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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도우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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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3,185회 작성일 14-12-28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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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도우신 하나님

삼상7:1~12

2014. 12/28. 08:00, 11:00

돌아보니 은혜라!

 올해야말로 다사다난(多事多難)이란 말이 가장 잘 어울린 해였다는 생각이 든다. 경주 마우나오션리조트 붕괴사고를 비롯하여 다시 입에 담기도 싫은 세월호 침몰사고, 22사단 총기난사 사건, 판교테크노밸리 축제 환풍구 붕괴사고, 참치어선 오룡호 침몰사고 등 참으로 많은 사건사고가 있었다. 그런데 그 많은 사건사고를 뒤로하고 오늘이 올해의 마지막 주일이다. 세월호와 함께 시간도 바닷물 속에 잠긴 것만 같았는데 벌써 연말이 되고 보니 시간이 참 무심하고 빠른 것 같다. 나이에 따라 인생의 속도도 비례한다는 말이 있다. 30대는 30km, 40대는 40km, 50대는 50km, 60대는 60km라고 하는 말이 실감이 난다.

 

이런 와중에도 별 재주도 능력도 없는 우리가 지금까지 여기까지 이렇게 건재한 것은 누구 때문이고, 무엇 때문일까? 주님 때문이고, 주님께서 도우신 은혜 때문이다. 그 은혜로 저와 여러분이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다. 물론 그동안 혼자 고민하고, 혼자 아파하고, 혼자 씨름하고, 혼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동분서주했는데, 무슨 은혜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인생길을 혼자서 걸어온 것 같아도, 하나의 발자국만 남아있어 나 혼자 걸어온 것 같아도, 자세히 보면 그것은 주님께서 업고오신 주님의 발자국이다. 그리고 주님의 도우시는 은혜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미래에 대하여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안심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잘될 것’이라는, ‘잘되게 하실 것’이라는, 그래서 ‘잘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주님의 은혜를 믿기 때문이다.

 

에벤에셀 하나님

삼상7장도 같은 고백이고, 그 고백이 현실이 된 사건이다. 본문은 이스라엘이 지중해에서 이주해온 강력한 해양민족 블레셋에게 오랫동안 점령당하여 괴롭힘을 받는 상황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무려 20년간 그들의 지배를 받으면서 온갖 고초와 수모를 겪으며 살았다. 상황이 이러다보니 경제는 바닥을 치고, 정치는 무기력하고, 사회는 질서와 원칙을 찾아 볼 수 없는 혼란 그 자체였다. 그 때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자를 보내셨고, 사무엘을 중심으로 힘을 모아 블레셋을 물리쳤다. 아무 무기도 없던 그들이 철제무기로 무장한 블레셋과 싸워서 이겼다. 그들의 영토 깊숙한 곳, 벧갈까지 쳐들어가서 승리를 거뒀다. 흔히 이런 경우를 두고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한다. 그런데 그 계란이 바위를 깨뜨렸다. 절대 불가능한 싸움이었는데 승리를 거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우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12)고 고백을 하였다. 또한 이 역사적인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미스바와 센 사이에 돌멩이로 기념비를 세웠다. 그리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붙였다. ‘도움의 돌’이란 뜻이다. 이렇게 도우신 하나님을 가리켜 ‘에벤에셀 하나님’이라 부른다.

 

여기서 ‘에벤에셀’이라는 승리의 기념비를 세운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스라엘에게 ‘에벤에셀’이란 이름은 매우 뼈아픈 기억이다. 그들은 20년 전, 바로 이 ‘에벤에셀’이라는 이름을 가진 장소에서 참패를 당하여 국권을 상실했다. 그 때 여기서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죽고, 하나님의 언약궤까지 빼앗기는 수치스러운 패배를 경험했다(삼상4:1~11, 아벡전투). 그러니 에벤에셀은 그들에게 실패의 장소, 통곡의 장소, 치욕의 장소, 절망의 장소였다. 그런데 사무엘은 바로 그 에벤에셀이라는 이름으로 승리의 기념비를 세웠다. 이는 실패를 승리로, 통곡을 환희로, 치욕을 영광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기 위해서다. 하나님은 실패의 자리에 승리의 깃발을 꽂고, 전승의 기념비를 세우게 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렇다. 하나님은 십자가라는 수치의 자리에서 부활이란 영광의 꽃을 피우신 분이다. 사망이라는 절망의 장소에서 생명이라는 소망의 불꽃을 일으키신 분이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했다.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나님이 도우셔서 이 위대한 일을 해냈다는 신앙고백이다. 여기서 ‘여기까지’는 ‘지금’이란 뜻의 부사 ‘헤나’(henah/ חנה)와 ‘~까지 라는 뜻의 시간과 장소를 의미하는 전치사 ‘아드’(ad/ עד)가 결합한 것이다. 이는 시간적으로 ‘지금까지’, 장소적(지리적)으로 ‘여기까지’ 혹은 ‘이곳까지’ 라는 의미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시간적으로 ‘지금’까지 우리를 도우셨고, 또한 지리적(장소적)으로 ‘여기’까지, ‘이곳’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뜻이다.

