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 설교말씀 기뻐하는교회 - 대한예수교장로회

본문 바로가기

설교말씀

설교말씀 HOME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1,244회 작성일 15-11-08 16:23

본문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마6:9~13

2015. 11/8. 09:30(전교우 나들이)

아버지라 부르지 말라!

다음은 우루과이 어느 시골 성당 벽에 적혀 있는 글이라고 한다. 정신이 번쩍 들도록 우리에게 도전을 주는 내용이다. 나에게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이 소중한 기도를 드릴 자격이 있나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하늘에 계신’이라 하지마라.

세상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라고 하지마라.

혼자만 생각하며 살면서

아버지’라고 하지마라.

아들과 딸로 살지 않으면서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라고 하지마라.

자기 이름 빛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나라가 오게 하시며’ 라고 하지마라.

물질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라고 하지마라.

네 뜻대로 되기를 갈망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라고 하지마라.

가난한 이들을 본체만체하면서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라고 하지마라.

누구에겐 아직도 원한과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라고 하지마라.

죄 지를 기회를 찾아다니면서

악에서 구하소서.’ 라고 하지마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라고 하지마라.

그 모든 것이 온통 네 것이 되도록 소원하면서

아멘’이라 하지마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너의 기도로 드리지 않으면서

 

송영의 삽입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주기도문의 전반부는 ‘하나님을 위한 간구’(Thou-petitions)였고, 후반부는 ‘우리를 위한 간구’(We-petitions)였다. 그리고 간구를 마친 다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다. 아멘.”으로 끝을 맺고 있다. 이 부분을 주기도문의 ‘송영’(Doxology)이라고 한다. 이 송영은 누가복음에 나온 주기도문과 오래된 사본들(시내산, 바티칸, 베자 사본 등)에는 없고, 반면 후대 사본들과 일부 교부들(크리소스톰)의 글에서만 나온다. 이는 후대에 교회가 첨가해서 사용하였다는 뜻이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는 이를 괄호로 처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가르쳐주실 때부터 송영이 없었던 것일까? 학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유대인의 모든 기도에는 항상 송영이 있고, 그들은 송영이 ‘기도문의 마지막 문학적 장식의 고정된 틀’로 생각했다. 때문에 주님도 유대인의 이런 전통에 따라 송영을 첨가하여 기도를 가르치셨을 것이고, 제자들도 송영을 덧붙여 기도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송영이 오래된 사본에서 빠진 이유는 무엇인가? 서방교회에서는 주기도문 중 ‘악에서 구하소.’까지는 함께 하고, 그 다음에는 각자의 기도를 드리고 송영으로 마쳤다고 한다(터툴리안의 「그의 기도」란 논문). 즉 각자가 그때그때 적절하게 송영을 만들어서 드렸다는 것이다. 이렇게 각자가 그때그때 적절하게 만들어서 할 수 있는 것이므로 주로 서방교회 전통에서 만들어진 오래된 사본들에서는 송영을 주기도문 본문에 삽입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반면 동방교회에서는 예배 중에 회중이 ‘악에서 구하소.’까지 하면 예배 집례자가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라고 송영을 덧붙였다. 그래서 주로 동방교회 전통에서 만들어진 후대의 사본들에 이 내용이 삽입되었고, 오늘날까지 내려온 것이다. 물론 이 내용이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송영의 가치(의미)

아무튼 중요한 것은 이 송영이 후대에 첨가된 것이 확인되었고, 그 내용이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것인지 확인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들이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 매우 중요한 신학적인 의미(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내용인지 확인도 되지 않은 것인데, 비록 괄호로 처리하긴 했지만 성경 본문에 삽입해 둔 이유, 또한 주기도문으로 기도를 드릴 때 이 부분을 포함해서 기도를 드린 이유가 무엇일까?

 

기도의 보증서

라흐만 교수는 이 송영을 주기도문 내용 전체에 대한 ‘의심이나 동요로부터 구원해주는 약속이며, 확고한 토대요, 파괴할 수 없는 목표’라고 했다. 한 마디로 이 송영은 물품의 보증서처럼 주기도문 본론에 나온 간구들을 확인(증)해 주는 보증’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성경에서는 번역을 하지 않고 생략했지만 헬라어 본문에는 ‘이유를 설명하는 문장을 이끄는 접속사’(ὁτι)가 있다. 이 접속사는 ‘왜냐하면 ~때문이다.’(because, for) 라는 뜻이다. 이것이 송영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특히 우리가 주기도문의 간구를 드릴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쉽게 말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간구하는 것은 ‘나라와 그 나라의 완성이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죄의 용서를 구하고 사단으로부터 보호를 구하는 것은 ‘권능이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기를 간구하는 것은 ‘영광이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나라가 영원히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을 인정하기에 하나님 나라와 그 뜻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고, 우리는 영광이 영원히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기에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우리는 세상의 모든 힘과 권능이 영원히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하기에 하나님께 우리의 일용할 양식과 죄의 용서, 사단으로부터 보호를 요청할 수 있는 것이다. 송영은 이렇게 앞에서 드린 여섯 가지 간구에 대한 이유이면서, 그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해주고 있다. 그래서 우린 이 송영을 통해서 기도의 토대(기초)와 목표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아울러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모든 결정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모든 간구를 담대하게 드릴 수 있고, 또한 반드시 응답해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남다르게 기도생활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그들이 간구하는 기도의 내용에 대한 보증을 주로 자신의 주관적인 체험이나 감정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자신의 마음이 뜨겁거나 주관적인 확신이 있을 때, 기도의 유효성을 인정한다. 확신이 없거나 체험이 없으면 기도의 내용은 물론이고 기도 자체에 회의를 갖는다. 기도에 대한 필요성이나 확신을 자기중심적인 주관성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도하면서도 낙심하고 실망한 이유, 기도하면서도 절망에 빠진 이유, 기도하면서도 확신을 갖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도는 드리는 사람의 자기 확신이나 자기 암시, 자기 체험, 자신의 느낌에 두어서는 안된다. 자신의 경건이나 자기 의에 두어서도 안된다.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두어야 한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의 말씀에 두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기도도, 믿음도, 삶도 흔들리지 않는다. 주기도문의 송영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도는 우리의 주관성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기도의 내용에 대한 보증은 물론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분명히 들으시고 이뤄주신다는 보증이 주기도문의 마지막 부분인 송영이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선포

또한 주기도문의 송영은 ‘나의 나라, 나의 권능, 나의 영광은 없다’는 고백이고 선포다. 즉 삶의 모든 영역에 미치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고백이고, 선포이고, 찬양이다. 하나님만이 나의 주인이시고, 내 가정과 나라와 이 공동체(교회)의 주인이 주님이시라는 고백이다. 다른 어떤 것도 나의 주인일 수 없다는 선언이다. 나도 내 삶의 주인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주인이시다. 비록 나의 나라, 나의 권능, 나의 영광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권능, 하나님의 영광 일부이고, 거기에 종속된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여러분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고 선포하기 바란다. 이것이 ‘믿음’이고,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모든 감사와 찬양이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시작하면 말했듯이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것의 소유권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자신이 모든 것의 주인이 되기를 소원하는 사람은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라는 기도를 드릴 자격이 없다.

 

이 송영에 나타난 세 가지 주제(나라, 권능, 영광)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이며 희망이다. 주기도문을 드리는 우리는 이 하나님의 약속에 삶의 기초(토대)를 두어야한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권능, 하나님의 영광을 궁극적인 인생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 주기도문은 우리를 그곳으로 향하게 한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보증이 이 송영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834 / 26 page

설교말씀 목록

게시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