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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다니엘의 세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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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6,771회 작성일 15-01-18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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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다니엘의 세 친구’

단3:13~18

2015. 1/18. 08:00, 11:00

세 종류의 신앙

 세 종류의 신앙이 있다. 첫째는 ‘때문에’(Because)의 신앙이다. 이는 결과에 따라 반응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과적인 신앙이라고 한다. ‘~했기 때문에 한다.’ 나를 도와주었기 때문에 사랑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주었기 때문에 감사하고, 나를 신뢰하기 때문에 신뢰하는 것이다. 하나님도 이런 이유에서 사랑하고 신뢰하고 섬기는 것이 때문에 신앙이다. 둘째는 ‘만일’(If)의 신앙이다. 이는 조건을 걸고 반응하는 것이다. 그래서 조건적인 신앙이라고 한다. ‘~하면(혹은 해주면) 하겠다.’ 혹은 ‘~할 테니 해달라.’ 원하는 것을 해주고, 선처해 주고, 은혜와 복을 베풀어주면 사랑하고 감사하고 믿겠다는 차원이다. 이렇게 조건을 건 신앙생활을 만일의 신앙이라고 한다. 대부분 우리의 신앙, 특히 기도가 이 차원에 머물고 있다. 셋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의 신앙이다. 이는 상대적(Because)이고 조건적(If)인 신앙과 반대되는 것으로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신앙이다. 이유나 조건을 내세우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감사하고 믿고 따르는 신앙이다. 감사할 것도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고, 기뻐할 일도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하고, 사랑할 것도 없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신앙이다. 이를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이라고도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러한 사랑, 이러한 감사, 이러한 섬김, 이러한 신앙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다니엘의 세 친구

아프리카 초원지대에서 살고 있는 독수리과에 속한 ‘비서새’가 있다. 머리에 있는 깃털이 비서가 귀에 펜을 꽂은 것과 같아 붙여진 이름이다. 2m나 되는 큰 날개로 공중을 날다가 먹잇감을 발견하면 쏜살같이 내려가 낚아챈다. 그런데 이 새에게 한 가지 이상한 습성이 있다. 그것은 땅에 있을 때 맹수의 공격을 받으면 큰 날개로 날지 않고 달린다는 것이다. 당황한 나머지 자신이 날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결국 맹수에게 잡히고 만다. 신앙생활에서도 비서새와 같은 사람이 있다. 평상시에는 감사도 찬양도 기도도 잘한다. 그러나 삶의 위기를 만나면 이 모두를 잊어버린다. 노련한 등반가는 야산을 오를 때가 아니라 험산을 오를 때 비로소 그 진가가 발휘된다. 능숙한 사공이냐 아니냐는 고요한 강에서는 알 수 없다. 풍랑이 일어나 거친 강을 건널 때 비로소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참 신앙도 평안할 때는 그 진위(眞僞)를 알 수가 없다. 환란과 시련, 그리고 큰 어려움에 부딪혀봐야 알 수 있다. 본문에 인생의 위기에서 신앙의 진가를 보여준 위대한 신앙인들이 나온다.

 

다니엘의 세 친구(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그 주인공이다. 그들은 앞에서 소개한 소위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그들 역시 다니엘과 함께 바벨론의 1차 침략 때(주전605년) 포로로 끌려온 유대 소년들이다. 바벨론 황실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3년 동안 훈련을 받은 다음 바벨론 지방을 다스리는 관리가 되었다(2:49). 하지만 얼마 후 그들에게 큰 신앙적 위기가 찾아왔다. 그것은 대 제국을 건설한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이 외적으로는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내적으로는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자신을 위한 거대한(높이 30m 넓이 3m) 금 신상을 만들어 두라 평지에 세운 것이다(1). 그리고 전국의 모든 관리를 신상의 낙성식에 참여하게 하여 각종 악기소리에 맞춰서 그 신상에게 절을 하도록 강요했다(2~5). 절을 하지 않으면 누구든지 ‘즉시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라.’(6)고 위협했다. 이것은 유일하신 하나님만 섬기는 그들에게 심각한 위기였다. 그렇지만 그들은 왕의 신상에 절을 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고소를 당하여(8~12), 왕 앞으로 끌려가게 되었다(13). 왕은 그들을 즉시 처결하지 않고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겠으니 절을 하라고 설득했다. 그러지 않으면 풀무불에 던져 넣을 것이라 위협하며, 어떤 신도 자신의 손에서 구하여 내지 못하리라 장담했다(15). 그러나 그들은 왕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느부갓네살 왕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 아옵소서.”(16,17,18).

 

능히 건져내시겠고, 건져내시리라.

