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의 함정, 공동체의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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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24회 작성일 26-06-07 13:59본문
고립의 함정, 공동체의 복
잠18:1
2026. 6/7(성령강림 후 둘째 주일)
고립을 부추기는 시대
지금 이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고립’을 부추기는 시대다. 혼밥, 혼술, 혼행, 혼카공, 혼영이라는 단어가 당연해졌고, 타인에게 간섭받지 않고 나만의 공간에서 나만의 시간을 누리는 것이 미덕이자 편안함처럼 여긴다. 여기서 성도도 자유롭지 못하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피로감, 교회 공동체 안에서 겪은 크고 작은 상처 때문에 ‘그냥 혼자 예수님 잘 믿으면 되지, 뭐 하러 교회 나가서 힘들게 얽매여 사나?’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요즘 ‘가나안 성도’가 부쩍 늘어난 것도 이 때문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본문은 우리에게 엄중하고 날카로운 경고를 던진다. ‘무리에게서 스스로 갈라지는 자는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라.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하느니라.’
본문은 자기 소욕을 채우기 위해 의도적으로 공동체나 무리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사람에 대한 경고다. 오직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행동하려는 이기적인 태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편안함이라고 착각하는 이 ‘고립’이 사실은 영적 성장을 가로막는 무서운 ‘함정’이다. 본문을 통해 고립의 위험성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공동체의 복’을 회복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고립의 함정
현대 사회는 극단적인 성과주의에 매몰되어 경쟁을 유발하고 있다. 배움의 현장에서까지, ‘옆에 있는 사람은 동료가 아니라, 밟고 올라가야 할 경쟁자’라는 인식을 은연중에 심어주고 있다. 이런 사회가 우리에게 심어주는 가장 무서운 가치관이 있다. ‘아무도 믿지 마라, 너는 너 스스로 지켜라.’ 한 마디로 ‘불신’이다. 이런 생각은 심각한 고립을 낳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성경은 함께 연대하고 짐을 서로 지라고 말씀하신다. 심지어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시133:). 우리가 공동체를 떠나 고립의 길을 택할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 가지 치명적인 함정에 빠지게 된다.
첫째는, ‘지독한 이기심’이라는 함정이다. 본문은 무리에게서 스스로 갈라지는 자의 본질을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소욕’은 개인적인 욕망 즉,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이기심’을 뜻한다. 우리가 공동체에 깊이 소속되지 않으려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겉으로는 ‘상처받기 싫어서’라고 말하지만, 내면에는 ‘내 뜻대로, 내 편한 대로 살고 싶다.’라는 마음 때문이다. 공동체 안에 있으면 내 시간을 양보해야 하고, 자유가 침해당할 수도 있고, 물질을 나누어야 하고,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용납해야 한다. 때로는 원치 않는 짐을 감당해야 하고, 또한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 실제로 물질이나 시간뿐만 아니라 감정적인 소모가 크다. 그러므로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것은 많은 것을 포기하고 희생해야 한다. 그러니 고립은 이런 것이 싫어서 즉, 자아와 욕심을 지키기 위해 선택하는 영적 도피처일 뿐이다.
둘째는, ‘독선과 영적 맹점’이라는 함정이다. 본문은 고립된 자는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한다.’라고 말씀한다. 혼자 깊이 생각하면, 그것이 다 옳은 것 같고, 대단한 지혜인 것처럼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거울이 없으면 내 얼굴에 묻은 오물을 볼 수 없듯, 믿음의 동역자가 없으면 내 영혼의 비뚤어진 모습을 보지 못한다. 공동체를 떠난 사람의 생각은 결국 ‘독선’으로 흐르게 된다. 다른 사람의 권면도, 목회자의 설교도,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도 자기 입맛에 맞게 재단해 버린다. 참된 지혜는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봐주는 지체의 조언 속에서, 그리고 서로 부딪히며 다듬어지는 과정에서 찾아오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초대교회 시절, 세상 유혹을 피해 사막이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평생을 혼자 그곳에서 기도하며 보낸 수도사가 많았다. 그중에 수도생활의 아버지, 혹은 독행수도 생활의 개척자라 불리는 ‘안토니우스’(St. Antonius)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수년간 홀로 사막에서 처절하게 수행했다. 