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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려감과 버려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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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005회 작성일 15-11-29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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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려감과 버려둠

마24:40~42

2015. 11/29. 08:00, 11:00(대강절 첫 주일)

전도 브로커(?)

순천은 지역이 좁으니까 그런 일이 없겠지만 서울과 같은 큰 도시에서는 종종 발생하는 일이라고 한다. 적게는 2~30명, 많게 7~80명의 노인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교회 전도 실무자를 만나 이들을 교회에 등록시키는 조건으로 돈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소위 ‘전도 브로커’인 샘이다. 그래서 교회가 이를 받아들여 점심 외에 몇 천원이라도 주면 당장 등록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일을 주도하는 ‘브로커’ 노인에게는 조금 더 준다. 어쨌든 전도가 잘되지 않는 요즈음 같은 때 교회로선 좋은 일이다. 문제는 그러다가 교회가 돈을 지급하지 않으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단 한 사람도 남지 않고 교회를 빠져나간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다른 교회와 연결을 시도하고, 성사가 되면 또 그 교회로 몰려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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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를 듣고 무거운 책임을 느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전도 브로커에 대해 교회를 이용하려했다고 비난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 그리고 신자의 삶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이 보여 졌어도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이는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에 대한 관심보다 전도라는 미명(美名)하에 그저 수 불리기에만 매몰된 교회가 만들어낸 부끄러운 모습이다. 결국 이런 교회의 태도를 세상이 역(逆)으로 이용한 것이다. 물론 바르게 해도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라기는 이렇게 교회를 이용한 사람들 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신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기를 소망한다. 그리만 된다면 이용을 당해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한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먼저 믿은 우리가 정말 제대로 믿고 제대로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해본다. 오늘부터 대강절이 시작되는데(주보 글 참조), 무엇보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이 절기에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기에 합당한 믿음이 준비되어 있는지 스스로 점검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어찌 이런 일이!

본문은 “주의 임하심과 세상의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3) 라고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주님의 대답이다. 주님은 장차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일어날 전조(前兆)들을 말씀하신(4~39) 다음, 본문말씀을 주셨다. 이는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가정에서 교회에서 일터에서 겪게 될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표현은 단순하지만 메시지는 강력하다. 부부가 함께 잠을 자다가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눅17:34). 두 사람이 함께 일을 하다가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조금 더 의미를 확장하면 두 사람이 함께 교회를 가다가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 같은 일을 하다가 이런 일을 겪게 되리라는 것이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이러한 일을 우리가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참으로 충격적이지 않는가? 성경 어디에도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일어날 일에 대하여 이보다 충격적이고 실감나게 표현한 곳이 없다.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다음과 같은 음성을 듣기를 원하신 것이다.

 

1. 방심하지 말라!

성탄의 계절이면 유난히 많이 언급되는 동물이 사슴이다. 긴 뿔, 커다란 눈망울, 가느다란 다리 때문인지 무척 여리게 보이는 동물이다. 하지만 그 가느다란 다리로 성큼성큼 내달리면 말보다 빠르고, 사자나 호랑이보다 더 빠르다. 그런데도 자신보다 느린 사자나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며 산다는 것은 역설이다. 그 이유는 사슴의 이런 습성 때문이다. 사자나 호랑이가 쫓아오면 도망을 치다가 잠시 멈추고는 뒤를 돌아본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순간에 사자나 호랑이가 달려들어 덮치게 된다. 더 이상 쫓아올 수 없도록 달아나지 않고 도중에 ‘이만하면 되겠지’ 하고 뒤를 돌아보는 것, 곧 ‘방심’하는 습성 때문에 맹수에게 붙잡히고 만다는 것이다. 등산을 할 때도 힘들게 산을 오를 때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산을 내려올 때 사고를 많이 당하게 된다. 짐을 지고 비탈길을 내려올 때보다 평지에서 더 많이 넘어진다. 또한 큰 성공이나 성취 후에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많다(수7:1~5, 9:16~21, 삼하11:1~5 등). 모두가 방심 때문이다. 긴장을 푸는 순간 위기를 맞게 되는 것이다. 방심(放心)이란 말 그대로 마음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마음을 열어두는 것, 곧 무장을 해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영적으로도 마찬가지다. 방심은 내 마음을 사단의 놀이터가 되도록 방치한 것과 같다.

 

본문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바로 이 점을 경계하신 것이다. 본문은 주님께서 오실 시기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40),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41). 여기에 나온 ‘있으매’ 라고 하는 동사의 시제가 모두 ‘현재형’이다. 한창 밭에서 일을 하고 있고, 맷돌질을 하고 있는 그 때에 주님께서 오신 것이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예기치 않은 순간에 갑작스럽게 오신다는 뜻이다. 그러니 방심하지 말고, 항상 깨어있으라는 것이다. 그래서 42절은 “그러므로 깨어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고 했다. 주님께서 언제 오실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오늘 낮에 오실지, 혹은 오늘 저녁에 오실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양떼를 떠나서’(277장)를 비롯한 많은 은혜로운 찬양시를 쓴 스코틀랜드의 언약교도 목사 호라티우스 보나(Horatius Bonar)는 저녁이면 커튼을 치면서 ‘혹시 오늘 밤에, 오 주님!’이라고 속삭였고, 아침이면 하늘을 보면서 ‘혹시 오늘이신가요? 주님!’이라고 했다고 한다. 하루하루를 주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면서 살았다는 뜻이다. 이것이 경건한 신자의 모습이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자의 아름다운 모습이다. 저와 여러분에게 주님의 재림에 대한 이런 간절함과 사모함이 있기를 바란다. 간절함과 사모함이 방심하지 않고 깨어있는 비결이다.

