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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귀를 통과한 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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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5,754회 작성일 23-06-11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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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귀를 통과한 부자

19:1~10

2023, 6/11. 11:00(성령강림 후 둘째 주일

결핍에 갇힌 사람

현대는 풍요의 시대다. 물질을 비롯하여 지식, 기술, 기회, 직업 등 모든 것이 풍요한 시대다. 역설적으로 풍요 속의 빈곤, 혹은 풍요시대의 결핍이 현대의 특징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누군가가 그 풍요를 더 많이 가진 가지고 있기에 느낀 결핍의식이다. 상대적 박탈감에 오는 결핍의식이다. 실제로 현대인은 많은 결핍을 가지고 있다. 공감결핍을 비롯해서 애정결핍, 관계결핍, 가치나 가치관의 결핍, 코로나시기를 거치면서 더욱 심화된 접촉결핍이 그것이다. 어떤 분은 현대의 또 다른 특징으로 결핍의 결핍시대라고도 했다. 자신에게 부족한 것, 다시 말하면 자신에게 진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시대라는 것이다. 하여간 이 모두를 종합해 보면, 인간은 결핍의 존재라는 것이다. 본문에도 물질적인 것은 부족한 것이 없는데 마음의 결핍, 영적 결핍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이 나온다. 삭개오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삭개오는 세리장이요 부자’(2)였다. 당시 로마정부는 정부 서비스와 인프라를 위해 속국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했다. 이 일을 담당할 징수원(세리)의 자리를 입찰로 결정했는데, 돈을 가장 많이 지불한 사람에게 낙찰이 되었다. 일단 징수원의 자리만 확보하면 돈을 버는 것은 시간문제였기에 많은 돈을 주고라도 그 자리를 얻으려고 했다. 로마는 징수할 세금 할당량을 주고, 얼마를 걷든지 제한을 두지 않았다. 그러니 할당량만 로마정부에 납부하면 나머지는 징수원의 것이었다. 과다한 세금을 걷어 할당량만 납부하고 나머지로 자기 배를 불리니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그래서 당시 유다사회에서 세리는 면허증 가진 강도로 불리었고, 누구도 접촉을 꺼리는 불가촉천민과 같은 죄인의 대명사였다. 삭개오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세리장이란 이유로 강도로 반역자로 낙인이 찍힌 사람이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에게 거절당했다. 세리장이고 부자였으나 모두가 그를 경멸했다. 그럼에도 그는 이에 개의치 않고 나름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지위와 돈으로 결코 채울 수 없는 공간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새로운 결핍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영혼의 결핍이다. 결국 그는 또 다른 결핍에 갇히고 만 것이다. 이렇게 영혼의 결핍과 더불어 거절감에 시달린 그가 예수님을 만나 회복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 본문이다.

 

주님은 거절당한 사람에게 매력적이었다.

본문은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여행 중에 일어난 사건이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에서 동북쪽으로 약 36떨어진 국경도시다. 요단계곡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관문으로, 무화과와 종려나무가 많은 부유한 도시다. 이곳을 지나가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1,2). 주님은 이미 3년 동안 사역을 하셨다. 그의 명성은 전국에 퍼져있었다. 죽은 자를 살리고, 물 위를 걸으며, 한 소년의 점심으로 수천 명을 먹이셨다는 등등. 그 주님이 여리고를 지나게 되셨다. 그러니 온 도시가 주님을 보기 위해 나왔다. 거리가 막혔다. 이 소식을 삭개오도 들었고, 그 역시 주님을 보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 그런데 사람이 너무 많고, 그는 키가 작아서 주님을 볼 수가 없었다(3). 그렇지만 그는 여기서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앞으로 달려가서 주님이 지나가시는 길목에 서있는 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4). 주님을 보고자하는 열정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아이도 아니고 어른이, 그것도 사람들에게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람이 나무로 올라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는 결단이다. 그렇지만 주님을 보고자하는 절실함이 너무 커서 자신의 지위도 거절하는 사람들도 하등의 문제가 되질 않았다.


 

우린 여기서 주변 사람들에게 거절당한 삭개오에게 주님이 어떤 분이셨는지를 잘 알 수가 있다. 주님은 정말 보고 싶은 분, 만나고 싶은 분, 그래서 자신의 속사정을 다 떨어놓고 울고 싶은 분, 더 나아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으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거절당한 삭개오가 나무에 올라가서라도 보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분이셨다는 것이다. 사실 복음서를 보면 삭개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주님을 보고 싶어 했다. 분문에서도 많은 여리고 사람이 주님을 보고자 길을 메웠다. 그리고 여리고를 들어오는 길에 한 바탕 이 소동을 겪었다. 소경 바디매오가 길가에서 구걸을 하다가 주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큰 소리로 주님을 불러 주님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18:35~43). 이것이 주님의 놀라운 점 중 하나다. 삭개오나 바디매오처럼 세상과 사회로부터 거절당한 사람들이 주님을 좋아했다. 주님을 보고 싶어 했고, 만나고 싶어 했다. 그 이유는 다른 사람에게서 받지 못한 사랑을 주님께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 우리 교회는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할까특히 힘들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보고 싶은 사람, 만나고 싶고, 마음을 터놓고 울고 싶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문제가 있을 때마다 달려가 함께 의논하고 싶고, 기도를 부탁하고 싶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런 교회가 되어야 한다. 매력적인 사람, 매력적인 교회가 되어야 한다. 

