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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클을 넘어선 테크닉, ‘기드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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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1,849회 작성일 15-02-01 16:06

본문

태클을 넘어선 테크닉, ‘기드온’

삿8:1~3

2015. 2/1. 08:00, 11:00

태클맨(tackleman)

 속담에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아픈 것은 못 참는다.’는 말이 있다. 서러움 중에서 가장 큰 서러움이 배고픈 서러움이라고 한다. 그런데 끼니를 굶는 ‘배고픈 것’보다 남 잘되는 것을 보는 ‘배아픈 것’을 참는 것이 더 힘들다는 뜻이다. 여기서 남 잘되는 것이 배가 아픈 것은 ‘시기심과 질투심’ 때문이다. 그만큼 시기심과 질투심이 무섭다는 것이다. 시기와 질투는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마음이다. 주로 남과의 비교하는 마음에서 생긴다. 이 또한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열등감, 혹은 낮은 자존감과 깊은 관련이 있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자신을 주체적으로 보지 않고, 항상 남과 비교해서 본다. 그래서 자기보다 못한 사람이면 무시하고, 자기보다 낫거나 자기와 다른 사람이면 시기와 질투를 한다. 이것은 멀리 있고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주로 가까이에 있는 잘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같은 부류의 일을 하고, 같은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다(가인과 아벨 사건). 아무튼 이 시기와 질투는 우리의 삶에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이 때문에 개인과 공동체가 위기에 빠지곤 한다.

 

운동경기, 특히 축구경기에서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공을 빼앗는 모든 동작을 ‘태클(tackle)이라 한다. 태클은 축구경기에서 아주 중요한 기술이다. 그러나 상대에게 위협이 되거나 위해를 가하는 무모한 태클은 가차 없이 옐로카드가 주어지고, 반복적으로 일어나면 레드카드가 주어져 퇴장을 당한다. 물론 인생이라는 경기장에서는 태클을 정당한 기술로 인정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클은 우리 생활에서 일상화되어 있고, 태클을 잘하는 사람을 ‘태클맨(tackleman, 혹은 troublemaker)이라 부른다. 성경에서는 에브라임 지파가 바로 이 태클맨이다. 그들은 사사기에서 두 번이나 태클을 걸어 공동체를 위기에 빠뜨렸다(삿12:1~6 참조). 이런 태클도 결국은 시기와 질투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운동경기를 보면 뛰어난 선수는 상대방의 태클에 잘 넘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태클을 넘어서는 테크닉(technic)을 발휘하여 골을 성공시킨다. 마찬가지로 인생에서도 수많은 태클을 뛰어넘는 테크닉을 발휘한 사람들이 많다. 본문에서 기드온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태클에 대한 기드온의 반응

기드온은 300명이라는 적은 수로 135,000명이라는 대군을 물리쳤다(8:10). 피타고라스의 말대로 이 세상은 숫자의 신이 지배한다. 보다 많은 수의 군대, 많은 수의 무기, 많은 수의 재물, 많은 기술, 많은 지식, 많은 정보 등 숫자가 많은 것이 이기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이 싸움은 이런 상식을 뒤엎는 사건이었다. 적은 수로 많은 수를 무너뜨렸다. 이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상식과 합리를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분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대승을 거둔 기드온에게 이제 도망치는 적을 물리치는 일만 남았다. 그래서 그는 처음에 소집하지 않았던 에브라임 지파에게 편지를 보내 요단강 수로를 점령하고 도망치는 적을 치라는 명령을 내렸다(7:24). 그들은 기드온의 명령대로 요단강 수로를 점령하여 미디안의 퇴로를 차단하고 거기서 미디안의 두 방백 오렙과 스엡을 사로잡아 죽였다. 늦게 전쟁에 참여했지만 큰 공을 세웠다. 여기서 참으로 안타깝고 아쉬운 것은 그들이 늦게라도 전쟁에 참여하여 공을 세우도록 한 것에 감사하지 못한 것이다. 감사가 있는 곳엔 불평과 시비가 사라지지만 감사가 없는 곳엔 불평과 시비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기드온이 처음부터 자기들을 부르지 않은 것을 불평하며 시비를 걸었다.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찌 됨이냐.”(1).

 

그들이 이렇게 태클을 건 것은 민족을 구원하는 이 영광스러운 성전(聖戰)에 처음부터 참여하지 못한 아쉬움 때문이 아니다. 전쟁의 주도권을 기드온과 그가 소속된 므낫세 지파에게 빼앗겼다는 것 때문이다. 전쟁을 통해 영광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기드온과 므낫세 지파에게 빼앗긴 것 때문에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이 사실이 너무너무 배가 아팠던 것이다. 결국 이 역시 시기와 질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것은 자칫 미디안과의 전쟁을 마무리하기도 전에 내부의 분열로 내전을 초래할 수도 있는 심각한 일이었다. 그런데 기드온은 그들의 태클을 테크닉을 발휘하여 받아넘겼다. 그래서 위기를 은혜롭게 잘 해결하였다. 이로써 기드온은 전쟁을 승리로 인끈 영웅적인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내부의 갈등을 은혜롭게 해결한 지혜로운 지도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인정하라!