 

2. 준비하라!

골프는 신사적인 운동이라 하여 매너를 아주 강조한다. 특히 골프장에 늦게 도착하는 것은 골퍼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절대 (티업)시간을 엄수한다고 한다. 통상 30분 정도 일찍 도착해서 연습스윙을 하고 필드에 나간다고 한다. 정말 우리 지체들도 예배시작 30분 전에는 도착해서 기도와 찬양을 드렸으면 좋겠다. 교회 주변을 다니며 청소도 하고 오는 사람을 반갑게 맞아주었으면 좋겠다. 신자나 교회의 존재감은 이런 사소함에서 시작되고, 이것이 주변에 선한 영향력으로 나타나게 된다. 골퍼는 두 가지 경우를 제외하곤 절대로 늦지 않는다고 한다. 하나는 골프장에 오면서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 다른 하나는 사랑하는 소실(애첩)이 출산을 하려고 병원에 실려 갔을 경우라고 한다. 한 마디로 절대 늦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의 예배가 골프를 치는 것보다 못하고, 예배자의 정신이 골퍼보다 못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골퍼는 게임규칙도 이렇게 철저히 지키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도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사랑하는 주님의 사람이라 말할 수 있을까? 어떻게 영광중에 임하실 주님을 맞이할 수 있을까?

 

알곡과 쭉정이는 겉모습이 너무 똑같아서 구별이 어렵다. 그러나 키질을 해보면 금방 알 수가 있다. 알곡은 남지만 쭉정이는 바람에 날아가기 때문이다. 신자도 알곡인지 쭉정인지 분별이 어렵다. 똑같이 교회에 다니고, 똑같이 예배를 드리고, 똑같이 기도도 드리고, 똑같이 찬양도 드리고, 똑같이 봉사도 하고, 똑같이 선교여행도 다니고, 겉모습이 너무 똑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날이 오면, 주님이 오시면 분명하게 구분과 구별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본문이 주는 또 하나의 심각한 메시지다. 주님께서 재림하여 이 땅에 오실 때 분리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선과 악의 분리, 참과 거짓, 양과 염소, 충성스러운 사람과 게으른 사람, 알곡과 쭉정이의 분리가 일어난다. 그래서 같은 장소, 같은 시간,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하는 분리의 사건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소위 알곡 신자는 데려감을 당하지만 쭉정이 신자는 버려둠을 당하는 것이다.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주요동사 ‘데려가다.’(παραλαμβάνεται)와 ‘버려두다.’(αφιεται)의 시제가 모두 ‘현재형’이라는 점이다. 이는 미래에 일어날 사건인데도 이렇게 현재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 예언의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를 예언적’ 현재형이라고 한다. 먼 미래에 일어날 사건인데 마치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표현한 것이다. 특히 오늘 이 말씀이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되는 것은 지금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여 모두 알곡 신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믿음 안에 있는지 자신을 시험하고 자신을 확증해야’(고후13:5) 한다. 그래서 도적처럼 오신 주님께서 훔쳐가고 싶을 만큼 보배로운 알곡 신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깨어있어 준비하는 것이다. 정말 주님께서 탐을 내실 만큼 믿음의 사람인지, 그런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자신을 늘 점검해 보기 바란다. 물론 우리 중에 누구도 자신이 알곡 신자라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신자는 ‘다 된 사람’(geworden-sein)이 아니라 ‘되어 지고 있는 사람’(werden-sein)이기 때문이다(M. Luther). 그러니 지금도 늦지 않다는 뜻이다. 지금이라도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면, 은혜에 민감하게 반응하면, 깨어서 잘 준비하면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모르 데이(Amor Dei)

어거스틴은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아모르 수이’(Amor Sui). 자기를 사랑하는 것, 곧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저 일신의 영달을 위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집중된 삶을 사는 사람이다. 땅엣 것(세속적인 것)에 매여 사는 사람이다(Amor mundi). 다른 하나는 ’아모르 데이’(Amor Dei).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곧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사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이다. 비록 땅에서 살고 있지만 항상 하늘을 지향하며 사는 사람이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데려감을 당한 사람과 버려둠을 당한 사람의 차이도 바로 여기서 결정이 된다.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관점과 가치를 어디에 누구에게 두고 사느냐가 중요하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 같은 일을 하면서도 관심과 가치가 이 땅에 있고, 이 땅에 있는 것들에 두고 사는 사람은 이 땅에 남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에 두고 사는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관심과 관점, 가치를 하나님께 두는 아모르 데이가 되자! 무엇보다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간절함과 갈급함과 사모함을 갖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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