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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용서, 그렇지만 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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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25,051회 작성일 16-04-17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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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용서, 그렇지만 용서

마18:21~35

2016. 4/16. 11:00

불편한 용서

목사님들이 불편해 하는 설교가 세 가지 있다. 헌금에 대한 설교와 전도에 대한 설교, 그리고 용서에 대한 설교다. 나 같은 경우는 그 중에서도 용서에 대한 설교가 가장 불편하다. 용서에 대해서는 나 역시 실천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부분이고, 실천하지도 않으면서 설교를 한다는 것은 불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관계가 불편한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고, 이런 사람들 앞에서 용서에 대한 설교를 하는 것은 불에 기름을 뿌리는 격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용서는 설교를 하는 나에게도 듣는 여러분에게도 불편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불편한 설교를 왜 하느냐? 그것은 구역공과순서에 따르다보니 이렇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제목도 ‘불편한 용서, 그렇지만 용서’라고 했다. 불편해도 용서는 우리가 살아가는데, 특히 신앙생활을 하는데, 꼭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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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날마다 일에 부대끼고, 사람에 부대끼며 살고 있다. 때문에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며 살고 있다. 이런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용서하는 것이다. 가정에서도 용서, 직장에서도 용서, 교회에서도 용서, 일상생활에서도 용서가 필요하다. 그래서 어느 시인이 이런 말을 했다. ‘산다는 것은 가슴에 촛불을 켜는 일이며 촛불을 켜되 반드시 용서의 촛불을 켜야 한다.’ 여러분의 가슴에 용서의 촛불이 켜져 있는가? 주님은 용서의 왕이시고, 주님의 나라는 용서의 나라다. 용서는 주님의 자녀인 우리가 살아내야 할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다.

 

용서의 이유

본문은 용서에 대한 유명한 말씀이다. 본문은 용서의 횟수에 대한 베드로의 질문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21). 당시 유대교에서는 3번까지 용서해 주라는 것이 일반적인 가르침이었다. 이에 대해 베드로는 주님께 7번 정도 하면 되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주님의 대답은 7번씩 70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하셨다(22). 이는 ‘끝까지’ 용서하라는 뜻으로, 주님이 용서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시는 지를 보여주는 말씀이다. 그러면서 왜 끝까지 용서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비유로 설명하셨다(내용 설명은 생략). 그리고 이 비유를 통하여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누군가에게 내가 더 용서받지 못할 사람일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항상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자기중심적으로 말하고, 자기중심적으로 행동을 한다. 그래서 자신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는 생각보다는 자신이 받은 상처만 생각하며, 그 상처를 곱씹으며 분노를 키우는 경우가 많다. 용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용서해야 할 사람만 생각하고, 자신 역시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내가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보다 누군가에게 내가 더 용서받지 못할 사람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본문의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종의 비유가 바로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 종의 문제가 무엇인가? 자신이 왕에게 일만 달란트라고 하는 엄청난 빚을 탕감 받은 사실은 잊고, 자신이 받을 일백 데나리온만 생각한 것이다. 그가 그의 동료에게 받을 빚은 자신이 왕에게 탕감 받은 빚의 팔십오만 분의 일(1/850,000)에 지나지 않는다(한 데나리온은 금 3,9g이고 한 달란트는 금 34kg-약9,000돈-이다. 그러니 달란트는 데나리온의 약8,500배, 한 데나리온은 당시 장정 하루 품삯이고 한 달란트는 장정 20년 품삯에 해당). 그는 자기 동료보다 더 용서받지 못할 큰 빚을 진 사람이었다. 자기 동료보다 팔십오만 배나 더 많은 빚을 졌고, 그것을 용서받은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이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자기가 받아야 할 것만 생각하고 자신이 받은 것은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서 자기에게 빚을 진 동료를 그토록 모질게 굴었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다. 내가 받은 것은 기억도 하지 않으면서 받을 것만 기억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 자신이 용서받지 못할 더 많은 빚을 진 사람이라는 것, 그 많은 빚을 용서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용서의 사람이 될 수가 있다. 바로 이 점이 우리가 살면서 용서해야 할 첫 번째 이유다. 우리가 이 사실을 자꾸 잊기 때문에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다.

