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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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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28회 작성일 26-03-01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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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까?

37:14~20

2026. 3/1. 11:00(사순절 둘째 주일)

말의 전쟁시대

우리는 참으로 시끄러운 시대, 말이 많은 시대를 살고 있다. 손바닥 안의 스마트폰을 켜는 순간 수만 발의 말이 화살처럼 쏟아지고, SNS의 댓글, 단톡방의 비아냥, 뉴스 속의 날 선 공방까지. 바야흐로 말의 전쟁시대. 바로 그 전쟁터 한복판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다. 문제는 이 전쟁터에는 휴전이라는 것이 없다. 모두가 저마다의 확성기를 들고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려 애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목소리가 커질수록 진실은 파편화되고, 대화가 많아질수록 마음의 거리는 멀어진다.

  

전쟁터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아군으로 위장한 적군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날아오는 저격수다. 그중 하나가 비난의 포탄이다. 근거 없는 비난과 혐오의 말, 부정적인 말은 자존감에 구멍을 내거나 치명상을 입힌다. 다른 하나는 유혹의 매복이다. 달콤한 말로 포장된 거짓 정보와 선동은 우리를 낭떠러지로 유인한다. 자극적인 말일수록 중독성이 강해 어느새 그 소음 없이는 불안해하는 '소음의 포로'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지금 이와 같은 말의 홍수, 더 나아가 말의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 치열한 말의 격전지에서 우리는 어떤 말을 듣고,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나를 지켜야 할까? 이 시간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까?’라는 제목으로 우리가 진정으로 귀 기울여야 할 대상에 대해 함께 나누고자 한다.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까?

아프리카 마사이족은 사자를 사냥할 때 아주 독특한 훈련을 한다고 한다. 사자는 사냥감을 쫓을 때 무서운 소리를 내는데, 초보 사냥꾼은 그 소리에 겁을 먹고 뒤를 돌아보다가 사자의 먹이가 되기도 한다고 한다. 그래서 베테랑 사냥꾼은 이렇게 가르친다고 한다. ‘사자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지 말고, 사자의 발소리를 들어라.’ 입소리는 위협일 뿐이지만 발소리는 사자가 실제로 어디쯤 와 있는지 어느 방향으로 덮치려 하는지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도 어떤 소리, 무슨 소리, 누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냐가 중요하다. 그래서 시편은 복 있는 사람의 첫 번째 조건으로 말을 언급한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1:1a). 여기서 는 충고, 곧 말이다. , 악인들의 말을 듣지 않는 것, 그들의 말을 따르지 않는 것이 복 있는 사람의 첫 번째 조건이라는 것이다.


 

 

본문은 유다의 히스기야 왕 시대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이다. 당대 초강대국 앗수르가 유다를 침공했다. 유다를 침공한 앗수르 왕 산헤립은 말에 능한(?) 랍사게를 먼저 보내 군사적 침략보다는 말에 의한 설득으로 유다를 무너뜨리려 했다. 랍사게는 히스기야로부터 온 엘리아김, 셉나, 요아에게 항복 권고문을 전했다. 36:4-10절이 그 내용이다. 이 글은 다음과 같은 수사적 병행구조를 이루고 있다:


               A. 히스기야의 무기력성(5)                        

                   B. 이집트의 무기력성(6)                        

                        C. 여호와를 의지함의 무기력성(7)        

               A'. 히스기야의 무기력성(8)

                   B'. 이집트의 무기력성(9)

                        C'. 여호와를 의지함의 무기력성(10)