 

에벤에셀 하나님을 경험하라!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기(이곳)까지 지금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고백에는 지금부터 여기서부터도 영원토록 도우실 것이란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본문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본문은 미스바에서 생긴 일이다(5). 본문이후를 보면 이스라엘이 ‘에그론’, ‘가드’까지 점령했다(14). 예루살렘에서 미스바까지는 사막지대다. 황량하고 메마른 땅이다. 하지만 에그론, 가드는 곡창지대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풍요롭고 기름진 땅이다. 하나님은 어제도 도우시고 오늘도 도우시더니 내일은 더 좋은 곳을 주셨다. 에벤에셀 하나님은 실패의 자리에 승리의 깃발을 꽂고, 전승의 기념비를 세우게 하시는 분이시다. 어제도 오늘도 도우시지만 내일은 더 좋게 만들어주시고, 더 좋은 곳을 주시는 분이시다. 본문이 이런 놀라운 하나님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가 살면서 이런 하나님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 본문에 그 비결이 있다. 2절이 그것이다.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여호와를 사모하니라.”에서 ‘사모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나하’(nahah/ נהה)이다. ‘울부짖다.’, ‘애도하다.’, ‘슬퍼하다.’는 뜻이다. 이는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과 태도를 잘 보여주고 있는 단어다.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인하여 비참해진 자신의 상황을 탄식하며 슬퍼하는 것이고(회개), 다른 하나는 크게 부르짖으면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기도).

 

자신의 죄를 슬퍼함

고통스러운 현실이나 해결하기 어려움 문제는 자신을 진지하게 돌아보게 하여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고, 나아가서 하나님을 찾게 하는 길잡이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고난당한 것이 유익이라’(119:71)고 했다. 그 이유는 고난을 통하여 ‘주의 말씀을 배우게 되었고’(:71), 고난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는데 ‘주의 말씀을 지키게 되었기 때문이라’(:67)고 했다. 이스라엘도 그랬다. 블레셋에게 전쟁에 패하여 국권을 빼앗기고 처참하게 짓밟히는 비참한 생활을 통해서 비로소 그 모든 원인이 하나님을 떠난 죄의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비참한 자신의 상황을 탄식하며 죄를 슬퍼하게 된 것이다. 회개하게 된 것이다. 그것을 본문은 ‘하나님을 사모하다’는 말로 표현하였다. 그래서 사무엘이 백성들을 향하여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3)고 외쳤다. 이는 한 마디로 회개에 대한 촉구이다.

 

이것이 에벤에셀 하나님을 경험하는 비결이다. 회개는 자신의 죄를 슬퍼하고 탄식하며 그 죄에서 돌아서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여 오직 하나님만 섬기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회개는 감성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행동이고(‘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의지적인 결단이다(‘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이렇게 회개하는 심령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또한 가까이 하신다. 그리고 이런 사람의 기도를 들으신다. 하나님은 귀가 막혀서 우리의 기도를 듣지 못하시고,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악의 담이 가로막혀 듣지 못하시고 보지 못하신 것이다(시68:18). 회개는 그 가로막힌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이다. 장애물이 제거되면 길이 열린 것처럼 회개하면 우리 마음과 생활에 시온의 대로가 활짝 열리게 되는 것이다. 하늘 문이 열리고 은혜의 문이 열리게 된다. 그래서 사무엘이 이스라엘 모든 백성을 미스바로 모이게 하여 그곳에서 거국적인 회개운동을 일으켰고(6), 이로 인하여 에벤에셀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었다. 본문이 그 증거다(내용설명생략).

 

미스바를 넘어 에그론과 가드까지

살다보면 알게 모르게 우리 옷에 먼지가 쌓이고 오물이 묻어 옷을 더럽히는 것처럼 우리 심령에도 죄악의 먼지가 쌓여 우리 영혼과 마음과 생활을 오염시킨다. 그러면 마음이 무뎌지고, 귀가 막히고, 눈이 어두워지게 된다. 주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된다. 영광스러운 주님을 볼 수가 없게 된다. 그래서 결국은 주님과 멀어지고, 주님의 은혜와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모쪼록 이런 죄악의 먼지를 다 털어내고 한 해를 잘 마무리 짓고 새해를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것이 형통의 비결, 에벤에셀 하나님을 경험하는 비결이다. 어제도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토록 잘되고 형통하게 되는 비결이다. 다가온 2015년도에는 2014년도에 실패했던 그 자리에 승리의 깃발을 꽂고, 승리의 기념비를 세우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지경이 사막지대인 미스바를 넘어서 풍요롭고 기름진 땅 에그론, 가드까지 넓혀지게 될 것이다.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 하시는 일에, 그리고 우리 교회에 이런 주님의 복이 임하기를 소원한다. 실패를 승리로, 통곡을 환희로, 수치를 영광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주신 에벤에셀 하나님께 감사하자! 어제도 오늘도 도우시지만 내일은 더 좋게 만들어주시고, 더 좋은 곳을 주실 에벤에셀 하나님을 찬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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