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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가까이 한 사람의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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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364회 작성일 15-08-30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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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가까이 한 사람의 복

삼하6:6~11

2015. 8/30, 08:00, 11:00

힘입니까? 짐입니까?

어느 영어학원 광고지에 이런 문구가 있었다. ‘당신에게 영어는 힘입니까? 짐입니까?’ 중요한 질문이라 생각한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둘 다라고 생각하겠지만 결국 영어공부는 영어를 힘이라고 생각하느냐 짐이라고 생각하느냐 그 태도에 따라 좌우되기 때문이다. 힘이라고 생각한 사람이라야 짐이 되어도 영어를 열심히 공부하게 될 것이다.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예배가 힘입니까? 짐입니까?’ ‘직분이 힘입니까? 짐입니까?’ ‘사명이 힘입니까? 짐입니까?’ ‘섬기는 것이 힘입니까? 짐입니까?’ 이에 대한 대답에 따라 신앙의 질이 달라진다. 예배가 힘이고, 직분이 힘이고, 사명이 힘이고, 섬김이 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예배에 집중하고, 직분에 충성하고, 사명에 헌신하고, 기쁘고 즐겁게 섬기게 될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예배는 복이 되고, 직분은 복이 되고, 사명은 복이 된다. 섬기는 것은 복이 되는 것이다. 항상 하는 이야기지만 그래서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태도가 잘못되면 모든 것이 잘못되고, 태도가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지게 되어 있다. 본문에도 7,80년 동안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셨지만 하나님의 저주로 끝을 맺은 가정과 단 석 달 모시고 온 집안이 복을 크게 받은 가정이 나온다. 이 역시 태도의 차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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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궤 모셔오기

본문은 하나님의 언약궤와 관련하여 긴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이스라엘의 중심은 예루살렘이고, 예루살렘의 중심은 성전이고, 성전의 중심은 성소이고, 성소의 중심은 지성소이고, 지성소의 중심은 언약궤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언약궤가 어떤 존재인지 잘 대변해주는 말이다(2절 참조). 그런데 이렇게 소중한 언약궤가 7,80여 전, 제사장 엘리시대 말기에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그들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신을 포로로 붙잡았다고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착각이었다. 오히려 불행의 시작이었다. 언약궤가 가는 곳마다 엄청난 재앙이 따랐다. 그래서 그들 스스로 언약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게 되었다. 이렇게 다시 돌아온 언약궤는 기럇여아림 산지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으로 모셔지게 되었고, 그곳에서 7,80년 동안을 머물게 되었다.

 

본문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이 된다. 다윗이 사울에 이어 왕이 되었으나 이스라엘을 완전히 통일하지 못하고 유다지파의 땅 헤브론에서 7년 반을 반쪽짜리 왕으로 지냈다. 그러다가 이스라엘을 통일하고, 당시까지 여부스 사람들이 살고 있는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그곳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삼았다(삼하5:). 그리고 아비나답의 집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려고 했다. 그래서 다윗은 이를 위해 정예군(精銳軍) 3만 명을 동원하여(1) 대대적으로 진행하였다. 그만큼 이 사건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본문에 나온 대로 언약궤를 모셔오는 과정에 뜻하지 않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언약궤를 실은 수레의 뒤를 따르던 아미나답의 아들(혹은 손자) 웃사가 수레를 끄는 소들이 뛰자 언약궤를 붙잡았다가 급사를 당한 것이다(6). 이 사건은 다윗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래서 다윗은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시는 것이 두려워 일단 보류하고 근처 ‘오벧에돔’이라는 사람의 집으로 모시게 되었다. 결국 언약궤를 모시는 일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실패로부터 배워야 한다.

비록 이 일이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고 다윗을 선택하신 이유, 하나님께서 다윗을 ‘내 마음에 맞는 자’(행13:22)라고 말씀하신 이유를 분명히 알 수가 있다. 사울은 40년 동안 왕 위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를 찾지도 않고 방치하다시피 하고 지냈지만 다윗은 왕이 된 다음 우선적으로 했던 일이 언약궤를 찾아오는 것이었다. 이는 그의 관심이 늘 하나님께 있었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선한 일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실패의 사건을 통하여 다윗과 이스라엘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주셨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방법대로 섬겨야한다는 것이다. 언약궤는 수레에 실어서 소가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어깨에 메고’(민4:15) 옮기도록 되어 있다. 이것이 언약궤를 옮기는 규정이다. 그런데 그 규정대로 하지 않고 ‘새 수레에 싣고’(3) 옮겼다. 이렇게 된 데는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궤를 옮기는 규정에 대한 ‘무지’와 ‘무시’다. 본인은 후자에 더 무게를 둔다. 성경은 궤를 메어오려고 가서 수레에 싣고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궤를 메어오려 하니(2).......새 수레에 싣고(3)” 쉽게 모시는 방법이 있는데, 게다가 선례까지 있는데(삼상6:7,8), 굳이 수고롭게 메고 옮길 필요가 있을까? 하는 편의적인 생각이 작용한 것이다. 이런 편의주의적인 생각이 규정을 무시하게 한 것이다. 편의대로, 혹은 임의로 하다가 이런 봉변을 당한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의도나 목적도 중요하지만 과정이나 방법 또한 중요하다. 물론 그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다.

