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뿐인 세상에서 ‘신실한 한 사람’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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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26회 작성일 26-06-21 15:17본문
말뿐인 세상에서 ‘신실한 한 사람’ 찾기
잠20:6
2026. 6/21(성령강림 후 넷째 주일)
피알의 황금률, ‘낄끼빠빠’
옛날에는 ‘모나면 정 맞는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런데 요즘은 ‘모나야 기억에 남는다.’라고 말하는 시대가 되었다. 자기만의 뾰족한 무기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과거에는 묵묵히 자기 일을 잘하면 언젠가 인정받는다는 말이 통했다면, 요즘에는 자신의 역량과 가치를 어떻게 보여주느냐가 하나의 강력한 경쟁력이 되었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이나 매력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주변에 알리지 않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신의 가치와 능력을 세상의 언어로 번역해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피알’(Public Relations)이라고 한다. 현대는 자신을 포장하고 홍보하는 것도 능력인 자기 피알시대가 되었다. 각종 개인 매체를 통해 자신이 얼마나 착한 사람인지, 멋진 사람인지, 부지런한 사람인지, 유능한 사람인지, 의리 있는 사람인지를 보여주려고 애를 쓴다.
그런데 가끔은 대화의 맥락과 상관없이 불쑥 자기 자랑을 끼워 넣거나, 과도하게 자기 과시성 게시물을 도배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행위는 다른 사람에게 피로감을 주고, 오히려 ‘안티’를 양산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피알은 말 그대로 ‘피할 것은 피하고 알릴 것은 알리는 것’이다. 자랑도 정도껏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 신조어 중에 ‘낄끼빠빠’라는 말이 있다. ‘낄때끼고빠질때빠져라.’라는 문장의 각 단어 첫 글자를 모아놓은 것이다. 상황에맞게나설때와물러설 때를가려서행동하라는뜻이다. 지혜로운 관계의 법칙이라 생각한다. 자기 자랑도 마찬가지다. 솔로몬 시대에도 사람들의 자기 자랑이 심했던 것 같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 솔로몬이 한마디 충고를 한 것이 본문이다. ‘많은 사람이 각기 자기의 인자함을 자랑하나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나보랴.’(6). 여기에참으로 가슴 시린 질문이 나온다. ‘그러나 진짜 충성된 자를 어디서 만나볼 수 있겠느냐?’자랑의말이 무성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이 찾으시는 ‘진짜 충성된 사람’의 가치에 대한 말씀이다.
자기 자랑은 본능이다.
원시 시대의 인간은 나약했다. 사자나 호랑이 같은 맹수를 이기려면 무조건 집단생활을 해야 했다. 만약 무리에서 소외되거나 쫓겨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래서 우리 유전자에는 ‘주변 사람에게 쓸모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아 무리에서 살아남아라!’라는 강력한 생존 명령이 각인되어 있다. 우리가 누군가의 비난에 아파하고, 칭찬에 춤추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라고 말한다. 우리가 은근슬쩍 혹은 대놓고 자랑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인정을 받고 싶어서 그런 것이다. 누군가 자기를 자랑하면 눈을 흘기지 말고, 인정받고 싶어서 그렇구나 라고 생각하면 된다. 사실 자랑은 숨을 쉬고 밥을 먹는 것처럼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문제는 너무 과하게 표출하면 주변의 질투나 피로감을 유발할 수가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그래서 현대 사회에서는 ‘얼마나 유연하고 재미있게 자랑하느냐’(일명 ‘스텔스’ 자랑)가 기술이 되었다.
하지만 자칫 자랑은 우리를 ‘말뿐인 사람’(입벌구)이란 함정에 빠뜨릴 수가 있다. 심리학자 피터 골비처(Peter Gollwitzer)에 따르면, 사람이 자신의 목표나 계획을 남에게 자랑하여 인정받으면, 우리 뇌는 그 목표를 이미 달성했다고 착각한다고 했다. ‘나 이번에 운동 시작해서 몸짱 될 거야!’라고 자랑하는 순간, 주변에서 ‘와, 대단하다! 어떻게 그런 멋진 생각을 했어? 응원할께!’라는 반응이 돌아온다. 이때 뇌는 실제로 땀 흘려 운동을 끝마쳤을 때 나오는 도파민을 미리 맛보게 된다. 행동을 하기도 전에 뇌가 만족해 버리니까 정작 실천할 힘과 의지가 사라지는 것이다. 말 그대로 ‘말’이 ‘행동’을 갉아먹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본문이 경계한 것이 바로 이 점이다. 자랑만 실컷 해놓고 정작 행동은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진짜 단단한 사람은 무언가를 시작할 때 동네방네 소문내지 않고 ‘조용히’실천한다. 뇌가 미리 도파민을 마시지 못하게 차단하고, 그 에너지를 고스란히 행동(실천)으로 바꾸는 사람이다. ‘말을 줄이고 행동을 보이거나, 행동한 것만 말하거나!’이것이 우리 삶의 구호가 되었으면 좋겠다.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나랴!