랍사게는 먼저 앗수르의 군사력에 비해 히스기야의 나약함을 강조하면서 스스로 항복할 것을 설득한다. 나아가 이집트의 군사력을 의지하는 것도 무의미하다고 강조한다. 유다의 정치적 수단조차도 그들의 침략을 저지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또한 유다가 섬기는 여호와도 앗수르를 막을 수 없다고 단언한다. 이런 내용이 두 번 반복되고 있다. 이를 수사적 병행구조라고 한다. 이런 수사법을 사용한 것은 강조하기 위함이다. , 정치적 수단이든 신앙적 수단으로든 간에 어떤 수단과 방법도 앗수르의 공격을 막을 수 없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런데 랍사게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유다 온 백성이 알아듣도록 유다 방언으로 말했다(36:14~20). 랍사게는 하나님을 의뢰해야 한다는 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고, 앗수르 왕의 말을 듣고 항복하라는 것이다. 앗수르 왕의 말을 들어야만 살 수 있다고 히스기야와 유다 백성을 협박한 것이다. 이렇게 랍사게는 군사적 공격보다는 말로 유다를 무너뜨리려고 한 것이다. 군사적 전쟁이 아닌 말의 전쟁인 셈이다. 히스기야와 유다 백성은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히스기야
이와 같은 랍사게의 항복 권고문을 보고 히스기야는 탄식하며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전을 찾았다(14). 그곳에 선지자 이사야도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이미 말씀을 주셨는데, 그것은 앗수르의 멸망에 대한 예언이다. ‘이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에게 이렇게 말하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들은바 앗수르 왕의 종들이 나를 능욕한 말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영을 그의 속에 두리니, 그가 소문을 듣고 그의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며, 또 내가 그를 그의 고국에서 칼에 죽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37:6,7). 여기서 히스기야는 중대한 결정에 직면하게 된다. 랍사게의 말처럼 앗수르 왕의 말을 들어야 하는가? 아니면 이사야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가?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로 결단을 한다. 본문은 히스기야의 기도로, 그의 중대한 결단의 근거를 보여준다.

               A.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16)
                    B. 피조물이 만든 헛된 앗수르의 신들(17-19)
               A'.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20)

구조가 보여주듯 히스기야는 앗수르의 신들은 사람이 만든 것으로 헛되며,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이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이시라고 강조한다. 그래서 그는 앗수르 왕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로 결심했다. 어떤 정치적 수단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오직 선지자를 통해 주어진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하고자 했다. 랍사게를 통한 앗수르 왕의 말이 아니라 이사야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로 한 것이다. 놀랍게도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의지했더니 이사야를 통해 앗수르의 멸망을 예고한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현실이 되었다(37:30~36). 그래서 유다가 앗수르의 공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누구의 말을 듣느냐가 중요하다. 그것이 우리 인생을 결정하고, 나아가 나라의 운명도 좌우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인류가 죄의 덫에 갇히게 된 것은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뱀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텅 빈 인생에서 충만한 인생으로 바뀐 것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

믿음도 들음에서 난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10:17).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생기고, 믿음이 자라고, 믿음이 성숙하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 좋은 일에는 장애가 많은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장애 요소가 많다. 특히 세상이 치열한 말의 전쟁터와 같기에 더욱 그렇다. 이런 것을 소위 영적 노이즈(Noise)라고 한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는 영적 노이즈가 너무 많다. 그것을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우리 마음에서 가장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들은 분주함과 염려. 이런 것 외에도 잘못된 습관, 욕심, 편견, 교만 등 무수히 많다. 이런 것들이 말씀을 막거나 왜곡시키고, 우리를 말씀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사순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듣기 위해, 더 잘 순종하기 위해 이와 같은 영적 노이즈를 줄이거나 제거하는 훈련 기간이다. 그런데 이것은 소극적인 것이고, 보다 적극적인 것이 있다. 그것은 영적 주파수를 주님과 맞추는 훈련이다. 소리굽쇠실험이라는 것이 있다. ‘공명현상’(resonance)을 보여주는 실험이다. 서로 떨어진 곳에 같은 주파수를 가진 두 개의 소리굽쇠를 두고, 주변에서 아무리 큰 소리를 질러도 소리굽쇠는 반응하지 않는다. 하지만 같은 주파수의 소리굽쇠를 살짝만 건드려도 멀리 있는 다른 소리굽쇠가 반응을 한다. 이를 공명현상이라고 한다(1831년 영국 브로튼 현수교 붕괴 사건, 병사들의 일사불란한 보폭이 다리의 고유 진동수와 맞물리며 붕괴한 사례). 영적 노이즈를 없애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공명을 이루는 것이다. ,세속적인 주파수에 반응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파수에만 반응하는 소리굽쇠가 되는 것이다. 주님과 공명이 잘 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주님과 공명이 잘 되면 말의 전쟁 시대라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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