어느 날, 그는 ‘이만하면 내 신앙이 세상에서 가장 순결하고 깊어졌겠지’라는 영적 자부심에 사로잡혔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안토니우스야, 저 도시 알렉산드리아의 거리에 가면 구두를 수선하는 한 사람이 살고 있다. 너의 영성은 아직 그의 영성을 따라가지 못한다.’ 충격을 받은 그는 사막에서 나와 그 구두 수선공을 찾아갔다. 그리고 종일 그의 삶을 관찰했다. 수선공은 특별히 기도를 길게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찾아오는 손님의 낡은 신발을 정성껏 고쳐주고, 까다로운 손님의 불평을 잘 받아주고, 번 돈의 일부로 가난한 이웃을 대접하는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다. 안토니우스는 여기서 깊이 깨달았다. 혼자 동굴에 있으니 미워할 사람도, 까다로운 사람도, 부딪힐 일도 없었기에 자신이 온전한 사랑의 사람이 된 줄 착각했던 것이다. 참된 지혜와 성품은 사람들과 얽히고설키며 그들을 용납하는 삶의 현장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셋째는, ‘사탄의 쉬운 먹잇감’이 되는 함정이다. 동물의 왕국을 보면 사자나 늑대와 같은 포식자가 사냥할 때 쓰는 절대적인 법칙이 있다. 무리에서 이탈하여 홀로 떨어져 나온 짐승을 노리는 것이다. 물과 풀을 찾아 이동하는 들소(누) 떼를 보았을 것이다. 아무리 크고 건강한 누도 무리에서 떨어지는 순간 사자의 밥이 된다. 우리의 영적 싸움도 똑같다. 영적으로 고립된 성도는 사탄이 가장 공격하기 좋은 표적이다. 혼자서 기도하고, 혼자서 말씀 읽고, 혼자서 예배를 드려도 신앙을 지킬 수는 있다. 그렇지만 영적인 위기나 극심한 시험이 찾아오면 버티지 못하고 무너진다. 그런데 그곳에 손을 잡아줄 믿음의 지체가 있으면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1991년, 미국 애리조나주 사막에 거대한 인공 생태계 ‘바이오스피어Ⅱ’(Biosphere Ⅱ)가 건립되었다. 외부와 완벽히 차단된 축구장 3개 크기의 유리 온실 속에 수천 종의 식물을 심어 자라게 만든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격리 실험이었다. 실험 초기, 식물들은 유해한 외부 환경(오염, 해충, 거친 폭풍우)과 격리되어 완벽한 조건에서 무럭무럭 자랐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한 현상이 발생했다. 나무들이 일정 높이 이상 자라자, 외부 충격이 전혀 없었음에도 툭툭 부러지거나 뿌리째 쓰러져 버린 것이다. 원인을 분석해 보니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다. 그 이유는 ‘바람’이었다. 온실 안에는 ‘바람’이 없었다. 자연 속의 나무들은 거센 바람에 흔들리고 부딪히면서 뿌리를 땅속으로 깊이 내리고 줄기를 단단하게 만드는 ‘스트레스 섬유’(Stress Wood Fiber: 나무가 외부 압력을 받아서 정상적으로 자라지 못할 때, 이에 저항하여 스스로를 지탱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특수한 형태의 섬유)를 형성한다고 한다. 하지만 온실 속 나무들은 흔들어주는 바람이 없기에 겉만 무성할 뿐 속이 빈, 그래서 스스로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는 유약한 나무가 된 것이다. 공동체 안에 있으면 때로 거친 바람을 맞을 수 있다(비난, 질투, 오해, 갈등의 바람 등등). 마음이 맞지 않아 부딪히기도 하고, 그래서 상처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 바람이 우리를 영적으로 단단하게 만든다. 온실처럼 고립된 곳에서 혼자 하는 신앙이 편해 보이지만, 작은 시련의 무게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쓰러지게 된다.
공동체의 복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טוב)라고 자축하셨던 하나님이, 유일하게 좋지 않다(לא טוב)고 하신 것이 있다. 바로 사람이 ‘혼자 있는’ 상태였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2:18).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담을 위해 그의 배필로 하와를 창조하신 이유다. 하나님께서는 고립을 좋지 않게 보신다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공동체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삼위일체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 그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우리 역시 공동체로 존재하고, 공동체 안에서만 온전해질 수 있다. 그러므로 함께하는 것이 복이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4:12). 우리가 세상에서 지치고 넘어질 때, 붙잡아 주는 친구가 있고, 격려해 주는 동료가 있고, 함께해 주는 가족이 있고, 기도해 주는 믿음의 동역자가 있다면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사실 그저 곁에 있어 주는 온기 자체가 결핍을 채워주는 가장 큰 복이다. 또한 나를 거울처럼 비춰주는 성장의 기회가 된다. 아무튼 혼자가 편하다는 것은 사단의 속임수다.물론 교회는 완벽한 온실이 아니다. 사실 여러모로 부족하고 모난 사람이 모여 영적 섬유를 만들어가는 축복의 숲이다. 이런 교회를 하나님께서 복을 부어주시어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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