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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17회 작성일 26-05-03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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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3~16

2026. 5/3. 11:00(어린이 주일)

신발 수선공과 스펄젼

19세기 영국, 한 노신사가 신발 수선 가게를 들어갔다. 신발 수선공은 길가에서 울고 있는 한 아이를 발견하고 바쁜 와중에도 일손을 멈추고 그 아이를 가게 안으로 데려다가 따뜻한 우유 한 잔을 건네며 다정하게 위로해 주었다. 이를 본 노신사가 말했다. ‘여보게, 그저 지나가는 가난한 아이일 뿐인데 왜 그렇게 정성을 다하나? 자네 일이나 열심히 하지.’ 그러자 수선공이 대답했다. ‘선생님, 저는 지금 신발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을 고치고 있는 중입니다. 이 아이가 자라서 이 나라를 구할 인물이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실제로 이 아이는 훗날 영국의 위대한 설교가이자 사회 운동가가 되었다. 이 아이가 누군지 아는가? 바로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설교자로 꼽히는 찰스 스펄젼(Charles H. Spurgeon)이다.

 

수선공은 신발을 고치고 있었지만, 사실은 미래의 거인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곁에 있는 이 작은 아이가 훗날 시대를 깨울 스펄젼이 될지, 무디가 될지, 한경직이 될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본문에서 우리 예수님께서도 어린아이를 귀하게 여기셨다. 님께서 그들을 귀히 여기신 이유는 그들이 단순히 작아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통로가 될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가장 귀한 생명이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노하시어

본문은 주님의 사역 중 아주 짧은 에피소드처럼 보이지만, 사실 당시 사회 구조와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뒤흔드는 혁명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1세기 유대 사회와 로마 문화권에서 어린이는 권리가 없는 존재였다. 인구 조사에도 포함되지 않았고, 인격체라기보다 가장(아버지)의 부속물이나 잠재적인 노동력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중요한 공적 사역을 하는 랍비나 스승 주변에 아이들이 얼씬거리는 것은 예의 없는 행동이자 아이에게 응대하는 것은 시간 낭비로 간주 되었다. 본문에서 제자들의 태도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래서 주님의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도록 그들이 나서서 나름대로 경호원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주님의 반응은 의외였다.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14).

 

여기서 노하다.’라는 헬라어로 아가낙테오(ἀγανακτέω)이다. ‘몹시 분개하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오르다.’라는 뜻입니다. 특히 이 단어는 불의한 상황이나 묵과할 수 없는 잘못된 태도를 보았을 때 터져 나오는 거룩한 분노를 의미한다. 재미있는 점은 똑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주님이 노하셨다.’라는 표현이 나오지 않는다. 본문만 주님의 이 격렬한 감정을 기록하고 있다. 성경에서 주님이 화를 내시는 장면은 매우 드물다. 주로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과 성전 타락을 보셨을 때뿐이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제자들에게 아가낙테오하셨다. 하나님께 나아오는 영혼을 가로막는 행위가 주님을 얼마나 슬프고 화나게 하는 일인지를 잘 보여준다. 우리가 세운 기준과 편견으로 누군가의 앞길을 막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라.

주님을 잘 섬기기 위해선 주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의도와 상관없이 오히려 걸림돌로 작용할 수가 있다. 본문에서 제자들이 그랬다. 그들이 어린아이들을 데려오는 것을 막은 것은 사적인 감정 때문이 아니다. 주님을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들이 주님의 사역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어 주님의 진노를 사게 된 것이다. 주님을 위한다고 한 일이었는데, 오히려 주님의 일에 걸림돌이 된 것이다. 주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리지 않고 사회적 통념에 사로잡힌 자기 생각과 무모한 자기 열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반면에 주님은 어린아이도 완전한 인격체로 보셨고, 그들 역시 구원이 필요한 존재, 곧 주님이 필요한 존재를 인식하셨다. 또한 주님은 그들을 위해서도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런 주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편견에 사로잡혀 그들의 구원을 가로막는 것에 대해 크게 분노하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주님께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셨다(14).

