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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에서 확신으로, ‘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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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222회 작성일 15-04-19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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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에서 확신으로, ‘도마’

요20:24~29

2015. 4/19. 08:00, 11:00

가장 위대한 발명품

 미국의 한 유명한 잡지사가 저명인사 100여 명에게 물었다. ‘지난 2천년 동안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여러 대답이 나왔다. 전기, 자동차, 비행기, 컴퓨터, 민주주의 등.......여러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런데 더글러스 러시코프(D. Rushkoff)라는 언론 학자가 매우 인상적인 대답을 했다. 그의 답은 ‘고무지우개’였다. 그리고 그는 거기에다 컴퓨터의 ‘delete키’, ‘화이트’(수정액, 수정테이프), ‘헌법의 수정조항’을 덧붙였다. 즉 인간의 실수를 수정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그는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으로 꼽고 싶다고 말했다. 참으로 기막힌 대답이라 생각한다. 만약 우리의 삶과 역사에 잘못된 것들을 지우고 다시 시작하게 하는 지우개와 같은 것이 없었다면, 과연 오늘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예수님이야말로 우리 인생의 지우개시다. 우리의 허물과 죄를 다 지워주신 것을 비롯하여, 우리의 슬픔과 고통, 아픔, 비참함, 불행과 실패와 실수 등 모든 것을 깨끗이 지워주시는 지우개시다. 그리고 새롭게 다시 시작하도록 하시는 분이시다. 특히 주님의 부활은 사망의 권세를 깨끗이 지우고, 생명으로 다시 출발하게 하신 사건이다. 제자들의 실패와 좌절을 깨끗이 지우시고, 우리가 모인 이 교회라고 하는 신비한 공동체를 탄생하게 하신 사건이다. 지난 주일에는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한 것으로 인한 자책감, 그 자책감으로 인한 자격지심, 제자로서의 자존감을 상실하고 옛 생활로 도망친 베드로의 어두운 과거를 다 지우시고 새롭게 출발하게 하신 주님에 대하여 은혜를 나눴다. 오늘은 그 주님께서 도마의 불신과 의심을 지우시고 확신으로 새롭게 하신 말씀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려고 한다.

 

의심쟁이 제자, 도마

본문은 도마의 부활 체험기다. 도마는 갈릴리 출신 어부로 ‘디두모’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헬라어로 ‘쌍둥이’라는 뜻이다. 도마 역시 ‘쌍둥이’라는 뜻의 아람어다. 그래서 도마는 별명이고 그의 본 이름은 ‘유다’라고 한다. 유다는 당시 유대사회에서 흔한 이름이었다. 제자들 중에도 ‘가룟 유다’, ‘야고보의 아들 유다’, ‘유다 도마’ 이렇게 유다가 3명이나 있었다. 때문에 서로 구별하기 위하여 유다라는 이름대신 쌍둥이란 뜻의 별명 도마를 사용한 것이고, 아람어를 모르는 사람을 위해여 헬라어로까지 설명한 것이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는 이름만 기록되어 있고, 요한복음에만 세 번의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실 도마는 주님께 매우 충성스러운 제자였다. 그런데 그가 우리에게 유명한 것은 믿음이나 충성 때문이 아니라 ‘의심’ 때문이다. 우리 찬송가 가사에도 나오듯 그는 대부분 사람들에게 ‘의심 많은 제자’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 그에게 이렇게 ‘의심쟁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붙여지게 된 것은 본문에서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25)고 말한 것 때문이다. 하지만 의심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의심한다는 것은 바르게 알고 싶어 하는 합리적 정신의 표현이고, 진리를 깨닫는 길이다. 오히려 정직한 회의, 건강한 의심은 맹신이나 광신에 빠지지 않게 하고, 건강한 신앙으로 자라게 한다. N. 스캇 팩은 「아직도 가야할 길」에서 ‘믿음은 이성적 회의를 통해 온전한 믿음에 이르게 된다.’고 했다. 어거스틴도 ‘신자는 믿으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믿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서 물음표는 매우 중요하다. 아무튼 도마는 의심병이 심한 우리의 좋은 모델이다. 그는 우리처럼 의심하면서 믿었고, 믿으면서 의심했다. 의심과 믿음이 교차되는 가운데서 주님을 따랐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그의 쌍둥이 형제(자매)가 곧 우리다.

 

고립은 신앙생활의 독이다.

