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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능력, ‘치유하는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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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349회 작성일 25-07-20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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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능력, ‘치유하는 말씀

4:20~22

2025. 7/20 11:00(성령강림 일곱 번째 주일)

성경과 건강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성경과 관련된 특이한 연구가 실려 많은 사람을 놀라게 한 적이 있다. ‘성경묵상이 현대인의 스트레스를 해소한다.’라는 제목이었는데, 하버드 의대 교수인 허버트 벤슨(Herbert Benson)이 자신의 환자들을 관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었다. 그는 심한 스트레스로 심장에 이상이 생긴 환자를 많이 맡았는데, 그중 몇 사람에게서 급격히 증상이 좋아지는 현상이 발견되었다. 그들의 생활을 분석한 결과 하나님의 말씀 묵상이 원인이라고 생각하게 된 교수는 미시간 대학교의 심리학 교수인 스티븐 카플란(Stephen Kaplan)의 도움을 받아 본격적으로 연구를 했고, 성경을 읽으며 묵상하는 환자들이 누리는 치유효과는 상상 이상이었다. 이들의 연구에 따르면 성경을 묵상하는 사람은 아스피린이나 소화제보다도 약효가 좋았고, 정신적 피로를 해소하는 효과가 특히 컸다. 특히 말씀을 묵상할 때 집중하는 정도에 비례해 그 효과도 좋아졌다. 말씀이 영혼과 몸을 치유하는 것이 단순한 느낌과 착각이 아닌 실제 과학적으로 입증이 된 것이다. 여러분도 말씀을 통한 이런 치유의 은혜를 풍성하게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요즈음 힐링’(healing)이란 말이 유행하고 있다. 처음에는 교회에서 사용되었는데, 이제는 일반사회에서 더 많이 사용하는 유행어가 되었다. 그만큼 우리네 사회가 병들어 있고 사회의 구성원인 사람들이 질병을 앓고 있음을 의미한다(비근한 예로, 국가 암 정보센터에 따르면 평균수명 81세까지 생존할 경우 암에 걸릴 확률이 36.2%/ 1985년도 10015명이 암으로 사망). 사실 현대사회는 과거보다 다양한 질병과 건강 문제가 더 많이 발생하고 있다. 이와 같은 질병의 원인은 우리의 생활양식, 환경, 식습관, 스트레스 등과 관련이 많고, 이러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병을 유발하고 있다. 이와 같은 우리의 형편과 연약함을 잘 아신 하나님은 스스로를 치료하시는 하나님’(여호와 라파יְהוָה רָפָא)라고 소개를 하셨다. 그래서 성경을 사람과 사회를 치유하는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오염된 환경과 죄 많은 세상에서 병든 몸과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건강한 상태로 회복되기를 원한다. 교회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일꾼이다.


 

말씀이 보약이다.

히브리어로 치유하다.’는 동사는 라파(רָפָא)라고 한다. 라파는 구약성경에 60회 넘게 나온다. 20:17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를 들으시고 아비멜렉 집안의 질병을 고쳐주셨다는 이야기에 이 단어가 처음으로 나온다. 이 동사의 명사형으로서 치유’(healing)를 의미하는 단어가 마르페(מַרְפֵא)인데, ‘건강’(health)이란 뜻도 있다.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22). 여기에 나온 건강이라는 단어가 라파의 명사형인 마르페로, 이 단어의 본래 뜻은 이다. 그러므로 실제로 이 구절은 이렇게 읽어야 한다.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육체에 약이 됨이니라.’. 그렇다면 무엇이 약이란 말일까? 바로 앞 구절에 그 답이 나와 있다.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나의 이르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말며 네 마음속에 지키라.’(20,21). 하나님의 말씀이 곧 약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에는 치유하는 능력이 있다.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면, 말씀은 몸에 있는 어떤 형태의 질병이나 연약함을 모두 없앨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 도다.’(107:20). 말씀이 치료의 약이라는 것을 삶으로 보여주신 분이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이시다. 복음서는 주님의 삶과 사역을 다양하게 보여주는 책들인데, 여기에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여러 질병에 걸린 사람을 친히 치료해 주시는 내용이 많이 나오고 있다. 그러면 어떤 사람에게 말씀이 보약이 될까?


 

내 말에 주의하며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20a).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중하고 지혜롭게 다루라는 뜻이다. 말씀을 잘 살펴 자신의 삶에 신중하고 지혜롭게 적용하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 성도에게 말씀은 단순한 지적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지혜로운 적용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최악의 말씀 공부는 말씀 그 자체에서 머무는 것이고, 최선의 말씀 공부는 말씀에서 말씀의 지혜와 능력을 얻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의 주어이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을 말씀답게 접근하여 묵상하는 사람은 단순히 말씀에서 정보만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삶의 주인이심을 확인하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게 된다. 치료는 그 결과다.