 

 

주님은 거절당한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셨다.

이심전심이었을까? 삭개오가 올라간 나무 밑에서 주님께서 걸음을 멈추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기뻐하며 영접하더라.’(5,6). 주님은 길을 메운 사람들 틈에서 삭개오가 나무에 올라간 지 어떻게 아셨을까? 그의 이름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주님은 이미 알고 계셨던 것처럼 나무아래서 발걸음을 멈추셨고, 나무를 쳐다보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본문을 묵상해 보면, 삭개오보다 주님께서 더 그를 만나고 싶었던 것 같다. 심지어 그를 만나기 위해 여리고를 지나가시게 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수가 성의 여인을 만나기 위해 일부러 한 낮에 사마리아를 통과하셨던 것처럼 말이다. 사실이 그렇다. 주님은 찾아오시는 분이다. 문제가 있는 사람에게 찾아오시고, 문제 속으로 찾아오신 분이다. 그래서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해결자다. 이것이 성경이 일관되게 보여주고 있는 주님의 모습이다. 본문에서도 삭개오는 주님을 보고자 하되’(wanted to see), 주님은 그에게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must stay at your house)고 하셨다. 그는 주님을 보려고만 했는데 주님은 그의 집을 방문하여 머물겠다고 하셨다(wantmust 차이). 주님이 더 적극적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 이는 주님의 관심을 보여준다. 

 

 

본문에 이와 같은 주님의 관심()을 잘 보여주는 말씀이 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0).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9:12,13). 이 역시 같은 의미의 말씀이다. 사실 주님은 삭개오처럼 많은 사람으로부터 부정적인 평판을 가진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셨다. 그래서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주님을 이렇게 비난했다.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7:34). 앞에서 말했지만 누구도 올바른 존재로 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만나기조차 꺼리는 당시 사회에서 불가촉천민과 같은 사람들을 친히 찾아가서 만나고, 먹고, 마시고, 친구가 되어 주셨다. 오히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9)고 선언하셨다. 이처럼 주님은 거절당한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셨다. 때문에 일부러 찾아가 만나주시기도 하고, 발길을 멈춰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기도 하고, 당시 사회적 혹은 종교적인 금기의 선()들을 넘나들며 어울리며 친구가 되어주시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 역시 아브라함의 자손, 곧 택하신 자녀인 것을 확인시켜주셨다. 

 

 

이와 같은 주님의 태도와 삶은 우리의 시각과 관점, 그리고 삶에도 중요한 도전을 준다. 우리는 누구에게 매력을 느껴야 할까? 교회는 어떤 사람에게 매력을 가져야 할까물론 모든 사람이다. 그렇지만 주님처럼 사회로부터 사람들로부터 거절당한 사람들에게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한다. 주님은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 대접한 것에 대한 상도 잃지 않는다고 하셨다. 이를 사소한 선행도 기억하신다는 뜻으로 대부분 이해하고, 또한 해석한다. 그러나 어려운 이웃을 잘 챙기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힘 있는 사람, 세력이 있는 사람, 무엇인가 가진 것이 많은 사람에겐 값지고 귀한 것도 아낌없이 주고, 경쟁적으로 주려고 한다. 그런데 힘없는 사람, 별 볼일 없는 사람은 하찮은 것도 아까워서 못준다. 냉수 한 그릇도 선뜻 베풀기가 어렵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사람에게 먼저 관심을 가지라는 것이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삭개오는 당시 사회에서 누구도 만나기를 꺼려한 사람, 거절당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주님은 그의 이름을 다정히 부르시며 그의 집을 방문하시겠다고 했다. 우리 또한 거부당했다고 느끼는 이런 사람에게 매력을 느껴야 한다. 이것이 주님의 뜻이고, 주님의 뜻을 이루는 비결이다.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

이처럼 삭개오의 주님을 보고자하는 작은 열망이 주님과의 관계에 다리가 되었고, 주님은 그 다리를 통해 그에게로 달려가셨다. 그리고 함께 그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주님을 만나서 주님과 함께 하자 그의 눈이 열리고, 관점이 바뀌었다그래서 그 역시 주님처럼 그 동안 그에게 상처를 받은 사람들, 거절당한 이웃이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는 그동안 온갖 욕을 먹고 비난을 받으면서 열심히 모았던 재물로 상처를 배상하고,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주었다. 그리하여 눅18장에서, 제자들도 깜짝 놀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는 주님의 말씀을 넘어서는 복을 누리게 되었다(9). 다시 말하면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가 된 것이다. 그의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나지만 틀림없이 그는 이후 거절당한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주님을 만나,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사람이다. 주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도 바르게 지낼 수 있도록 요청을 받고 있다. 지독한 왕따 인생을 살고 있던 삭개오에게 매력적이었던 주님처럼 우리와 우리교회 또한 주변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 주님께서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유독 삭개오에게 매력을 가지시고 그의 이름을 부르시고 만나시고 그의 집에 머무셨던 것처럼 우리와 우리 교회 또한 이런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찾고 만나고 섬겨야 한다. 그리하여 천국의 문이 바늘귀처럼 좁게만 여겨지는 사람들에게 천국의 문이 고속도로처럼 활짝 열리도록 해주어야 한다. 이 때문에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고, 이를 실천하는 것이 주님의 뜻을 이뤄드리는 성도와 교회의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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