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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를 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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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044회 작성일 15-12-06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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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를 기다림

사61:1~3

2015. 12/5. 08:00, 11:00
(대강절 둘째주일)

위로가 필요한 시대

어떤 아내가 샤워를 하고나서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나도 나이를 많이 먹었나봐. 피부는 늘어지고, 얼굴은 주름투성이고, 몸매도 이상하게 되어서 옷을 입어도 어울리지도 않고. 아, 슬퍼......’ 그러면서 남편을 쳐다보며 말했다. ‘여보 나 울 것 같아. 나에게 기분 좋은 말 한 마디 해주라!’ 대개 아내들이 이러면서 주부 우울증에 걸리게 된다. 이럴 때 가족의 반응이 아주 중요하다. 여러분이라면 아내의 이런 요구에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그런데 이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뭐라고 했어. 머지않아 후회할거라고 했지. 아무튼 아직까지 당신 시력 하나는 참 좋은 것 같다!’ 이것은 한 조각의 위로를 바라는 아내의 마음에 소금을 뿌려버린 것과 같다. 이런 남편을 가진 아내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다. 사실 아내의 행복은 남편의 따뜻한 말 한 마디에 달렸다. 그 한 마디에 위로를 받고 행복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그것도 못하는 남편들이 많다. 남편도 마찬가지다. 아내의 말 한 마디에 위로를 받고 용기를 갖게 된다.

 

어려서 살았던 고향 마을이 서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었다. 해질녘 마을 앞 개울에서 놀다가 산 그림자가 마을로 내려앉는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있다. 마치 악마의 목구멍으로 마을 전체가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고, (물론 헛수고였지만)그것이 쫓아오는 것 같아서 들판으로 무작정 도망을 쳤던 기억이 난다.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이와 같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목회심리학자 게리 콜린스(G. R. Collins)는 불안을 ‘이 시대의 공식적인 감정’, ‘이 시대에 가장 만연된 심리현상’이라고 했다. 불안이 현대인과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보편적인 심리현상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아담이후 하나님을 떠난 인류에게 계속되고 있는 현상이다(창3:10). 이런 파괴적인 적과의 동침이 우리의 삶이다. 이러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절실한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위로’(慰勞)라고 생각한다. 서울문화재단이 지난 3월 13일부터 마음약방’ 자판기를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는데, 찾는 사람이 많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꿈 소멸증’, ‘미래 막막증’, ‘가족남남 신드롬’, ‘스마트폰 중독증’, ‘급성 연애세포 소멸증’, ‘노화 자각증’ 등 마음증상 20가지를 메뉴로 만들어놓고, 동전을 넣고 자기에게 해당되는 증상을 누르면 거기에 맞는 처방이 나온다. 휴식과 감동을 주는 시, 그림, 영화와 같은 예술작품을 추천하거나 테마지도, 비타민제와 같은 소소한 재미와 이야기가 담긴 물품을 처방해 준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것들이 위로가 된다는 사실이다. 얼마나 사람들이 위로에 목말라 있는지를 알 수가 있다.

 

위로의 중요성

한 사람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많은 조건이 필요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위로’다. 어릴 때 부모의 따스한 위로, 선생님의 신뢰어린 위로 한 마디로 인생의 좌표를 굳게 설정한 사람들이 많다. 사람을 변화시키려면 비록 작고 사소한 것에도 위로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작은 물결이 모여 큰 물결이 되고, 그 힘은 일찍이 꿈꾸지도 못했던 거대한 제방을 허물어뜨린다. 그래서 ‘사람은 힘들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위로를 받지 못해서 죽는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위로가 그렇게 중요하다는 뜻이다.