벤자민 프랭클린은 포용성이 있고 겸손하기로 유명한 정치가라고 한다. 그에게는 존경하는 스승이 있었다. 그런데 스승의 집은 문이 낮아서 머리를 숙이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었다. 어느 날, 그가 스승의 집을 방문하였다가 고개를 숙여야한다는 사실을 잊고 머리를 문에 세게 부딪치고 말았다. 그 때 그의 스승이 말했다. ‘여보게 머리를 숙이게. 자네가 이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부딪치는 일이 많을 거야. 그러나 머리를 푹 숙이면 부딪치는 일이 없을 걸세.’ 그 후 그는 스승의 가르침대로 늘 자신을 낮추었고, 그래서 누구도 포용하는 좋은 정치가가 될 수 있었다. 나를 낮추는 일은 하나님의 진노도 사람의 화도 다 풀리게 한다.

 

기드온이 에브라임 사람들의 원망과 시비를 평화롭게 해결한 것도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을 낮추고 에브라임 사람들을 인정해준 것이다. 기드온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제 행한 일이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2). 여기서 ‘끝물 포도’는 맨 마중에 거둬들인 질 낮은 포도를 뜻한다. 맛도, 당도도, 질도 떨어진 포도로서의 가치를 가지지 못한 찌꺼기이다. 이러한 에브라임의 찌꺼기가 므낫세 지파 아비에셀에서 맨 처음 수확한 질 좋은 포도보다 낫다는 것이다. 이것은 에브라임 지파를 높여준 말로, 자신이 속한 므낫세 지파는 에브라임 지파에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풍자한 것이다. 이어서 비록 그들이 이 전쟁의 막바지에 참여하였지만 처음부터 참여한 자신보다 그 공로가 더 크다고 그들의 공을 인정했다(3).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15:1)고 했다. 기드온의 이 말 한마디가 에브라임의 분노를 쉬게 했다. 기드온처럼 격한 말을 듣고도 부드럽게 대답을 할 수 있는 것이 겸손의 힘이다. 이런 겸손은 다른 사람을 항상 자신보다 낫게 보게 만들고, 낫게 말하게 만든다. 그래서 문제를 평화롭고 은혜롭게 해결한다. 여기에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높여주는 기드온의 성숙한 태도와 달래는 말 한마디에 노가 풀리는 에브라임의 미숙함이 잘 드러나고 있다.

 

아무튼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고 인정하는 겸손은 최고의 경쟁력이다. 상대를 무장 해제시키는 것이 겸손이다. 시기의 칼, 질투의 칼, 분노의 칼을 뽑았을지라도 그것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 겸손이다. 겸손은 상대로 하여금 존중받고 사랑받고 인정받고 있다는 느낌을 들게 만든다. 그리고 사람은 자신을 존중해주고 사랑해주고 인정해주는 사람 앞에선 무장을 해제한다. 에브라임을 높여주고 인정해주는 기드온의 겸손한 태도와 말이 그들의 시비를 잠재우고, 노를 풀리게 만들었다. 많은 갈등이 시기와 질투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갈등은 감정적으로 대응하면 더욱 커진다. 하지만 겸손하게 대처하면 갈등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화평이 찾아온다.

 

아미그달라(amygdala)

우리의 뇌에는 정서나 공포 등에 대한 기억과 관련된 ‘아미그달라’(扁桃體)라는 곳이 있다. 아미그달라는 사람이 직면하는 하루 평균 2만 가지 상황에 대해 단순하게 ‘동지와 적’으로 구분한다. 동지이면(즉 생존에 위협이 없으면) ‘유쾌’로, 그 반대면 ‘불쾌’로 구분한다. 그런데 단순한 구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에 따라 반응도 보인다. 그래서 누군가가 인정해주면 동지라고 인식하여 유쾌해지고 더욱 친밀감을 느낀다. 반대로 누군가가 무시하면 기분이 나빠지고 거리감을 두게 되는데, 자신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적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아미그달라의 나이가 불과 다섯 살이라는 데 있다. 아미그달라는 다섯 살까지만 자라고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아무리 학식이 많고 덕망이 높은 사람도 역시 다섯 살짜리 아미그달라를 몸에 지니고 산다. 절대로 이 아미그달라가 더 이상 자라지 않는데 인간사의 비극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인간관계를 성공하려면 상대방의 아미그달라를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이다. 상대방의 아미그달라가 나를 동지로 인식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심리학자들은 누군가의 아미그달라를 내 편으로 만드는 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1. Foot-in-the-door(작은 부탁을 하고 점차 수위를 높이는 것)

2. 경청(열심히 들어주는 것)

3. 미러링(행동이나 말투를 따라하는 것)

4. 속마음 드러내기

 

저는 이 아미그달라를 이해하면서 제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생겼다. 사실 저는 나이도 먹을 만큼 먹고, 공부도 웬만큼 했고, 기도도 하고 있는데 감정처리가 서툴러 아내에게 자녀들에게 상처를 줄 때가 많고, 이런 제 자신에 늘 실망을 한다. 이제 그 비밀을 알았다. 그것은 제 안에 있는 다섯 살짜리가 문제였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 다섯 살짜리 아미그달라를 어떻게 달래느냐가 건강한 삶, 건강한 관계의 비결이다. 오늘 본문에서 보여준 기드온의 태도야말로 나의 아미그달라, 그리고 누군가의 아미그달라를 내 편으로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그것은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존중해주고 인정해주는 것이다. 살다보면 뜻밖의 태클을 만날 수 있다. 이런 태클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넘어서기 위해선 테크닉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겸손이다.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존중해주고 인정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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