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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을 주는 사람, ‘백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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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847회 작성일 15-02-22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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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을 주는 사람, ‘백부장’

눅7:2~10(신100면) cf. 마8:5~13(신11면)

2015. 2/22. 08:00, 11:00

3가지 방문(訪問)

 홍콩의 갑부 이가성 회장의 운전기사 이야기다. 30년간 이 회장의 차를 운전하다가 그만두게 되었다. 이 회장은 그동안 그의 노고를 위로하고 노년을 편안히 보내도록 위로금으로 2백만위엔을 수표로 주었다. 그런데 그가 사양하며 ‘저도 그 정도는 모아놓았습니다.’고 했다. 이 회장은 이를 기이하게 여겨 물었다. ‘월급이 겨우 5,6천위엔이었데 어떻게 그런 큰 돈을 저축했지요?’ 기사가 말했다. ‘제가 운전하면서 회장님이 뒷자리에서 전화하는 것을 듣고 땅을 사면 저도 조금 사놓았고, 주식을 사면 저도 따라서 약간 구입해 놓은 것이 지금 이렇게 되었습니다.’ 물은 어떤 그릇에 담느냐에 따라서 모양이 달라지지만 사람은 어떤 사람과 사귀느냐에 따라서 운명이 결정이 된다고 했다. 사람은 누구를 만나고 어떤 사람과 관계를 맺느냐가 중요하다. 그래서 ‘뺨을 맞아도 금가락지 낀 손에 맞아라.’는 속담이 있는 것이다.

 

미국 카네기공대 졸업생 중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추적 조사한 결과,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성공하는데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은 15%밖에 영향을 주지 않았고. 나머지 85%가 인간관계’라고 했다.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인맥관리를 탁원하게 잘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특히 ‘세 가지 방문’을 잘한다고 한다. 그 세 가지 방문이란 입의 방문, 손의 방문, 발의 방문이 그것이다. 입의 방문은 전화나 말로 상대방을 칭찬하고 격려하여 용기를 주는 것이다. 손의 방문은 편지나 문자 등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전달하고, 힘들고 지쳤을 때 손으로 따뜻하게 토닥여주고 붙잡아주고 이끌어주고 안아주는 것이다. 발의 방문은 아프거나 어려움이 있을 때 직접 찾아가서 위문하고 위로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움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인간관계를 넓혀가고 유지해갔다. 인간관계의 열쇠는 ‘감동’이기 때문이다. 감동을 주어 마음을 얻어야 든든한 관계가 만들어진다. 사람은 누구든지 감동을 준 사람, 감동을 준 사건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 요즈음 기업들이 고객만족, 심지어는 고객졸도라는 자극적인 표현을 쓰면서까지 ‘감동경영’을 강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감동을 주어야 고객이 잊지 않고 기억하기 때문이고, 고객이 기억해야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본문에 주변 사람들과 나아가서 예수님에게까지 감동을 준 사람이 나온다.

 

통념을 뛰어넘은 사랑의 실천

본문은 가버나움에 주둔한 로마 백부장 이야기다. 그가 부리고 있는 한 종(노예)이 죽을병에 걸렸다(마태에선 그의 병이 중풍이라고 함). 그런데 그를 고치기 위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평소에 알고 지내던 유대인 장로 몇 사람을 주님께 보내어 고쳐달라고 요청했다(마태에선 그가 직접 주님을 찾아옴). 당시 사회적 통념에 따르면 노예는 사람이 아니라 ‘말하는’ 도구였다. 그 도구가 죽을병에 걸렸다는 것은 ‘사용가치가 상실됐다’는 뜻이다. 사용가치를 상실한 도구(물건)는 버리면 그만이다. 그런데 그는 종을 고치겠다고 다른 사람까지 동원하여 주님께 부탁을 한 것이다. 그 이유를 성경은 그가 종을 자식처럼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2절은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이라고 했다. 여기서 ‘사랑하는’은 ‘가치있는, 귀한’이란 뜻이다. 종을 당시 사회적 통념으로 바라보지 않고 가치있고 소중한 인격으로 보았다는 뜻이다. 심지어 7절에서는 그 종을 ‘내 하인’이라고 했다. 여기서 하인은 ‘파이스’(παιϛ)로, 파이스에는 ‘아들’이라는 뜻도 있다. 이렇게 그가 ‘병든 종을 가치있는 존재, 귀한 존재로 아들처럼 여겼다’는 뜻이다. 또한 그가 유대 장로들까지 동원하여(마태에선 자신이 직접 나서서) 주님께 부탁한 모습에서도 종에 대한 그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다. 그의 부탁을 받은 장로들의 이야기는 더욱 감동적이다. “이에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4,5). 그들은 자신의 일처럼 ‘간절히’ 구했다. 이렇게 간절히 구한 것은 그가 그들에게 베풀어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였다. 비록 점령군으로 와있지만 유대인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회당도 지어주었다. 이와 같은 그의 호의가 점령지 백성의 마음을 사기위한 일종의 선심이 아닐까 의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도 이런 일들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문은 그의 이런 행위가 진심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5)에서 ‘사랑하고’ 라는 단어가 바로 그것이다. 이 단어는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인 신적 사랑’을 뜻하는 ‘아가페’(αγαπη)다. 그가 이렇게 헌신적이고 희생적으로 사랑하여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이것도 흔치 않는 모습이다. 잘 아는 대로 지배자와 피지배 사이는 감동보다는 갈등이 더 보편적이다. 지배자는 억압과 압제를 했고 피지배자는 그것에 맞서 저항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은 서로 감동을 주는 아름다운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당시 로마사회에서는 ‘긍휼과 자비를 영혼의 질병’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환경에서 자라고 훈련받은 병사는 냉정하고 잔인할수록 훌륭하다고 칭찬을 받았다. 그래서 점령지에 대한 만행(착취, 학대, 학살 등)이 자행됐고, 때문에 폭동이 자주 일어났다. 그도 역시 이렇게 훈련을 받고 자란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이런 흐름을 따르지 않는 사랑의 사람이었다. 병든 노예를 자식처럼 아끼며 사랑했고, 점령지 백성을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으로 사랑했다. 이런 사랑에 유대 골수분자인 장로들까지 감동한 것이다. 그래서 그를 위해 발 벗고 나선 것이다. 이와 같이 사회적 통념과 신분을 뛰어넘어 사랑을 실천하는 그의 모습은 감동 그 자체다. 그렇다. 사랑의 에너지는 감동이다. 사랑은 감동을 주는 행위다. 사랑할 때 감동은 강해진다. 그래서 주님은 ‘서로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다. 서로 감동을 주고받으며 살라는 말씀이다. 심지어는 미워하는 사람에게도 감동을 주라는 말씀이다.