 

사실 위로라는 단어의 의미만 살펴봐도 그 중요성을 짐작할 수가 있다. ‘위로하다.’는 히브리어 ‘나함’(נהם)이란 동사의 강조형(피엘)이다. 그 문자적 의미는 ‘다시 숨을 쉬게 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위로는 숨이 막히고 기가 막힌 절망적인 상황에서 다시 숨을 쉬고 소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영어에 위로를 뜻하는 단어로 comfort와 console이 있다. 이들은 접두사가 ‘com’과 ‘con’인데, 둘 다 ‘함께’라는 뜻이다. comfort(=com+fort)는 ‘함께’(com) ‘힘을 돋아주고’(fort), console(=con+sole)은 ‘외로운 사람’(sole)과 ‘함께’(con) 해주는 것이다. 이렇듯 위로는 ‘함께 하는 것’이다. 곁에서 주는 힘이 위로다. 함께 하면서 들어주고, 함께 하면서 웃어주고, 함께 하면서 인정해주고, 함께 하면서 지지해주고, 함께 하면서 울어주고, 함께 하면서 아파해주고, 함께 하면서 기다려주고, 함께 하면서 기도해주는 것이 위로다. 그러면 숨이 막히고 기가 막힌 절망적인 상황에서 다시 숨을 쉬고 소생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위로자

그런데 성경은 우리 예수님을 ‘위로자’라고 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삼위 하나님 모두가 위로자시다. 늘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에게 힘을 돋아주시는 분, 세상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이리저리 체이기만 하는 외로운 우리에게 친구처럼 남편처럼 아버지처럼 항상 함께 해주시는 분, 우리 곁에서 힘이 되어 주시는 분, 그래서 숨이 막히고 기가 막힌 절망적인 상황에서 다시 숨을 쉬고 소생하게 해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주님은 이런 분으로 2천 년 전에 우리 곁으로 오셨고, 지금도 성령으로 함께 하시고, 장차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대강절은 우리의 위로자이신 주님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절기다.

 

본문은 구약에서 대표적인 메시야 사역과 관련된 말씀이다. 주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40일 금식기도를 드린 다음, 나사렛 회당에서 메시야 시대의 시작과 함께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선포하셨을 때, 바로 이 말씀을 인용하셨다(눅4:16~21). 본문은 메시야 시대와 메시야 사역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메시야 시대의 특징은 한 마디로 ‘반전’이다. 음지 인생이 양지 인생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그리고 메시야 사역의 특징은 ‘위로’다. 1절은 위로의 대상으로 가난한 자, 마음이 상한 자, 포로된 자, 갇힌 자를 소개하고 있다. 2절에 나온 ‘슬픈 자’는 위로의 대상을 총칭한 것이다. 그리고 3절은 위로의 내용이다.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복음서를 통하여 이와 같은 위로의 삶을 사셨던 주님을 만날 수 있다.

 

위로를 경험하는 삶

위로는 산소와 같다. 산소처럼 매순간,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 위로다. 특히 우리 신자에게 주님의 위로는 영혼의 산소다. 그러면 어떻게 이와 같은 주님의 위로를 경험할 수 있을까?

 

