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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에 대한 비전, ‘안드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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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1,962회 작성일 15-02-15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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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에 대한 비전, ‘안드레’

요1:35~42

2015. 2/15. 08:00, 11:00

고객생애가치(Customer Lifetime Value)

 어떤 부인이 매주 어느 가게에 가서 일용품을 구입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직원의 불량한 서비스 때문에 마음이 상해서 그곳을 가지 않았다. 그 부인은 12년 후, 그곳에 들러 주인에게 자신이 그 동안 발길을 끊은 이유를 말해주었다. 그러자 주인은 부인의 충고를 귀담아 듣고 나서 진심으로 사과했다. 그리고 부인이 가고 난 뒤 한 번 계산해 보았다. 그 부인이 매주 한 번씩 25달러의 물품을 사갔다 치고 12년 동안이면 ‘15,600(25×52×12)달러였다. 12년 전, 한 직원의 고객에 대한 사소한 소홀함 때문에 그 가게는 15,600달러의 영업 손실을 입은 것이다. 이처럼 어떤 고객이 평생 기여하는 정도를 돈으로 나타낸 수치를 ‘고객생애가치(약자로 CLV)라고 한다. CLV를 산출해 보면 고객 한 명을 잃은 손실이 얼마나 큰지, 고객 한 명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할 수 있다.

 

그래서 도미노 피자에서는 배달 나가는 직원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당신은 지금 4,000달러짜리 피자를 배달하고 있는 것이다!’ 피자 한 판은 10여 달러이지만 그 피자를 시켜먹는 고객의 CLV는 4,000달러에 이른다는 뜻이다. 잘되는 회사, 성공하는 사람은 이렇게 고객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대한다. 즉 ‘한 사람의 가치’에 집중한다. 세계 제일의 세일즈맨으로 사람들은 ‘조 지라드’(J. Girard)를 꼽는다. 그는 자동차 세일즈맨(Auto Manager)으로 세계 최고의 판매량을 기록했다(12년 연속 기네스북에 기록, 매일 4대를 판매). 그의 성공비결은 ‘250의 법칙’이다. 사람은 평균 250명의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어떤 한 사람이 나를 싫어하면 그 사람은 자기와 관계된 250명에게 나를 나쁘게 말한다는 것이다. 그 한 사람이 나를 싫어하지만 결국 한 달 안에 250명이 나를 싫어하게 되고, 1년이면 나도 모르는 3,000명이 싫어하는 끔찍한 결과가 생긴다. 그는 이 사실을 깨닫고, 고객 한 명을 250명이라고 생각하고 대했다. 그 결과 최고의 오토 메니저가 된 것이다.

 

구도자 안드레

한 사람이 중요하다. 곁에 있는 한 사람, 지금 만나고 있는 한 사람이 중요하다. 사람의 가치, 특히 한 사람의 가치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고, 또한 강조하신 분이 예수님이시다(마16:26, 18:5,6, 25:40,45, 눅8:26~39, 눅15:). 그리고 이와 같은 주님의 말씀을 실천적으로 우리에게 깨우쳐준 사람이 있다. 주님의 첫 번째 제자 ‘안드레’가 바로 그 사람이다.

 

안드레는 구도자의 영성을 지녔다. 구도자란 끊임없이 질문하며 찾는 사람이다. 진리가 무엇인지, 생명이 무엇인지, 어떤 것이 인생의 참된 길인지, 어떻게 하면 온전함에 이를 수가 있는지 끊임없이 질문하며 찾는 사람이다. 그가 어부면서 세례요한의 제자였다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그는 어부였다(마4:18~20). 그런데 본문은 그가 세례 요한의 제자라고 한다. 그가 어부면서 세례요한의 제자였다는 것은 단순히 생계형 어부가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물론 생계를 위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어부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한 것이 따로 있었다는 뜻이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목마름, 약속하신 메시야에 대한 목마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목마름이었고, 열정이었다. 그래서 그는 세례 요한의 제자가 되었던 것이다.

 

이런 그가 어느 날,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36) 하는 말을 듣게 되었다. 이 말을 듣고 그는 관심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게 되었다. 이 또한 그가 구도자의 영성을 가졌다는 것을 증거한다. 주님은 이런 그에게 “무엇을 구하느냐?” 라고 물으셨고, 그는 무엇을 원한다는 대답대신 ‘어디 계십니까?’ 라고 물었다(38). 주님에게서 무엇을 얻고자 한 것이 아니라 주님과 사귐을 갖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스승인 세례 요한의 말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자 주님께서 “와서 보라”(39)고 하셨다. 주님을 따라 간 그는 그날 온 종일 주님과 함께 지냈고, 그에게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그토록 그가 갈망하던 것을 찾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그가 하는 말로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는 자기 형제 베드로를 찾아가서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41)고 했다. 이는 그가 끊임없이 질문하고 몸부림치며 찾았던 ‘진리, 생명, 인생의 참된 길’을 찾았다는 감격의 고백이다. 그 순간, 그는 세례 요한의 제자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방향을 바꾸었다. 이것은 배반이나 변절이 아니다. 오히려 세례 요한이 지향하는 올바른 변화였다(3:30). 그렇게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는 주님의 첫 번째 제자가 되었다. 형인 베드로보다 먼저 주님을 따랐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그를 ‘프로토클레토스’(προτοκλητος)라고 했다. ‘먼저 부름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즉 ‘첫 번째 제자’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그에게 준 것이다.