 

둘째, 주님은 내 판단의 잣대로 나를 판단하신다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 프로크루스테스라는 노상강도가 나온다. 그는 아티카라는 지방에 살면서 자기 지역을 지나가는 나그네를 붙잡아 결박하여 자신의 쇠 침대에 뉘였다. 그래서 나그네의 키가 침대보다 크면 그 길이대로 잘라서 죽이고, 작으면 침대 길이만큼 늘려서 죽였다. 소위 ‘프로크루스테스 침대’(procrustean bed)라는 신화인데, 자기 생각과 자기 기준에 맞추도록 다른 사람을 강요하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어떤 기준을 설정하고 모든 것을 거기에 맞추도록 획일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가? 테세우스라는 영웅에게 붙잡혀 그동안 그가 했던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죽임을 당했다. 이런 것을 두고 자승자박(自繩自縛), 혹은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고 한다. 자기 판단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은 자신 또한 그렇게 반드시 보응을 받는 법이다.

 

 

본문에서도 왕은 자기 동료를 용서하지 않은 종을 다시 잡아다가 옥에 가뒀다(34). 자신은 많은 빚을 탕감 받았으면서도 자신에게 적은 빚을 진 동료를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32,33). 이런 왕의 태도를 보고 한 번 용서한다고 선언했으면 어떤 경우에도 지켜야지 변덕스럽게 그것을 번복할 수 있느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서 동료를 용서하지 못한 종보다 변덕스러운 왕의 태도를 문제 삼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렇기 때문이 종이 더욱 신중하게 행동을 했어야했다고 말이다. 이 종이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은 용서를 했다가 그것을 다시 철회한 변덕스러운 왕 때문이 아니라 동료를 용서하지 못한 자기 자신 때문이다. 용서하지 못한 자기 자신이 자신을 감옥에 가두고 만 것이다. 용서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를 가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종의 모습을 보며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35). 우리가 형제를 용서해야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판단의 잣대로 우리를 판단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다. 만약 하나님께서 당신의 잣대로 우리를 심판하신다면 우리 중에 살아남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잣대가 아닌, 우리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잣대로 우리 각자를 판단하신다. 그래서 용서한 만큼 용서를 받고, 사랑한 만큼 사랑을 받고, 판단한 만큼 판단을 받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많이 용서할수록 많이 용서를 받고, 많이 사랑할수록 많이 사랑을 받고, 많이 섬길수록 많이 섬김을 받게 하신다. 많이 긍휼을 베풀수록 많은 긍휼을 입게 하신다. 이것이 우리가 서로 용서하며 살아야 할 또 하나의 이유다. 내가 행한 만큼 그대로 받기 때문이다.

 

용서는 성숙함의 표시다.

몇 년 전 미국 버지니아 공대에서 일어난 총기난사사건을 기억할 것이다. 우리 한국계 조희승이 저지른 끔찍함 범죄다. 그는 32명을 죽이고 자신도 자살했다. 그런데 버지니아 공대에서 열린 희생자 추모집회에서 조문자들은 희생자들과 조승희의 것까지 33개의 추모의 돌을 마련하고, 그 앞에 모였다. 그리고 조승희를 추모하는 돌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네가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으면 이런 일을 했겠니? 너를 이렇게 힘들게 한 우리 어른들과 이 사회를 용서해 주기 바란다.’ 하고 용서를 구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라고 고백한 것이다.

 

성숙함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먼저 용서를 구한 사람이 어른이고, 성숙한 사람이다. 우리도 아이들 사이에 불화가 생기면, ‘네가 형(혹은 언니)이니까 용서해라!’고 말한다. 용서는 힘이 있는 사람, 형(언니)이 하는 것이다. 성숙한 사람이 하는 것이다. 아니 성숙하니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간디는 ‘약한 자는 결코 용서 할 수 없다. 용서하는 마음은 강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특성이다.’고 했다. 역사에 이름을 크게 남긴 사람들의 특징은 크게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대표적인 분이 우리 예수님이시다(눅23:34). 화를 내고 보복하는 방식은 일반적으로 인간이 가장 쉽게 기계적으로 선택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상대에 대한 부정적 감정의 감옥에 자신을 가두는 방식이다. 바로 이 감옥에서 벗어나는 길이 용서다. 용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이다. 반면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 또한 용서다. 용서는 상대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나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또 다른 사랑이다. 한 번 용서하면 ‘자신’을 얻고, 두 번 용서하면 ‘사람’을 얻고, 세 번 용서하면 ‘세상’을 얻는다. 계속 용서하면 ‘영원’을 얻는다. 우리 모두 이 멋진 용서의 달인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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