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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는 부모의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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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007회 작성일 17-05-07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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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는 부모의 거울

잠22:1~6

2017. 5/7. 11:00

역사는 반복된다.

학교 선생님이 어느 학생에게 시험 성적이 좋지 않아 아버지를 학교에 모시고 오도록 했다. 그래서 그 학생의 아버지가 학교에 왔다. 그리고 선생님과 대화를 했다. 선생님은 역사를 가르치는 분이었는데, 이 아버지는 아들의 성적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선생님에게 물었다. ‘선생님, 그래도 제 아들이 선생님이 가르치시는 역사 과목은 다른 과목에 비해 곧잘 하지요?’ 그러자 선생님은 학생 아버지의 물음에 대답대신 오히려 이렇게 되물었다. ‘아버님은 학교 다니실 때 역사 과목이 어떠셨나요? 잘하셨나요?’ 그러자 아버지가 쑥스러운 듯이 ‘그게 그리 썩 잘하지는 못했습니다.’고 대답했다. 이에 대한 선생님의 말이 걸작이었다. ‘아버님, 역사는 반복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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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역사가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역사에서 배운 가장 큰 교훈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과거의 역사를 통해 아무 것도 배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역사를 잊고 산다는 것이다. 역사는 거울과 같다. 자주 들여다보며 잊지 않고 기억해야 오늘을 올바르게 살 수가 있는 것이다. 역사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않는다는 것은 역사를 모른다는 것, 곧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러니 과거의 실패를 오늘의 역사에서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자녀교육에도 적용할 수 있다. 주변에 자신의 뼈아픈 과거를 자녀에게 고스란히 되물림하는 부모가 많다. 나도 그 중에 한 사람이다. 그 이유는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돌아보지 않기 때문에 자녀의 삶에서 그대로 반복이 되고 있는 것이다. 자녀는 부모의 거울이다. 자녀의 모습을 보면 부모의 삶이 보인다. 물론 이것이 좋은 것이라면 이보다 다행스러운 일은 없겠지만 대개의 경우는 부정적인 것이 더 많다. 오늘이 어버이 주일인데, 최소한 우리 교회에서 만큼은 부모가 자신의 삶을 진지하고 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신 자녀를 어떻게 하면 신앙적으로 올바르게 기를 것인가를 고민하는 날이 되었으면 한다.

 

활(弓) 교육론

여러분, 활 쏴봤는가? 나는 어려서 활쏘기가 중요한 놀이였다. 그렇다고 양궁선수였다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가 만들어준 활에 대나무로 만든 화살촉을 수수대나 신우 대나무에 끼워서 활쏘기를 하면서 놀았다. 그러다 가끔 남의 닭을 쏴서 닭 값을 물어주기도 하고, 때로는 눈 먼 새를 명중시켜 잡기도 했다. 친구들 사이에서 괜찮은 소년 궁수(弓手)로 통했다. 잘 알겠지만 활을 쏘려면 쏠 곳(표적)을 똑바로 보고 활과 화살을 잘 잡고 화살을 잡아당겨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화살이 날아가는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화살이 아니라 활을 잡은 손이다. 활을 잡은 손이 화살의 방향을 결정한다.

 

활을 잡은 손

여기에 자녀교육의 중요한 원리가 있다. 성경은 자녀를 ‘장사 수중의 화살’(시127:4)에 비유하고 있다. 고대전투에서 활은 칼이나 창과 함께 중요한 무기였다. 그러니 전장을 누비는 전사에게 전통(箭筒)에 가득한 화살은 자신의 목숨을 지켜주는 든든한 존재였다. 부모에게 있어서 자식이 이와 같다는 것이다. 활쏘기에서 자녀교육의 원리(일명 ‘활 교육론’)를 생각해 보려고 하는데, 먼저 활을 잡은 손에 의해서 화살의 날아가는 방향이 결정된 것처럼 소중한 자녀의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 부모의 손에 달렸다는 것이다. 여기서 더 깊이 들어가면 부모의 손을 붙잡고 있는 ‘보이지 않는 손’에 달렸다. 그리고 이 보이지 않는 손은 부모의 가치관이고, 성도에겐 신앙관이다. 아무튼 이는 자녀에 대한 부모의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요즈음 우리의 현실을 보면 부모가 이 소중한 책임을 학교 선생님이나 학원 선생님, 신앙교육의 경우는 교회학교 선생님에게 떠맡기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을 전문용어로 표현하면 ‘외주하청자녀교육’이다. 우리는 자녀교육도 외주하청을 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세계에서 자녀교육열이 가장 높은 민족이 유대인과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데 유대인과 우리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우리는 자녀교육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있지만 유대인은 부모가 직접 책임을 진다. 화살의 방향을 결정짓는 활을 잡은 손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활은 한 손으로 쏠 수가 없다. 양 손이 다 필요하다. 한 손으론 표적을 향해 흔들리지 않도록 활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론 화살을 잡아당겨야 한다. 자녀교육 또한 어느 한 쪽의 책임이 아니다. 부모가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한 손에 모든 책임을 떠맡기고 있다. 자녀교육은 어머니가 맡고, 아버지는 가정의 경제력을 담당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아버지들이 일중독으로 가정보다는 회사를, 자녀보다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돈이 있어야 가정도 지키고, 자녀교육도 가능하다는 논리에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가 ‘기러기 가족’이라는 정말 비교육적인 상황을 만들고 있다. 더욱 한심한 것은 이렇게 가족이 떨어져 외국까지 가서도 결국은 외주하청으로 자녀교육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히브리어로 아버지를 ‘아브’(אב)라고 한다. 여기에는 크게 네 가지의 의미가 있다. 공급자(Supplier), 보호자(Protector), 인도자(Guider), 교육자(Instructor)다. 이는 가정에서 아버지의 역할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아버지의 역할이 회복되어야 자녀교육도 회복될 수가 있다.