 

신앙의 사유화에 대한 경고이다. 웃사가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6)에서 ‘붙들다’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아하즈’(אחז)인데, 이는 단순히 물건을 붙잡는 동작을 의미하지 않고, 누군가 가지고 있는 것이 자기의 것임을 확인하고 이것 내꺼야!’ 라는 표정으로 잡아채는 동작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소유’의 의미가 강하게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자신의 소유는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게 된다. 그래서 ‘아하즈’에는 ‘조종하다’는 뜻도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웃사가 언약궤를 붙들었다는 것은 언약궤를 자신의 소유물처럼 생각하고 그것을 조종하려 했다는 뜻이다. 이 해석이 지나친 비약처럼 생각이 들지 모르겠지만 이어서 나오는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7) 라는 말씀이 이를 확인해 준다. 이를 영어성경은 ‘because of his irreverent act’ 라고 했다. 여기서 ‘irreverent act’는 ‘불경스러운 행동’이란 뜻이다. 이는 웃사가 언약궤를 붙잡은 것이 단순한 잘못된 행동이 아니라 불경스러운 행동이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 대로 그가 언약궤를 마치 자기 소유처럼 생각하여 그것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언약궤를 자신의 소유처럼 생각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강한 도전이자 심판이다. 즉 신앙을 사유화하여 이용하지 말라는 경고인 것이다. 이와 같은 신앙의 사유화는 결국 신앙을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하나님을 이용의 도구로 만들어 버린다. 그렇다면 이런 일은 비단 웃사만의 문제일까? 아니다. 신앙의 역사에서 반복되고 있고,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는 일이다. 명분은 하나님을 위한다면서 실제로는 자신의 욕망(야망과 욕심)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용하시도록 해야지 내가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 이용을 당하면 복이지만 하나님을 자신의 소유물처럼 이용하려고 하면 화를 당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를 경계하고자 다윗이 통분히 여기며 그곳 이름을 ‘베레스 웃사’라고 칭(稱)했다. 이는 ‘웃사를 치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11). 웃사가 죽자 다윗은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는 일을 두려워하여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갔다(9,10). 그런데 언약궤가 오벧에돔의 집에 머무는 석 달 동안 하나님께서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12). 그가 받은 복의 구체적인 내용이 대상26:4~8에 기록되어 있다(내용생략). 아무튼 오벧에돔은 하나님께로부터 자손의 복, 집안의 번영, 특히 주변에 영향력을 떨치는 명문가가 되는 복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을 가까이 한 사람, 가까이서 하나님을 섬긴 사람은 반드시 복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준 증인이 되었다. 이것은 7,80년 동안 언약궤를 모시고 있었던 아미나답의 집과 확연한 차이다. 오랜 세월 언약궤를 모신 아미나답의 집은 웃사의 죽음이라는 비극으로 끝이 났는데, 오벧에돔은 단 석 달을 모시고도 이런 복을 받았다. 이쯤 되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기게 된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이 복이라면, 왜 하나님을 가까이 함의 상징인 언약궤가 아미나답 가정엔 화가 되고, 오벧에돔 가정에만 복이 된 것일까? 똑같은 언약궤인데, 왜 한 쪽은 저주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한 쪽은 축복과 기쁨의 대상이 되었을까? 똑같은 언약궤인데, 왜 한 쪽은 7,80년을 함께 있어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고, 한 쪽은 단 석 달 만에 엄청난 복이 임한 것일까? 그 이유는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을 주인삼고 섬기기보다 자신이 주인이 되어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다윗에게 언약궤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모셔오게 하는 강력한 동기부여가 되었다. 그래서 오벧에돔의 집에 언약궤가 머문 지 석 달 만에 예루살렘으로 메어오게 된 것이다(삼하6:12~15).

 

다윗처럼 오벧에돔처럼

성경은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했다. 본문을 통해서 이 표현이 다윗에게 적절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본문에서 그가 이런 말을 들을 수밖에 없도록 만든 두 가지 중요한 그의 태도를 볼 수 있다. 하나는 하나님을 사모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가 오랜 세월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진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를 찾게 하였고, 또한 대대적으로 자기가 거하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모셔오게 했다. 이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가까이서 섬기고 싶어 하는 그의 마음과 태도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그 시도가 뜻하지 않게 좌절된 것이 본문이다. 하지만 오벧에돔의 집에 머물고 있는 언약궤가 그 가정에 큰 복을 주셨다는 소문을 듣고 그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모셔오게 되었다. 여기에 또 하나 중요한 그의 태도가 나오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복을 사모하는 것이다. 그는 웃사의 죽음을 보고 두려워서 언약궤 모시는 것을 주저했는데, 오벧에돔의 가정에 복이 임한 것을 듣고 당장 예루살렘으로 모셨다. 이는 그가 하나님의 복을 얼마나 사모하는 사람인가를 보여준다. 그는 하나님께 복을 받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주저하지 않고 실천하고 순종했던 사람이다. 그러니까 정말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된 것이다.

 

바로 여기에 오벧에돔처럼 집과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복을 받는 비결이 있다. 그것은 다윗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모하여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가까이서 하나님을 섬기려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복을 사모하고 갈망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복을 받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실천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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