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은 준비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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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19회 작성일 25-12-07 15:00본문
기다림은 준비의 시간이다.
벧후3:11~14
2025. 12/7, 11:00(대림절 둘째 주일)
기회는 준비하며 기다린 사람의 몫이다.
어느 잡지에 소개되었던 오페라 가수 소프라노 신영옥 씨의 이야기다. 그녀는 유학시절 목에서 피가 날 정도로 열심히 연습하여, 그 결과 콩쿠르(concours) 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오페라에서 주연배우로 활동하기를 원하는 그녀의 소망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여기에 실망하지 않고 ‘언젠가는 내게도 기회가 올 것이다. 그때를 위해 열심히 준비하자.’라고 스스로 다짐하면서 언젠가 올 그날을 기대하고 기다리며 오페라 주연배우의 노래와 연기를 열심히 연습하며 준비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공연 중 주연배우가 병으로 갑작스럽게 그 역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신영옥은 꿈에 그리던 그 여주인공의 역을 맡게 되었다. 평소에 철저하게 준비하며 기다리고 있었기에 그 역을 아주 훌륭하게 소화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실력을 인정받아서 세계적인 오페라 가수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소위 우리가 즐겨 사용하는 ‘성공’이라는 기회는 그냥 우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준비하고 기다린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평범한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기회는 누구에게나 오지만 그 기회를 붙잡을 수 있는 사람은 잘 준비하여 기다린 사람이다. 오늘은 대림(강)절 둘째 주일이다. 일반 달력에서는 대림절이 11월 말에서 12월에 들어있는 성탄절 다음의 마지막 절기지만, 교회력에서는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첫 절기다. 즉, 우리가 1월 1일을 새해로 맞이한 것처럼 교회는 대림절 첫째 주일을 새로운 한 해의 시작으로 여긴 것이다. 우리가 이 대림절을 이야기할 때 보통 ‘기다림’과 ‘준비’라는 두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그러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대림절의 의미를 보다 잘 살린 것은 ‘준비’라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준비’의 기간으로 대림절에 대하여 생각을 해보려고 한다.
기다림은 준비의 시간이다.
지난 주일 주님의 재림과 관련하여 신앙적 기다림과 비신앙적 기다림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신앙적 기다림에는 주님의 재림이 축복이지만 비신앙적 기다림에는 대재앙이라고 했는데, 이를 결정짓는 것이 있다. 그것은 주님의 재림을 어떻게 준비하느냐다. 즉, 어떻게 종말을 준비하느냐에 따라 축복이 될 수도 있고, 재앙이 될 수도 있다. 사실 기다림은 기다림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준비에 있다. 준비를 위해 기다림이 필요한 것이고, 그래서 기다림의 시간은 곧 준비의 시간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다림은 ‘멈춤’이 아니라 ‘준비’의 시간이고, ‘낭비’가 아닌 ‘창조’의 시간이다.
세상 끝에는 우주적 이변과 함께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인데, 이때가 바로 종말이다. 그런데 이 종말은 끝이 아니라 구원의 때다. 종말이 구원이라는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준비가 필요하다. 그래서 성경은 재림에 대한 준비를 촉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깨어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24:42-44). 2,000년 전, 예수님께서 베들레헴 어느 마구간에서 탄생하셨을 때 주님의 탄생을 고대하고, 주님 시대의 도래를 대망했던 이스라엘이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맞아들이지 못한 것은 ‘기다림’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준비’가 없었기 때문이다. 준비가 없었기에 주님께서 오셨어도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문제는 이와 같은 모습이 2,000년 전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림절을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대림절을 맞고 있는 우리는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안에, 우리의 가정에, 우리의 공동체(교회)에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구유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맞이할 구유를 준비할 때, 성탄은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닌 현실이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야 할 대림절의 삶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준비해야 할 구유는 무엇일까?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준비해야 할 ‘구유’
본문에 우리가 준비해야 할 구유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11~12a). 우리가 준비해야 할 구유는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이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은 거의 동의어다. 거룩한 행실이란 거룩한 삶으로, 이는 하나님과 우리의 공동 작업이다. 거룩한 삶은 우리의 노력과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반면에 성경은 하나님을 ‘거룩하게 하시는 이’(히2:11)라고 말씀하고 있다. 거룩한 삶은 하나님을 통해서 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본문이 명령형으로 되어 있는 것은 우리 편에서도 거룩한 삶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뜻이다. 즉, 거룩한 삶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말씀과 기도이고, 예배이다. 구제하고, 사랑하고, 순종하며 섬기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를 바울은 ‘경건에의 훈련’(딤후4:7)이라고 하였다. 이런 삶을 추구하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셔서 거룩한 삶으로 우리를 이끄신다.