 

표적을 향해 쏴라!

또한 정확하게 표적을 바라보아야 한다. 목표가 없이 허공에 쏘아올린 화살은 재앙이 될 수가 있다. 실제로 조카가 허공에다 쏜 화살이 밭일을 하고 있던 아버지의 어깨에 내리꽂힌 일이 있었다. 다행이 화살촉이 예리하지 않아 깊은 상처는 면했다. 우리 주변에 허공에 쏘아올린 화살과 같은 아이들이 많다. 결국 이들이 청소년 문제의 주범이 되어 가정과 사회의 문젯거리가 되고 있다. 그래서 본문 6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모든 사람에게는 일생 걸어가며 지켜야 할 마땅한 길이 있는데, 그 길을 한 평생 바르게 걸어가기 위해서는 어릴 때의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부모는 자녀가 어릴 때 올바른 방향(표적)을 잡아 활시위를 당겨주어 평생 그 길을 가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부모의 사명이다.

 

대영박물관에 작은 새의 발자국이 새겨진 강철처럼 단단한 화석이 있다. 지금은 코끼리가 밟아도 흠도 생지지 않는 단단한 돌이지만, 이 돌도 한 때는 작은 새가 밟아도 발자국이 생길 정도로 물렁물렁했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작은 새의 발자국이 새겨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단단한 돌이 된 것이다. 자녀교육(특히 신앙교육)도 자녀의 마음이 굳어지기 전에 좋은 자국을 남겨주어야 한다. 그러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않게 된다. 그래서 본문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6)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마땅히 행할 길’이란 무엇일까? 사실은 잠언 전체의 내용이 여기에 속한다. 더 넓게 보면 성경 전체가 곧 마땅히 행할 길이다. 하지만 범위를 좁혀서 가깝게 보면 본문 1~5절이다.

 

1절에,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고 했다. 금은보화보다 명예와 은총을 택해야한다는 것이다. 이는 부자가 되는 것보다 더 가치 있고 중요한 일이 있음을 상기시키는 말씀이다. 그것은 ‘명예’와 ‘은총’이다. 여기서 은총이란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듣는 것’을 뜻한다. 재물을 많이 모으고,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고, 권세를 부리는 힘 있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들을 수 있는 명예로운 사람이 되도록 가르치라는 것이다. 재물이나 지위나 권세는 안개와 같지만 명예로운 평가는 끝까지 함께 한다. 그리고 이 명예로운 평가를 얻는 비결이 2절이다.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함께 살거니와 그 모두를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 이는 물질적 빈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은 동등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가난한 자의 삶이든 부한 자의 삶이든 다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다는 뜻이다. 모두가 하나님에 의해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부하다고 하여 하나님을 잊어버려서는 안되고, 가난하다고 하여 하나님을 등져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결국 이 말씀은 자신이 처한 환경에 상관없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 하나님을 섬기는 삶,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어떤 상황에서도 명예를 지킬 수 있는 비결이고, 또한 명예로운 평가를 얻는 비결이다(3~5). 그러므로 부모는 참으로 영광스러운 삶이 어떤 것인지, 정말 부요한 삶이 무엇인지, 무엇이 고귀한 삶인지에 목표를 두고 자녀를 가르쳐야 한다. 그러면 늙어도 그 길을 떠나지 않게 된다.

 

가르친다는 것

가르친다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중에 ‘야라’(ירה)라는 단어가 있다(이 단어에서 부모를 뜻하는 ‘호라’הורה, 선생을 뜻하는 ‘모라’מורה, 이른 비를 뜻하는 ‘요라’יורה가 나옴, ▶부모는 곧 스승과 같은 존재이고, 생명을 약동하게 하는 이른 비와 같은 존재라는 뜻). 이는 ‘인도한다.’ ‘앞서가면서 따라오게 한다.’는 뜻이다. 가르친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전달이 아니라는 것이다. 먼저 본을 보이는 것이 가르치는 것이다. 한자에서도 가르치는 사람을 ‘선생’(先生)이라고 한다. 단순히 먼저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먼저 태어나서 앞서 가는 사람을 뜻한다. 그러므로 가르친다는 것은 먼저 실천해 보이면서 따라오게 하는 것이다. 특히 자녀의 신앙교육은 더욱 그렇다.

 

신앙교육은 부모가 먼저 보여주어야 한다. 기도에 대하여 말하는 것보다 부모가 먼저 기도하는 것이 효과적으로 기도를 가르치는 것이다. 힘들고 어려울 때, 문제가 있을 때마다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자녀도 그대로 하게 된다. 감사도 마찬가지다. 부모가 먼저 말씀 앞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자녀를 말씀의 사람이 되게 하는 비결이다. 부모가 찬양하면 자녀 또한 찬양하게 된다. 섬기고, 봉사하고, 전도하는 것을 보면 그들도 닮게 된다. 반면 주일성수보다 직장이 우선이고, 예배보다 사람 만나는 것이 우선이고, 그저 남은 시간으로 주님을 섬기고, 남은 돈으로 헌금하는 모습을 보이면 자녀는 신앙을 옵션으로 생각하게 된다. 아무튼 참된 교육은 기계적인 지식전달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이다. 그러니 이 일은 한 공간에서 생활하며 보여주는 부모 외에는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본을 보이면서 가르칠 때 그토록 우리가 꿈꾸는 모세와 같은 사람, 사무엘과 같은 사람, 세례요한과 같은 사람이 우리 자녀들 가운데서 일어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사람에게 명예로운 평가를 받은 하나님 앞에 큰 인물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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