지는 줄(1) 알지만 거의 실족하여 미끄러질 뻔 했다(2)는 것이다. 그것은 악인의 번영과 형통을 보고 부러워했기(3) 때문이다. 그들은 돌아다며 온갖 악행을 자행하지만 하는 일마다 잘되고 몸도 건강하고 생활도 평안하고 죽을 때도 고통이 없었다(4~12). 반면 깨끗하고 의롭게 살려고 몸부림치는 자신에게는 늘 고통과 고난의 연속이었다(13,14). 이렇게 불합리한 현실을 목격하다보니 자신이 목숨처럼 지켜온 신앙이 헛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을 잘 믿으면 형통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반대였기 때문이다. 다행한 것은 이런 생각을 공개적으로 발설하지는 않고(그랬다면 많은 하나님의 자녀를 실족시켰을 것,15), 혼자 고민하다가 성소에서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던 중에 그 해답을 발견했다(16~20). 그렇다. 만사의 해답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 그리고 그 앞에 엎드리는 것이다. 그 끝없는 절망이 순식간에 소망으로 가득 찼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깨달음 때문이다. 악인의 형통은 꿈과 같고(18~20), 하나님께서 사는 동안 의인에게 많은 고난을 주심은 그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28). 반면 세상에서 아무리 형통해도 하나님을 떠난 것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고, 또한 망하였다고 선언하였다(27).

 

사랑하라!

하나님의 가장 축복된 은혜를 입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것’이다. 이것이 거듭난 신자의 영적인 생명이요, 능력이요, 은혜를 온전히 입고 누리는 영적 비밀이다. 그래서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를 위해 인적이 닿지 않는 황량한 사막으로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것은 (지난주에 말씀드린)하나님께 연합하는 것과 같은 의미다. ‘가까이 하다’와 ‘연합하다’ 둘 다 (히브리어로)같은 단어(다바크=①달라붙다 ②매달리다 ③붙잡다 ④친근히 하다)다.

 

여기서 ‘가까이 한다’는 것은 물리적 심리적으로 ‘거리를 좁히고, 간격을 좁힌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선 먼저 하나님을 ‘좋아하고 사랑해야’ 한다. 사랑하고 좋아하면 늘 보고 싶고, 만나고 싶고, 가까이 하고 싶고, 나아가서는 함께 하고 싶기 때문이다. 저는 비타민 씨를 좋아하다보니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닌다. 누구든지, 무엇이든지 좋아하고 사랑하면 그렇게 하게 된다. 남녀가 사랑하면 결혼하게 되는 것도 같은 이치다.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것도 하나님을 좋아하고 사랑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은 단순히 감정적인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태도의 문제다. 히브리어로 ‘사랑하다’는 동사가 ‘아헤브’(אהב)인데, 이는 ‘어떤 대상에 집중하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좋아한다는 것을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집중하니까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밖에 없다.

 

또한 즐거워하라!

다음은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즐거워하는 것도 사랑하는 것과 의미가 비슷하다. ‘즐거워하다’를 ‘하페츠’(הפץ)라고 한다. 이는 ‘마음을 쏟다’, ‘집중하다’, ‘몰두하다’, ‘(관심이 있는 어떤 대상을 향해 몸을)기울다’는 뜻이다. 그러니 하나님을 즐거워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온통 마음을 쏟아 붙는 것, 하나님께 집중하고, 몰두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해 몸을 기울이는 것이다. 바둑에 깊이 빠지면 말씀을 듣고 있는 회중의 머리가 바둑돌로 보인다고 하는 유머도 있다. 결코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시1:2절에 “(복이 있는 사람은)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도다.”고 했다. 복이 있는 사람은 온통 그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울여있고, 그 말씀에만 마음을 쏟고, 집중하고, 몰두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야(항상 가까이)로 그것을 묵상(깊이 생각하고, 중얼중얼 암송)하게 된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마음을 두고 있는 것에 가까이 하게 된다. 말씀에 마음을 두고 있으면 말씀을 가까이 하게 되고, 기도에 마음을 두고 있으면 기도를 가까이 하게 되고, 예배에 마음을 두고 있으면 예배를 가까이 하게 되고, 전도에 마음을 두고 있으면 전도를 가까이 하게 된다.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것도 이런 마음과 태도를 가질 때 가능하게 된다.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그리고 아무리 세상의 소리가 요란해도 마음이 하나님께 쏠려있고, 하나님께 집중되어 있으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반면에 마음이 없으면 인적이 없는 사막이나 고요하고 깊은 산속에 있어도, 아무리 곁에서 큰 소리로 불러도 듣지 못한다. 아무리 먹구름으로 짙게 덥힌 밤하늘도 유심히 바라보면 별 빛을 찾을 수 있다. 세상이 죄악의 먹구름으로 짙게 쌓여있어도 하나님께 마음을 쏟고, 하나님께 집중하고, 몰두하면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고 볼 수 있고 경험할 수가 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8:17). 하나님을 사랑하고 간절히 사모하는(즐거워하다와 같은 의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만난다는 것이다. 성경의 가장 위대한 계명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우리 장로교 신조 1번이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둘 다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 붙고 집중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야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인 하나님께 가까이, 하나님과의 연합하는 삶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거리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인간관계의 거리를 4가지로 설명했다. 첫째는 ‘밀접한 거리’로 45cm이내서 서로 닿고자하면 얼마든지 닿을 수 있는 거리다. 부부나 연인, 부모와 자녀처럼 친밀한 사람들 간의 거리다. 둘째는 ‘개인적 거리’인데, 45cm에서 120cm 정도로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는 거리다. 친구끼리의 거리다. 셋째는 ‘사회적 거리’다. 120cm에서 360cm 정도 거리로, 이는 업무적 형식적 의례적인 교제의 거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중 거리’가 있는데, 360cm 이상으로 거의 무관한 사람들의 거리다. 이 정도면 서로 관계없이 지나갈 수 있는 거리다.

 

그렇다면 나와 주님과의 관계에서 거리는 어느 단계인가?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거리가 관계의 질과 성격을 좌우한 것처럼 주님과의 거리도 마찬가지다. 언제든지 닿을 수 있는 밀접 거리를 넘어서 주님과 연합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즐거워하여 주님과의 거리(간격)을 날마다 팍팍 좁혀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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