 

놀라운 믿음의 고백

성경에 주님을 감동시킨 사람들이 몇 있다. 주님을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한 베드로(마16:13~20), 귀신 들린 딸을 위해 수모를 겪으면서까지 주님께 나아간 수로보니게 여인(막7:24~30), 가난하지만 자신의 생활비 전부인 동전 두 닢을 헌금한 과부(막12:41~44), 주님 발에 값비싼 향유를 쏟아 부은 베다니 마리아(요12:1~8)가 그들이다. 이들 중에서 베드로와 수로보니게 여인은 놀라운 신앙고백을 통하여 주님을 감동시켰다. 본문의 백부장도 그 중 한 사람인데, 그 역시 놀라운 신앙고백을 통해 주님을 감동시켰다.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6~8).

 

급한 마음에 주님을 모셔오라고 했지만 생각해보니 황송한 일이었다. 자기가 무엇이라고 주님을 오라 가라 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급히 친구를 보내 애써 자기 집까지 찾아오시지 말고 ‘말씀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리만 해도 자기 하인이 나을 수 있다고 고백했다. 자기 같은 사람도 말 한 마디면 사람들이 그대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주님의 심방이 부담스럽고 귀찮아서 피하려는 핑계가 아니다. 정말 그의 믿음이고, 믿음의 고백이다. 비록 주님을 만나본 적은 없지만 그는 주님의 능력을 확신했다. 주님께서 친히 자기 집을 방문해 주시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종의 병이 나을 것이라고 믿었다. 특히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라는 고백은 말씀만으로도 병을 고칠 수 있는 주님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다. 주님은 그의 이런 믿음의 고백에 크게 감동하셨다. 그래서 주님은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9)고 극찬하신 것이다. 그가 비록 이방인이지만 이스라엘 백성을 능가하는 위대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믿음의 고백에 감동하신 주님은 그의 종을 즉시 고쳐주셨다. 인생의 성패는 주님께 있다. 그리고 주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관건이다. 그 비결이 감동이다. 사람도 감동을 받으면 무엇이든 보답하고 싶어진다. 주님도 마찬가지다. 감동적인 믿음의 고백, 감동적인 믿음의 찬양, 감동적인 믿음의 기도, 감동적인 믿음의 예배, 감동적인 믿음의 섬김, 감동적인 믿음의 헌신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란다.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되자!

어느 교수가 학생들에게 ‘현대인이 가장 갖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당연히 학생들의 대답이 ‘든든한 직업, 바라는 배우자, 안락한 집, 멋진 자동차 등’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의외의 답이 나왔다. 그것은 ‘감동’이었다. 물론 물건처럼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 갖고 싶고 받고 싶은 것이 감동이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현대인은 유례없이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지만 마음이 많이 ‘고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감동에 굶주려있다. 그래서 요즈음 사람들은 ‘감동을 받았다’고 말하지 않고, ‘감동을 먹었다’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의 마음은 어떤 소유로도 채울 수 없다. 감동을 받아야 마음이 충만해지고 풍성해진다. 감탄하게 되고, 감격하게 되고, 감사하게 된다. 심리학자 아브라함 매슬로우의 표현대로 ‘절정경험(peak experience)을 느끼게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감동을 받아야 움직이게 된다. 감동이란 ‘느낄’ 감(感)에 ‘움직일’ 동(動)으로 ‘느껴야 움직인다.’는 뜻이다. 이는 ‘감즉동’(感卽動)에서 온 말이다. 사람은 많이 배우고 많이 알아서 변하는 것이 아니다. 감동을 받아야 변한다.

 

안도현 시인은 〈너에게 묻는다.〉에서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고 묻는다. 본문의 백부장은 연탄처럼 주변 사람들과 주님께 뜨거운 감동을 준 사람이었다. 이 백부장은 주님이 원하시고, 이 시대와 사람들이 원하는 신자와 교회의 모습이다. 그것은 뜨거운 감동을 주는 사람, 뜨거운 감동을 주는 교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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