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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심은 은혜의 배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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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1,909회 작성일 15-07-01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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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심은 은혜의 배신이다.

왕상19:1~8

2015. 6/28. 08:00, 11:00

낙심하지 마!

 살다보면 낙심이 되는 일들이 많다. 사실 인생이란 성공보다 실패가 더 많고, 눈물이 나도록 감동적인 일들보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아픈 일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기쁘고 즐거운 일보다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더 많고, 감사할 일들보다 원망스럽고 불평할 일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열심히 일을 했는데도 만족할 만한 결과가 따르지 않고, 최선을 다해 자녀를 양육했는데 자녀들이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고, 정말 성실하게 준비했는데 변변한 일자리도 구하지 못했을 때 낙심이 된다. 또한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사회에서 더 나은 위치에 있고, 직장에서는 더 빨리 승진을 하고, 특히 의로운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고 불의한 사람들이 형통한 부조리한 세상을 볼 때 더 깊은 좌절감을 느끼게 된다. 신앙생활에서도 그토록 열심히 기도를 했는데 기도에 대한 응답이 없고, 열심히 전도를 했는데 뚜렷한 열매가 없을 때도 마찬가지다.

 

낙심이란 자신이 수고한 것이 비해, 혹은 기대했던 것에 비해서 성과를 거두지 못할 때 생기는 것이다. 이 때 생기는 일종의 마음의 상처다. 성경은 이런 일들로 인하여 마음을 상하지 않도록 말씀하신다. “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의 미약함을 보임이라.”(잠24:10). 오히려 힘들고 어려운 때 일수록 힘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신앙의 힘, 기도의 힘, 경건의 힘, 은혜의 힘, 도전하는 힘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렇게 격려하신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반드시 심은 대로, 심은 만큼 거둔다는 것이다. 단지 ‘때가 이르기까지’ 낙심하여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 문제는 낙심해서 포기하는 것이다. 낙심하여 포기하지 않는 한 기회는 반드시 온다. 물은 반드시 100도가 되어야 끓는다. 아무리 99.99......도가 되어도 끓지 않는다. 물이 어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모든 일에는 때가 있고, 그 때가 이르면 좋은 결실을 거두게 된다.

 

낙심하는 이유

우리로 낙심하여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 사단의 일이고, 또한 주요전략이다. 사단은 문제를 확대하고, 실패를 과장하여 우리로 넘어지게 만든다. 이러한 사단의 전략을 알아차리고 과감하게 ‘사단아 물러가라’고 선포하고 그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야 낙심의 수렁을 뛰어넘을 수 있다. 그렇지 않고 거기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 점점 더 깊이 빠져들어 결국은 나올 수가 없게 된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것을 오늘 본문이 잘 보여주고 있다.

 

엘리야는 성경에 나온 모든 선지자의 아버지이자 으뜸이다. 성경이 구약시대를 통틀어 에녹이후 죽음을 경험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 수가 있다. 그에 대한 기록이 왕상 17장부터 단편적으로 소개가 되고 있는데, 그가 기도를 드리니 비가 내리지 않고, 다시 기도를 드리니 3년 반 동안이나 멈췄던 비가 내리고, 또한 기도하여 하늘에서 불이 내리게 했던 기도의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죽은 아이를 살려내고, 마차보다 빨리 달리는 능력의 사람이었고,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의 영적 전투에서 멋진 승리를 이끌어낸 용사였다. 이런 엘리야가 본문에선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도망을 치다가 지쳐 쓰러져 죽기를 구하는 심약한 사람으로 전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어느 구석에서도 17장과 18장에서의 그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이런 그의 모습을 통해 은혜 안에 머물지 않으면 사람은 누구나 별 수가 없다는 것, 이렇게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도 낙심할 수가 있고, 낙심하면 이렇게 심각하게 망가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기도에 깨어있으라는 말씀의 의미를 더욱 실감하게 된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토록 엘리야를 무너지도록 낙심하게 만든 것일까? 그를 이렇게 낙심하게 만든 원인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세벨의 말을 중요하게 여김(2)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이세벨의 말에 집중한 것이 엘리야를 낙심하게 만든 첫 번째 원인이다. 말에는 능력(힘)이 있다. 특히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의 말일수록 내게 그 영향력 또한 커진다. 어린 아이에게는 부모의 말이 큰 영향력을 미치고, 아이들이 친구를 중요하게 여길 때쯤엔 친구의 말이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리고 학생들에겐 선생님의 말이 영향력이 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의 말이 그 영향력도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다.

 

이와 같은 말의 원리는 그대로 신앙생활에 적용이 된다. 경건하고 능력 있는 신앙생활의 비결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데 있다. 그래야 우리의 삶이 그 영향력 아래 있게 되어 경건하고 능력 있는 삶이 가능해 진다. 반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면 다른 존재와 그들의 말을 중요하게 여기게 되고, 또한 그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된다. 본문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겼을 때는 왕상 17,18장의 삶을 살았다. 그런데 본문에서 이세벨의 말 한 마디(“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가 그를 낙심에 빠뜨리고 말았다. (물론 본문에는 이런 내용이 없지만)그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이세벨의 말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녀의 말이 그에게 이런 심각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 것이다. 하와가 인류 첫 범죄자로 낙인이 되어 추락하게 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뱀으로 위장한 사단의 말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혜 안에 늘 거하는 경건한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겼고, 또한 영적인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을 들었을 땐 그것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고 신속히 떨쳐냈던 것이다. 공중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도 날개를 잃으면 추락할 수밖에 없다. 신자 역시 주님의 은혜를 상실하면 추락하게 된다. 그 원인이 말에 있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여 묵상하는 것이 은혜를 받고, 그 은혜를 유지하는 비결이다. 그리고 그 은혜 안에서 더 높이 더 멀리 날 수가 있다.