앞에서 히브리어 ‘나함’이란 동사의 강조형이 ‘위로하다.’는 뜻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동사의 기본형(칼)은 ‘후회하다.’, ‘뉘우치다.’, ‘회개하다.’는 뜻이다. 즉 위로와 회개가 어근(語根)이 같다는 뜻이다. 제가 한이에게 이점을 물었다. ‘위로란 단어와 회개란 단어가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랬더니 이렇게 대답을 했다. ‘회개하면 위로를 받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에요! 회개하면 감사가 있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 있고, 또한 마음이 시원하잖아요! 나는 그렇던데.......’ 맞는 말이다. 주님의 위로는 회개이후에 주어진다. 자신의 죄를 슬퍼한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는 복이 주님의 위로다. 그래서 베드로는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3:19) 라고 했다. 회개한 사람은 ‘새롭게 되는 날’을 경험하게 되리라는 뜻이다. 개역성경에서는 이를 ‘유쾌하게 되는 날’이라고 했다. 여기서 ‘새롭다.’ 혹은 ‘유쾌하다.’는 헬라어로 ‘아나프쉬코’(αναψυχω)다. 이는 ‘다시 김을 불어넣다.’, ‘다시 숨을 쉬게 하다.’는 뜻이다(나함과 같은 뜻). 회개한 사람이 주님의 위로를 받는다는 것이다. 주님은 자신의 죄를 슬퍼하는 사람에게 ‘재 대신 화관’을 씌워주시고, 자신의 죄를 아파하는 사람에게 ‘슬픔대신 기쁨의 기름’을 발라주시고, 자신의 죄를 통회하는 사람에게 ‘근심대신 찬송의 옷’을 입혀주신다. 대강절을 주님의 위로를 기다리는 절기라고 하면서 회개를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온전한 위로는 주님의 재림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위로의 주님을 기다려야 한다. 특히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 기다려야 한다. 이것이 대강절의 정신이다. 하지만 오늘의 삶에도 위로가 필요하다. 영혼의 산소이기 때문이다.

 

위로의 사명

이 설교를 매너도 센스도 멋대가리도 없는 남편 이야기로 시작을 했는데, 지혜롭고 멋진 아내의 이야기로 마무리를 지으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한 병사가 다리에 심한 상처를 입고 제대를 했다. 그는 다리를 절었지만, 다행히 좋아하는 수영을 할 수는 있었다. 어느 날, 아내와 해수욕장을 갔다. 수영을 하고 난 후, 모래밭에 누워 깜박 잠이 들었는데, 잠결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의 발을 보고 수군대는 소리를 들었다. 갑자기 그의 마음에 수치심이 생겨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 후, 아내가 해수욕장에 가자고 했고,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아내가 그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말을 해주었다. ‘여보! 당신 다리의 상처는 당신의 용기를 증명해 주는 푭니다. 당신은 훌륭한 행동을 한 결과 그것을 얻었으니 결코 숨길 필요도 부끄럽게 생각할 필요도 없어요. 언제나 당당하게 남들에게 보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니 우리 가서 수영해요.’ 그는 아내의 이 말을 통해 장애인이라는 열등감을 넘어서게 되었다. 여기서 아내가 해 준 이 말은 어쩌다가 나온 것이 아니다. 남편의 고통, 남편의 아픔에 늘 함께 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래서 남편을 다시 살려주는 위로의 말이 나왔던 것이다. 이런 멋진 아내, 멋진 남편이 되기를 바란다.

 

돌이켜보면 긴 세월을 고독했지만 참아왔고, 외로워도 외롭지 않는 것처럼 늘 친한 듯 낯선 관계 속에서 살아왔다. 이런 습관이 교회생활에서는 물론이고 주님 앞에서까지 감추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게 만들었다. 이제는 모두 다 드러내놓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서로 위로하고 또한 위로를 받으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물론 사람의 위로에는 한계가 있다. 욥의 말처럼 ‘재난을 주는 위로’(16:1)가 될 수 있다. 본의 아니게 고통을 가중시키고, 상처를 더욱 키우고, 더욱 낙심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복된 소망을 주신 주님은 우리가 서로 위로하며 살기를 기대하신다. 우리에게 위로의 사명을 주신 것이다. 아직은 많이 서툴고 부족하지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서로 위로하고 위로를 받으며 위로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란다. ‘만약 내가 한 사람의 가슴앓이를 멈추게 할 수 있다면 나 헛되이 사는 것은 아니리’(디킨슨의 〈만약 내가〉에서) 라고 했던 어느 시인의 말처럼 나의 작은 위로가 누군가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면 이보다 소중한 기적이 어디 있겠는가? 나의 작은 위로가 누군가에게 용기가 되었다면 이보다 소중한 사랑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의 존재 자체가 다른 사람에게, 더 나아가서 주님께 위로가 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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