앞서 말한 대로, ‘경건함’도 비슷한 의미다. 이 단어 자체는 참 어렵다. 이는 헬라어로 ‘유세베이아’(εὐσέβεια)라고 하는데, 신약성경에서 약 40회 정도 사용되고 있다. 복음서와 바울의 초기 서신에는 나오지 않고, 주로 사도행전과 바울의 후기 서신(목회서신), 그리고 베드로후서에만 나온다. 그리고 사용된 책마다 의미가 조금씩 차이가 있다. 사도행전에서의 경건은 비(非)기독교적인 헬라 세계에서 통용되던 도덕적인 한 덕목으로 사용되고 있다. 목회서신의 경우 경건은 주님의 사건 안에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뿌리를 두고 있는 하나님께 속해 있음, 또는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성도의 삶의 태도이다. 즉,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동(삶)이다. 그리고 베드로후서에서 경건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된 올바른 행실의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경건이라는 단어는 헬라 세계에서 사용되던 용어인데 사도행전을 제외한 다른 신약성경에서는 기독교인 의미로 사용한 것이다. 요약하면, 경건은 예수님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행동(직설법)에 그 근거를 두고 있을 뿐 아니라 그로부터 요구되고, 또 그에 부합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책임 있는 성도의 행동과 삶(명령법)을 의미한다.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이웃과 주변 세상에 대하여,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하여 주님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삶의 태도이자,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행동의 모든 것이다. 본문의 표현으로 거룩한 삶(행실)이다. 이를 실천하는 것이 경건함이다. 이는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는 바울의 말과 같은 의미다. 이것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준비해야 할 우리의 ‘구유’다. 이렇게 준비해야 할이유는 흠점 없이 점도 없이 주님 앞에서 나타나기 위함이다(14). 그리고 이 표현은 베드로가 이미 주님께 대하여 한 표현이다(벧전1:19). 그러므로 주님처럼 되는 것, 이것이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의 목표이고, 이유이다.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며 준비해야 할 구유이다.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어느 은퇴 목사의 이야기다. 거의 50년 넘도록 아내가 매주 자신만의 골방에 들어가곤 했는데, 누구에게도 그 방을 공개하지 않았다. 그래서 목사는 늘 궁금했다. 그러던 차에 아내가 외출한 사이에 그 방에 들어가 보니 서랍장 하나만 덩그러니 있었다. 그리고 그 서랍장 안에는 ‘콩 세 알’과 ‘돈 200만 원’이 있었다. 목사는 너무 궁금해서 욕먹을 각오를 하고 아내가 돌아오자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아내가 마구 화를 냈다. 왜! 허락 없이 방에 들어갔느냐는 것이었다. 목사도 질세라 방에는 서랍장 외에 아무것도 없었는데 왜 그리 화를 내냐며 도대체 서랍장 안에 있는 콩 세 알과 200만 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아내가 말했다. 설교를 들을 때 때로는 상처가 되고, 가슴이 아프고, 설교를 죽을 쓸 때 콩알을 하나씩 넣어 놓은 것이라고 했다. 이 말에 목사는 크게 안도하며 기뻐했다. 평생 설교하면서 아내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상처를 주고, 설교를 죽 쑨 일이 세 번밖에 없었다고 생각하니 나름 뿌득했다. 목사가 아내에게 또 물었다. ‘그러면 200만 원은 뭐요?’ 아내가 대답했다. ‘아 그것요. 콩 판 돈 이예요.’ 목사의 착각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다 알려고 하지 않고 적당히 그칠 줄 아는 것이 지혜고 행복이다. 사실 그가 목회를 무사히 잘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아내와 성도가 참아주고 봐주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누군가 참아주고 봐주는 덕에 지금의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특히 우리 주님께서 참고 봐주신 덕이다. 주님의 재림이 더딘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의 이런 오래 참으심과 기다리심은 심판의 ‘연기’이지 심판의 ‘포기’가 아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부끄럽지 않는 사람으로 잘 준비하도록 주신 기회다. 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고 잘 선용한 사람이 지혜로운 믿음의 사람이다. 그러므로 기다림은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이라는 구유를 준비하는 시간이다. 그래야 주님처럼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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