누구나 말을 할 수 있으나 말한 대로 살기는 쉽지 않다. 인정받고 싶어 자랑하는 사람은 많으나 그 자랑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서 본문은 가슴 시린 질문을 던진다. ‘많은 사람이 각기 자기의 인자함을 자랑하나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나보랴.’ 자랑만 하고 실천(행동)이 없는 세태를 이보다 더 날카롭게 꿰뚫어 보는 말씀이 있을까 싶다. 말만 앞서는 사람은 많지만,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며 실천하는 사람이 너무 귀하다는 탄식이다. 여기서 ‘충성된 자’란 히브리어로 ‘이쉬 에무님’(אִישׁ אֱמוּנִים)으로, 신실한 자, 변함없는 자, 끝까지 믿을 수 있는 자를 뜻한다. 즉, 충성된 자는 단순히 누군가에게 복종하는 사람이 아니라, ‘신실함과 정직함이 삶에 가득 배어있어 절대 변치 않는 사람’, ‘믿음직함 그 자체인 사람’을 뜻한다. 말만 앞세우는 세상에서, 삶 전체로 신뢰를 증명해 내는 멋진 사람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탄식 이면에 감춰진 하나님의 본심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화려한 말재주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미련해 보일 정도로 자리를 지키는 신실한 사람을 찾으신다는 것이다(尾生之信 고사). 교회가 위기이고 믿음을 지키기 어렵다고 말하는 상황에도, 끝까지 믿음의 지조를 지키는 ‘충성된 한 사람’을 찾고 계신다는 것이다.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시101:6).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더불어 살아가는 주변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 중요하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알 수 있도록 적당히 자기를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수평적 시선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성도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사람이어야 한다. 수직적 시선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굳이 나를 들어내어 자랑할 필요가 없다. 그저 말 대신 삶으로 증명하면 된다. 아무튼 사람은 눈에 보이는 화려한 스펙, 유창한 말솜씨, 세상적인 성과에 마음을 빼앗기지만, 하나님의 시선은 전혀 다른 곳을 향해 있다. 온 땅을 두루 살피시며 그분이 간절히 찾으시는 단 한 사람은 바로 '충성된 사람'이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작은 일에 정성을 다하는 사람이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Coram Deo) 있음을 알고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는 이들을 하나님은 결코 놓치지 않으신다.
주님께서 찾으시는 그 사람이 되려면
세상은 자신을 알리고, 증명하고, 자랑하느라 숨 가쁘게 흘러가고 있다. 말 그대로 말의 성벽을 높이 쌓아 올리는 시대다. 하지만 이런 소란스러움 속에서도 묵묵히 무릎 꿇는 한 사람, 그 한 사람이 바로 주님의 시선이 멈추는 곳이자, 이 세상을 밝히는 진짜 ‘이쉬 에무님’이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우선,관객을 사람이 아닌 주님으로 바꿔야 한다. 말만 앞서는 삶의 가장 큰 특징은 ‘사람의 인정’을 갈구한다는 점이다. 사람을 관객으로 두면 사람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 끊임없이 나를 포장하고 자랑하려야 한다. 그러나 관객을 주님으로 바꾸면 더 이상 사람의 인정에 매이지 않게 된다, 불꽃 같은 눈으로 보고 계시는 주님이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충성은 여기서 시작된다. 다음은, 작은 일을 소중하게 대하는 것이다. 오늘 나에게 주어진 사소한 일상을 마치 주님께 하듯 정성을 다하는 것이다. 작은 일에 담긴 태도가 진짜 내 신앙의 크기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눅16:10). 마지막으로, 말을 줄이고 행동의 시차를 없애는 것이다. 앞에서, 말을 해버리면 뇌가 이미 이룬 줄 착각한다는 함정을 나눴다. 믿음의 영역도 같다. 거창한 영적 계획을 자랑하기보다, 지금 당장 몸을 움직여야 한다. ‘기도해야지’라고 말하는 대신 지금 무릎을 꿇고, ‘사랑해야지’라고 다짐하는 대신 지금 작은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다. 말과 행동 사이의 시차를 줄여야 한다. 시차는 사단에게 통로를 제공하는 것이다. 말과 행동 사이의 시차를 줄일 때, 우리의 영혼은 말쟁이(입벌구)가 아닌 실천가로 훈련된다. 바로 이 세 가지가 우리를 주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이 되게 하는 비결이다. 주님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소란함 속에서도 묵묵히 무릎 꿇고 삶으로 증명하는 ‘신실한 한 사람’이다. 주님의 시선을 끄는 바로 그 한 사람이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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