 

나의 이르는 것에 귀를 기울이라. 

나의 이르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20b). 이는 말씀을 지혜롭게 잘 다루는 방법이다. 여기서 귀를 기울이는 것은 경청’(傾聽)을 뜻한다. 듣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매우 중요한 태도다. 성경에 들으라는 표현이 자주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본다는 것이 소유하고 지배하겠다는 의지라면 듣는 것은 지배를 당하고 소유를 당하겠다는 의지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보는 자가 우월한 지위에 있었다. 왕 앞에서 조아리고 있는 신하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보는 자와 듣는 자의 위계가 분명해진다. 신앙적으로도 우리가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보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다. 그리고 어떻게 듣느냐에 따라 신앙의 질이 결정된다. 삶의 지혜는 듣는 데서 비롯되고, 삶의 후회는 대개 말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성도는 듣는사람이다. 자신의 소리를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웃의 소리를 듣는 사람이다. 그리고 무엇을 듣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듣느냐가 더 중요하다. 스펄전의 말이다. ‘우리의 마음이 준비만 되어 있다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의 설교를 통해서라도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신다.’ 말씀을 제대로 선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말씀을 듣는 자세가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말씀의 능력을 얻는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다. 말씀을 제대로 듣고 올바르게 반응하지 않기에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특히 치료와 회복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다. 가끔 하나님의 무응답에 불평하는 사람이 있다. 불평에 앞서 듣는 자로서 자신의 태도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전능하신 분이시고, 성경이 그 하나님의 말씀인데, 아무런 반응과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분명히 듣는 우리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말며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말며.’(21a). 말 그대로는 말씀에서 눈을 떼지 말라는 뜻이다. 항상 말씀을 바라보며 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어떻게 하루 종일, 그리고 일평생 말씀만 바라보며 살 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 말씀은 말씀 의식적으로든무의식적으로든 피하거나 흘려버리지 말고항상 예민하게 대처하고 순종하여 받아들일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 들은 말씀, 읽은 말씀, 배운 말씀을 잊지말고 기억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초점을 두고 사는 삶, 말씀을 가까이하는 삶을 뜻한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을 잘 기억하도록 여러 조치를 말씀하고 있다. 소위 쉐마라고 불리는 신6장에, ‘너는 또 그것을 네 손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8,9)고 하였다. 볼 때마다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더불어 자녀에게 집에 앉았을 때든지 길을 갈 때든지 누워 있을 때든지 기회있는 대로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했다. 이 역시 마찬가지다. 사실 가르치는 것보다 효과적으로 잘 기억하는 방법도 없다. 뿐만 아니라 옷 가장자리에 술을 달도록 했다(15:38~40). 한복으로 말하면 노리개와 같은 것이다. 이를 히브리어로 치치트’(ציצית)라고 하는데, 이는 율법을 상징한다(‘치치트의 숫자 값은 600+8가닥의 실+5매듭=613, 613은 율법의 조항 수). 이 모두가 말씀을 기억하게 하는 시각적 신호를 제공하는 기능을 한다. , 신앙적 정체성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방법으로 일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한 끊임없는 기억의 도구다. 아무리 훌륭하고 좋은 것도 기억하지 못하면 내 삶과는 무관하고, 삶과 연결되지 못하면 가치와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므로 삶과 연결이 되려면 지속적으로 상기시켜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본문이 말씀을 네 눈에서 떠나게 말라고 한 것이다.

 

네 마음속에 지키라.

네 마음속에 지키라.’(21b). 여기서 지키다.’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샤마르’(שָׁמַר)인데, 이는 지키다.’, ‘보호하다.’, ‘경계하다.’, ‘간직하다.’는 등의 뜻이 있다. 이 중에서 본문에 가장 어울린 것이 간직하다.’는 뜻이다. 이는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쌓아 두다.’, ‘숨기다.’는 뜻의 차판(צָפַן)과 같은 의미다. 그러니까 네 마음속에 지키라는 것은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하라는 것, 혹은 마음에 새기라는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묵상이라고 한다.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방법은 앞에서 소개한 세 가지다(주의하고, 귀를 기울이고, 눈에 떠나지 않게 하는 것). 이런 사람에게 말씀은 그 능력을 발휘하여 치료의 역사를 일으킨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말씀으로 자연과 역사를 다스리시고, 말씀으로 우리의 질병도 고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그 말씀대로 이루시는 분이시다(17:24). 이 능력은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예수님의 사역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는 말씀으로 살리셨고,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동안 병마에 시달리던 사람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말씀 한마디로 그를 고치셨다우리는 이 말씀의 능력을 믿는 사람이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서도 동일한 역사를 이루신다. 이 말씀이 우리의 삶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여 우리의 영혼뿐만 아니라 우리 육체의 연약한 것까지 치료하고 회복하는 능력을 경험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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