이렇게 합리적 정신을 가진 도마는 다른 제자들이 전한 주님의 부활소식을 그대로 수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확인하고 체험하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25). 이렇게 자신이 확인하고 체험한 사실만 믿겠다는 점 때문에 그를 ‘실증주의자’라고도 한다. 아무튼 10명 제자들의 증언에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것을 보아 그는 분명 지독한 실증주의자다. 10명이 그렇다고 하면 적당히 따라줄 만도 한데, 그것도 3년이나 동고동락했던 동지의 증언인데도 단호히 거부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직접적인 확인과 경험을 강조했다. 사실 저는 도마의 이런 점이 마음에 든다. 진리의 문제, 생명의 문제는 다수의 문제 체면의 문제가 아니다. 지극히 개인적(인격적)이고 경험적(체험적)인 문제다. 확신의 문제다. 다수가 주장한다고 하여 적당히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다른 사람은 모두 부활의 주님을 만나서 부활의 기쁨과 생명, 은혜를 누리고 있는데, 도마 혼자만 여전히 무덤 속을 거닐고 있었다. 사망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한 것인가? ‘주님께서 오셨을 때에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24). 홀로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이 찾아오셨지만 홀로 만나지 못한 것이다. 함께 하지 못함 때문에 홀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했고, 이것이 그를 의심쟁이로 낙인이 되게 했다. 지체들과 함께 하는 것이, 은혜의 자리에 함께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실감하게 한다. 활활 타오르는 불속에서는 강한 쇠도 달궈져서 녹아내리지만 벌겋게 달궈진 쇠라도 홀로두면 금방 식어버린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고립은 신앙생활의 독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의심에 빠진 그를 개인적으로 찾지 않으시고 다른 제자들과 함께 모일 때까지 여드레를 기다려 그를 만나기 위해 찾아오신 것도 주목해야 한다. 다른 지체들과 ‘함께’ 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또한 여기에는 ‘주일’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여드레 후는 지금 우리의 셈법으론 다음 주 월요일이다. 주님이 첫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 첫 부활주일이었으니까 그로부터 8일이면 월요일이다. 하지만 당시 유대인 셈법으로는 주일이다. 우린 다음 날부터 하루로 계산하지만 유대인은 당일을 하루로 계산한다. 주일로부터 여드레니까 다음 주일이 된 것이다. 아직 교회가 탄생하지도 않았는데 주님은 벌써 주일모임, 곧 주일예배를 강조하신 것이다. 요즈음 우리나라에서도 부분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카풀라인(carpool line)이라는 것이 있다. 교통정체를 해소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두 사람이상 탄 차만 다닐 수 있는 차선이다. 그래서 막힌 도로에선 차를 혼자 타고 가는 사람보다 함께 타고 가는 사람이 훨씬 빨리 간다. 신앙생활도 함께 하는 곳에 주님이 찾아오시고, 함께 가는 길에 주님이 동행하신다. 그래서 함께 기도하고, 함께 전도하고, 함께 찬양하고, 함께 예배하고, 함께 교제하고, 함께 섬기는 ‘함께’를 강조한 것이다.

 

믿는 자가 되라!

주님은 첫 번째 이후 여드레 만에 또 제자들을 찾아오셨다. 그때는 ‘도마도 거기 함께’(26) 있었다. 사실 이 두 번째 찾아오심은 직접 확인하고 체험하지 않고는 주님의 부활을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한 도마를 위한 것이었다. 그를 ‘믿음 없는 자가 아니라 믿는 자’(27)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보고만 믿는 믿음이 아니라 보지 못하고도 믿는 복된 믿음’(29)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주님이 찾아오신 것이다. 이것은 우리 기독교의 중요한 특징이다. 도마가 주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주님이 먼저 도마를 찾아오신 것이다. 우리 기독교는 ‘찾아가는’ 종교가 아니라 ‘찾아오는’ 종교다. 우리가 주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주님이 범죄한 우리, 실패한 우리, 실망하여 낙심한 우리를 먼저 찾아오셨다(요3:16, 롬5:8). 탐구하고 연구해서 스스로 알아가는 종교가 아니라 열어주고 보여주어야 알 수 있는 계시의 종교다. 지난 주일에도 주님은 자격지심 때문에 제자의 삶을 포기하고 옛 생활로 돌아간 베드로를 친히 찾아오셔서 회복하여 다시 출발하도록 하셨다. 본문에서는 다른 제자들의 증언을 거부하며 직접 확인과 경험을 고집하는 도마를 찾아오셨다. 그러면서 주님은 그에게 직접 확인하라고 못 박힌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주셨다. 손에 난 못 자국과 옆구리에 난 창 자국을 본 그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외쳤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8).

 

그 동안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아 홀로 고립되어 부활의 신앙을 갖지 못하여 부활의 영광과 생명, 승리를 누리지 못했는데, 이제 부활의 주님을 만나 부활의 신앙을 갖게 되었다. 의심을 극복한 확신의 사람이 되었다. 믿음의 사람이 되었다. 물론 성경에서는 이후 그의 삶에 대하여 침묵을 하고 있기에 정확한 것을 알 수 없으나 초대교회시절부터 전해 내려온 전설과 「도마행전」(Acts of Thomas)에 의하면, 그는 이 확신으로 일생 부활의 신앙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었다. 주님의 지상 최후명령(행1:8, 마28:18~20)을 순종하기 위해 당시 ‘땅 끝’이라고 생각하던 페르시아와 인도로 가서 거기서 건축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다가 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날 남인도 교회의 아버지가 되었다. 심지어는 우리나라까지 와서 복음을 전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이것은 의심의 사람 도마가 부활의 주님을 만난다음 확신의 사람이 되어 이렇게 놀라운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는 뜻이다. 부활의 신앙이 얼마나 놀라운가를 잘 보여준다.

 

부활신앙의 주인공으로 살자!

부활신앙은 부활이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마28:18) 주님이 우리 안에서 살아계신 것이다. 그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활의 생명, 부활의 영광, 부활의 소망, 부활의 기쁨을 주신다. 그래서 부활의 생명이 있기에 더 이상 사망이 주관하지 못하고, 부활의 영광이 있기에 세상 영광을 구하지 않고, 부활의 소망이 있기에 땅의 것에 소망을 두지 않게 되는 것이다. 부활의 기쁨이 있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고, 빼앗기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절대 기쁨, 절대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히11:35).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히11:38).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말씀이다. 저와 여러분이 이 부활신앙의 주인공이다. 아직도 이 세상은 죽임의 문화가 가득하고, 죽임의 세력이 득세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담대한 부활신앙인이 되고, 주님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믿고 증언하는 부활의 증인으로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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