 

이어 주님은 어린아이들을 영접해야 할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14b). 어린아이들처럼 당시 사회적 구조에서 밀려나 존중도 보호도 대접도 받지 못한 약자들(여성과 어린이, 고아와 과부, 나그네, 세리와 창기들)이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라는 뜻이다. 이는 참으로 혁명적인 선언이다.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사람들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했다. 제자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달랐다.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그들의 것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주님은 이들이 주님께 나아오는 것을 금하지 말고 영접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를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어린이들을 주님께로 데려오라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주님께서 어린이를 환영하신 것은 단순히 귀여워서 보이신 반응이 아니다. 그들 역시 구원이 필요한 존재임을 알리시기 위함이다. 그들 또한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린이도 주님의 대속과 은혜를 통해 거듭나야 하는 대상이다. 본문에 나온 제자들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지 돌아보면서 어린아이들을 주님께로 부지런히 인도하자! 특히 하나님 나라의 VIP로 여기고 적극적으로 환영하자!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은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와 같은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다(15).그리고 주님은 친히 아이들을 안고, 안수하시고, 축복하셨다(16).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친히 보여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도 환영을 받고, 존중을 받는 곳이란 의미다. 당시 사회적 통념을 뒤엎는 혁명적인 사건이다, 여기서 안고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엔앙칼리사메노스’(έναγκαλισάμενος)인데, 신약성경에서 오직 막9:36과 본문 16절에만 등장하는 독특한 단어다. 어린아이를 안는 행동은 당시 사회에서 입양을 상징하는 공개적인 표현이라고 한다. , 이와 같은 주님의 포옹은 입양의 포옹, 곧 부모 역할을 자처하는 행위다. 그리고 이어서 안수하고 축복하신것은 자신의 유산을 그들에게 상속한다는 공개적인 선포다. 주님은 사회적으로 버려질 수 있는 존재, 무가치하게 여겨지는 존재를 자녀로 공개적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상속권(구원)을 부여하는 상징적 행위를 하신 것이다. 이러한 주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에 가장 큰 수혜자가 우리다. 그러니 이제는 우리 차례다.

 

역사적 전승에 따르면, 이때 주님께서 안고, 안수하시고, 축복하셨던 아이 중 한 명이 훗날 안디옥 교회의 주교가 된 이그나티우스(Ignatius)라고 한다. 물론 성경적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주님의 축복이 한 아이의 인생을 위대한 삶으로 바꾸어 놓았을 것이라는 신앙적 고백이 담긴 이야기다. 그들은 이름 없는 평범한 아이들이었지만, 주님의 손길이 닿는 순간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갖게 된 셈이다. 제자들은 꾸짖고 막았으나 주님은 안고, 안수하고, 축복하셨다. 이 세 동작은 오늘날 우리가 우리 곁의 연약한 이들, 곧 어린아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교본이다. 아이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것은 물론이고 안고 안수하고 축복해야 한다. 영적 어른이자 부모인 우리가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이것이다.

 

사람을 고치는 사람

흔히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라고 말한다. 참으로 냉소적이면서도 설득력을 가진 말이다. 인간관계에서 깊은 상처를 입었거나 바뀌지 않는 상대를 보며 지친 사람이 마지막에 내뱉는 일종의 포기의 선언이다. 하지만 성경은 변화와 회복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고치시는 분으로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9:12,13). 주님은 세상에 고치시는 분으로 오셔서 평생 고치시는 일만 하시며 사셨다. 주님은 지금도 상한 마음을 싸매시고, 깨진 관계를 회복시키며, 삶의 아픈 부분을 만지시는 여호와 라파의 하나님으로 우리 곁에 계신다. 제자인 교회와 성도 역시 고치는 사람이다. 고치는 것이 성도와 교회의 사명이자 본질이다. 그 비결은 주님의 이름으로 받아주고 안아주고 축복해 주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을 회복시키고, 고치고, 살리는 일이다. ‘나는 지금 신발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고치는 중이다.’ 서두에서 어느 신발 수선공의 말이 울림이 크다. 우리의 이와 같은 태도가 우리 아이들을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VIP로 세우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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