 

구도자에서 전도자로

이렇게 주님과의 첫 만남을 통해 주님이 메시야이신 것을 알게 된 안드레는 가장 먼저 자기 형제 베드로를 주님께 데리고 갔다. 구도자에서 이제 자신이 발견한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전도자가 된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그에 대한 기록이 성경에 많지 않다. 하지만 모두 그가 사람을 주님께 데려온 것과 관련이 있다. 그는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일을 잘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전달자’ 혹은 ‘소개자’라는 별명이 붙어있다. 특히 개별적으로 사람을 주님께 인도했다. 그를 ‘개인전도의 챔피언’이라고 부르고, 개인전도를 ‘안드레식 전도’라고 부른 이유가 이 때문이다.

 

우선 본문에서 그는 자기가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고, 나누기를 원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제일 먼저 다가간 사람이 가장 가까운 데 있는 사람, 형제 베드로였다.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41,42). 여기서 시몬이 바로 베드로다.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자신처럼 주님을 만나고 믿고 영생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전도란 내가 좋으니 당신도 함께 좋기를 바라고, 내가 기쁘니 당신도 함께 기쁘기를 바라고, 내가 행복하니 당신도 함께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내가 발견한 진리, 내가 찾은 생명을 당신도 발견하고 찾기를 바라는 것, 내가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었으니 당신도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기를 바라는 것이 전도다. 이것이 ‘전도자의 마음’이다. 그에게는 이와 같은 전도자의 마음이 있었다.

 

6장에도 그가 사람을 인도한 이야기가 나온다. 주님의 말씀을 듣느라 3일 동안이나 굶은 5천여 명의 사람들에게 떡과 고기를 제공한 사건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다. 그들에게 조금씩 요기만 시켜도 2백 데나리온(노동자 1년 치의 임금에 해당)의 돈이 필요한데, 그 많은 돈이 없기도 하지만 있어도 음식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그곳은 빈들이었기 때문이다. 어찌할 바를 모른 다른 제자들이 그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 그는 군중 속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한 아이를 발견하고, 그를 주님께로 데리고 왔다. 그러자 새로운 역사가 일어났다. 그의 마음은 두 가지였다. ‘기대하는 마음, 의심하는 마음!’ 이 두 마음이 서로 흔들렸다. 성경은 그의 흔들리는 마음을 잘 보여준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6:8,9). 의심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 적은 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무슨 도움이 되며, 이 상황을 해결하는데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스스로 의심하면서 주님께 나아갔다. 그런데 주님은 그 적은 것으로 기적을 일으키셨다. 물론 온전한 믿음에는 의심이 없다. 믿음이 있으면 의심은 사라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실존적 믿음에는 안드레처럼 의심이 공존해 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아직 온전함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의심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의심하지만 의심보다 신뢰가 더 크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주님께 맡기는 것이다. 주님께 더 큰 신뢰가 있기 때문에 의심하면서 맡기는 것이다. 그렇게 했을 때, 놀라운 생명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안드레가 찾은 것은 아주 작은 것이었다. 그래서 이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의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주님께 맡기니 여기에서 생명의 사건, 기적이 일어났다.

⚈ 또 하나의 사건은 12장에서 헬라(이방)인 몇 사람을 주님께 인도한 사건이다(설명생략).

 

한 사람에 대한 비전(ONE MAN VISION)

안드레의 삶은 전형적인 제2인자의 삶이었다. 그는 주목받을 만한 일을 한 적이 없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도 적고, 기록된 내용에서도 그는 항상 배경이지 주인공이 아니었다. 본문 역시 그가 주인공이 아니다. 그의 형 베드로가 어떻게 주님을 만나게 되었는가 보여준 사건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를 만나는 사람마다 복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가 복의 근원도 아닌데, 그를 만난 사람들이 복을 받았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그가 만나는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였기 때문이다. 주님이 능력이고, 주님이 복의 근원이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사람도, 아무리 사소한 것도 주님을 만나면 새롭게 된다. 그를 통해서 이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그를 만나는 사람마다 복을 받은 것이다. 그는 이 비밀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개개인을 주님께 소개하고 인도한 것이다. 바로 여기서 ‘한 사람 비전’이 싹튼 것이다. 이는 한 사람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안드레는 베드로처럼 3천명 5천명을 회개시키는 역사를 일으키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가 인도했던 한 사람 베드로가 3천명 5천명을 회개시키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베드로나 요한처럼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바울처럼 많은 기적을 일으킨 적은 없다. 하지만 그가 인도했던 한 소년을 통해 주님께서 5천명의 굶주린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는 기적을 베푸셨다. 그가 한 것은 아니지만 그를 통해서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이다. 이것이 ‘한 사람 비전’이다. 한 영혼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비전이다. 에드워드 킴벌이라는 사람이 어느 날 구두를 고치는 청년에게 구두를 고치는 동안 복음을 전했다. 이 청년이 주님을 영접하였다. 이 청년이 바로 미국 교회사에 위대한 부흥의 물결을 일으킨 하나님의 사람 D.L. 무디다. 이 또한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그를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안드레처럼 저와 여러분이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한 사람 비전으로 충만하기를 바란다. 이것이 교회를 되게 하고, 가정을, 관계를, 그리고 인생을 잘되게 하는 비결이다. ‘주여, 내게 한 사람을 주소서. 그리고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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