 

자신이 처한 상황만 바라봄(3)

하나님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현실)에만 집중한 것이 엘리야를 낙심하게 만든 두 번째 원인이다. 찬송가(486장) 가사처럼 이 세상은 근심된 일, 곤고한 일, 죄악된 일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평안도 안식도 없고, 늘 죽을 일들만 쌓인다. 눈만 뜨면 들려오는 것이 가슴을 내려앉게 하는 끔찍한 사건사고 소식이다. 그래서 때때로 새삼스럽게 이런 세상에서 아직까지 요절나지 않고 살아있는 내 자신을 대행으로 여긴 때가 많다. 이렇게 우리가 직면한 현실, 사건, 상황, 문제에 비해 우리 자신은 너무 초라하고, 무기력하고, 무능력하다. 그런데 이런 우리가 우리 앞에 놓인 것들에만 집중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두말도 필요없이 분문에서 엘리야처럼,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3)치게 되거나,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4) 하고 외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가 자기 목숨을 위해 문제로부터 비겁하게 도망을 치고, 살기 위해서 그토록 도망쳤으면서도 이제는 그 목숨을 거둬달라고 자기 연민의 기도를 드리는 비참한 지경까지 이른 것은 그의 시선 때문이다. 상황보다 크신 하나님, 모든 문제의 답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 이세벨의 목숨까지 주관하신 하나님께 시선을 두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두려워서 낙심하게 된 것이다. 그는 분명히 갈멜산 전투에서 이것을 경험했다. 왕(아합)과 왕후(이세벨)의 후원을 받고 있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당당하게 물리쳤던 것은 그의 시선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윗은 살면서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만나 낙심하게 될 때면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격려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시42:5,11, 43:5). 히브리서 기자도 우리에게 이렇게 당부하고 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2). 주님께 소망을 두고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낙심하게 만드는 문제들과 상황으로부터 승리하는 비결이다.

 

초라한 자신에게만 집중함(10)

하나님이 함께 하신 자신이 아니라 홀로 있는 자신에게 집중한 것이 엘리야를 낙심하게 만든 세 번째 원인이다. 사실 본문의 엘리야에게서 가장 안타까운 모습이 바로 이 부분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셔서 지쳐 쓰러진 그를 찾아와 어루만지며 따뜻한 떡과 물을 두 번이나 주셨다(6,7). 이것은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네 생명은 내가 책임진다!’는 것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는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신 떡과 물을 두 번씩이나 먹고서도 여전히 자신은 혼자라고 하소연하였다(10,14). 하나님이 함께 하신 자신이 아니라 홀로 있는 초라한 자신에게만 집중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18).

 

이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은 물론이고, 보이지 않는 후원자가 많다는 뜻이다. 그러니 혼자 있지만 혼자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의 낙심은 이와 같은 사실을 애써 부정하는데 있었다. 곁에는 아무도 없고 거대한 문제 앞에 직면한 자신은 초라하고 무기력하고 무능력하니 낙심하게 된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가 본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신실하신 주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하시고, 또한 신실한 동역자들이 응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 날마다 숨 쉬는데 필요한 공기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공기가 없는 것이 아니다. 주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동행자시고, 동거자시다(위 그림을 보라. 그리고 낙심해서 엎드린 사람의 그림자를 주목하라. 그림자가 엎드린 사람을 붙들어주고 있다. 그림자처럼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주님께서 이와 같이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신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께서 함께하시는 나, 주님을 통하여 나를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시각이다. 그러면 낙심이란 말은 우리의 사전(辭典)에서 죽은 말이 될 것이다. 나는 약해도 주님은 강하시고, 나는 부족해도 주님은 온전하시고, 나는 무기력하고 무능해도 주님은 능력이 많으시기 때문이다.

 

낙심은 배신이다.

종교개혁자 루터가 개혁과정에 너무 힘이 들어 낙심한 때가 있었다고 한다. 이런 그를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던 그의 아내가 하루는 상복(喪服)을 입고 그의 앞에 나타났다. 그가 상복을 입은 아내에게 ‘누가 죽었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의 아내가 ‘하나님이 돌아가셨다.’고 대답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어떻게 하나님이 돌아가실 수 있느냐!’고 그가 반문했다. 그의 아내가 그에게 외쳤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어떻게 당신이 그렇게 낙심할 수 있겠느냐. 지금 당신의 모습을 보니 하나님이 돌아가신 것이 분명하다!’ 그는 아내의 이 말에 정신을 차리고 낙심의 자리에서 다시 일어섰고, 개혁을 향해 매진하게 되었다고 한다.

 

낙심은 배신이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한 배신이다. 사랑에 대한 배신이고, 신뢰에 대한 배신이다. 언제 어디서나 동행해주신 동행에 대한 배신이다. 특히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행동이다. 이와 같은 배신에서 돌아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상황보다 크시고 모든 문제의 답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늘 나와 함께 하심을 인정하며 하나님을 통하여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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