이는 절대 권력자의 회유와 위협 앞에서 드린 다니엘 세 친구의 담대한 신앙고백이다. 한 마디로 왕과는 어떤 타협도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16). 아니 그럴 의사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회유와 협박을 담고 있는 왕의 제안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습니다.’고 일축했다. 이와 같은 담대한 선언에는 두 가지 중요한 내용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이 ‘능히 건져내시리라.’(17)는 확신이다. 일종의 구원의 확신이다. 느부갓네살 왕은 그들의 생명이 자신의 손에 달려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으로 회유하고 또한 위협했다. 사실 이는 느부갓네살 뿐만 아니라 통치자라면 누구나 그랬다. 생명을 담보로 사람들을 회유하고 위협해서 자신을 따르고 섬기도록 했다. 오늘날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들은 생명이 왕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께 있고, 때문에 그 하나님이 건져주시리라 확신했다. 하나님만 구원자시라는 고백이고 선언이다(이것이 성경 전체의 주제이기도 하지만 본서의 핵심주제이다.). 이것이 17절에 잘 나타나 있다(설명생략). 왕의 제안을 일축할 수 있는 용기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러니 그들에게 왕도 왕이 위협하고 있는 맹렬한 풀무불도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라 확신한 것이다. 그리고 본문에 이어 19절에서 27절을 보면 이 확신이 현실이 되었다(내용생략).

 

내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내게 생사화복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나를 어떻게 할 수 없다.’ 이것이 곧 신앙생활의 출발이다. 우리에겐 이런 신앙적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에 작은 시련과 어려움에도 염려하고 낙심해서 무너지는 것이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이와 같은 신앙의 고백과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죽이겠다고 위협하는 왕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담대하게 구원자는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이 구원해주시리라 선언하였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되는 복을 경험하여 하나님께 큰 영광을 드렸다(28,29). 또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니까 자신들이 더 잘되는 복을 받았다(30). 작은 시험 앞에서도 무너지는 나약한 신자가 아니라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어떤 시련 앞에서도 담대함을 잃지 않는 믿음의 용장이 되기를 바란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그들이 왕의 제안을 일축했던 것은 하나님이 능히 건져내시리라는 확신과 함께 또 하나 중요한 신앙적 태도 때문이다. 그것은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18) 라는 신앙적 태도이다.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 능히 왕의 손과 풀무불 가운데서 건져주시겠지만 설령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즉 건져주시지 않더라도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해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그 뜻에 순종하겠다는 고백이다. 즉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종하겠다는 뜻이다. 왕의 신상에 절을 하지 않는 것은 처음부터 죽기를 각오하고 한 일이었다. 14절은 왕이 그들을 취조하는 내용인데, 그 마지막 부분이 개역성경에는 ‘짐짓 그리하였느냐’로 되어 있다. 여기서 ‘짐짓’이란 말은 ‘의도적’, 혹은 ‘고의로’란 뜻이다. 그들이 왕의 신상에 절을 하지 않은 것은 의도적이었다는 것이다. 즉결처형이 공고된 사건을 의도적으로 거부했다는 것은 이미 죽을 각오를 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것을 ‘그렇게 하지 아니할지라도’ 신앙, ‘전천후’ 신앙,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능히 건져내시라는 확신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이다. 이것은 건져내지 않아도, 그래서 생명이 끊어져도,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도 섬기지 않겠다는 고백이다. 기적이 있어도 하나님을 섬기겠고, 기적이 없어도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신앙이다. 좋을 때만 섬기는 것이 아니라 나쁠 때도 섬기고, 잘 될 때만 섬기는 것이 아니라 안 될 때도, 성공할 때만 아니라 실패할 때도, 슬플 때도, 없을 때도, 사방이 막혀 형통하지 못할 때도 섬기겠다는 신앙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든 거기에 절대 순종하겠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는 위대한 신앙인의 공통적인 고백이자 삶의 태도였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들을 가리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히11:38)고 했다. 하나님은 이런 믿음의 사람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고(28), 이런 사람들을 통하여 세상을 변화시키시고(29), 이런 사람들에게 복을 주신다(30).

 

문제는 믿음이다!

기쁨의 반대는 슬픔이 아니다. 감사의 반대는 불평이나 원망이 아니다. 소망(희망)의 반대는 절망이나 낙심이 아니고,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고, 성공의 반대는 실패가 아니다. 그 반대는 ‘불신앙’이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작은 아픔에도 슬퍼하고, 믿음이 없기 때문에 작은 일에도 불평과 원망을 하고, 믿음이 없기 때문에 작은 어려움에도 낙심하고 절망을 한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미워하는 감정을 털어내지 못하고, 믿음이 없기 때문에 이루지 못한 것을 실패라고 말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한다. 이 모두는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들이다. 오직 ‘그렇지 아니 하실지라도’ 라는 믿음이 있어야 가능한 일들이다. 이것은 단지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모든 일에 그렇다. 그러니 문제는 믿음이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했다(히11:6). 그래서 주님은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고 하셨다. 이는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의 사람을 볼 수 있겠느냐?’는 의미와 (반드시)믿음을 보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씀이다. 믿음이 없이는 주님을 기쁘시게 못한다. 주님은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을 찾으신다. 다니엘 세 친구처럼 구원자는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믿음, 그래서 어떤 상황에 처하든 하나님께서 건져주시리라는 확신하는 믿음의 사람을 찾으신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무엇이든 순종하는 믿음, 그래서 환경과 상황을 초월하여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르는 믿음의 사람을 찾으신다. 주님께서 간절히 찾으시는 그 믿음의 사람이 저와 여러분이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런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역이 되고, 복을 누리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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