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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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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1,343회 작성일 15-10-11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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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마6:9~13

2015. 10/11. 08:00, 11:00

기도가 해답이다.

기도는 위기에 처한 개인, 가정, 교회, 나라를 구한다. 실례로 6.25때 있었던 국가적 기도를 들 수 있다. 북한군은 전쟁발발 40여 일만에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왔다(1950.8.4). 하루 10㎞씩 말 그대로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왔다. 이제 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지면 우리 자유대한민국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위기에, 고 이승만 대통령이 목사님들을 부산 도지사관으로 초청하여 기도를 부탁했다. ‘지금 우리나라의 운명은 풍전등화입니다. 비가 오지 않아야 하는데, 지금은 장마철입니다. 비가 오면 우리 비행기가 낙동강 유역의 적진을 폭격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적군이 강을 건너게 될 것입니다. 이 지경에서 우리가 의지할 곳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목사님들은 하나님께 기도해 주십시오.’ 그때 목사님들이 부산중앙교회에 모여 일주일 동안 금식하며 철야기도회를 가졌다. 그 결과 장마철인데도 맑은 날씨가 20여 일 계속되어 폭격기(B29)가 매일 낙동강 유역의 적진을 폭격하였다. 그래서 적은 완전히 무력하게 되었고, 게다가 유엔군이 인천상육작전까지 성공하여 전세가 완전히 뒤집혔다. 간절한 기도가 우리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것이다. 기도는 개인을 살리고, 가정을 살린다. 기도는 사업을 일으키고, 교회를 부흥하게 한다. 나라도 하나님이 지키시는 안전한 나라로 만드는 것이 기도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할지라도 싸이지 않게 하는 비결이 기도에 있다(고후4:7). 기도는 막힌 것을 뚫고, 닫힌 것을 열고, 묶인 것을 풀어주는 비결이고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열심히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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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빛나도록,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더욱 확장되도록, 그래서 우리를 통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 하나님의 나라가 속히 완성되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주기도문의 ‘하나님에 대한 간구’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이 시간부터는 ‘사람에 대한 간구’(일용할 양식, 용서, 시험)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한다. 그리고 이 시간에는 그 중에서 첫 번째(주기도문의 네 번째) 간구, 소위 ‘일용할 양식’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일용할 양식에 대하여

주기도문 네 번째 간구에 나온 핵심어는 ‘일용할 양식’이다. 여기서 ‘일용할’이란 단어는 헬라어로 ‘에피우시아’(επιουσια)인데,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주기도문에서만 단 한번 나온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단어를 ‘에피’(επι)와 ‘우시아’(ουσια)의 합성어로 보고, ‘삶에 필요한’이라는 뜻으로 풀이를 한다. 여기에는 두 종류의 해석이 있다. 하나는 오늘 세상을 살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을 의미한다는 해석이다. 대표적인 사람이 루터다. 그는 일용할 양식을 ‘음식과 건강, 집과 가정, 좋은 정부 등을 포함한다.’고 했다. 다른 하나는 그날을 살아내기 위해 필요한 양식을 의미한다는 해석이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후자가 더 좋은 해석이라 생각한다. 당시 주님을 따르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끼니를 걱정해야할 만큼 가난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전혀 다른 시대에 살고 있다.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살고 있다. 오히려 먹을 것이 넘쳐나서 음식물 쓰레기 처리가 골치 아픈 시대, 아침을 먹지 않고 브런치(아점)를 먹는 시대, 다이어트를 위해서 먹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이 많은 시대, 배고픈 고통보다 배부른 것을 걱정하는 시대, 꼬박꼬박 세끼 밥을 챙겨먹는 삼식(三食)이보다 일식(一食)이가 환영받고, 일식이보다 아예 집에서 밥을 먹지 않는 영식(零食)이가 가장 환영받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렇게 배부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가 필요한가? 끼니를 걱정해야 할 만큼 먹고 사는 것이 어려웠던 시대, 그런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기도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그래서 앞에서 소개한 첫 번째(‘오늘 세상을 살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와 같은 해석이 나온 것이다. 하지만 이 기도는 어느 때보다, 누구보다 우리에게 절실하다. 이 기도의 의미를 알면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가난한 이웃을 품어라!

지난 월요일 저녁 모(某)방송 드라마에서 아주 충격적이고 엽기적인 장면을 보았다. 고려시대 말기의 모습인데, 도시 뒷골목에는 굶주려서 죽은 시신이 즐비하고, 권세가들은 갓 출산한 산모를 잡아다가 새끼돼지에게 젖을 먹이게 하고, 이렇게 사람 젖을 먹여서 기른 돼지를 잡아 잔치를 하는 장면이다. 대신 돼지에게 엄마의 젖을 빼앗긴 아이는 굶주려 죽게 된다. 자신들의 입을 즐겁게 하자고 엽기적인 일도 모자라 어린 생명까지 죽음에 이르게 한 망국(亡國)의 모습에 분노와 구토를 느꼈다. 이 세대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우리는 좋은 시대, 복받은 나라에 태어나서 먹을 것 걱정하지 않고 사는 것만도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구상에는 아직도 8억에 가까운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고통을 받고 있다. 한쪽에서는 음식이 넘쳐나서 버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5초에 1명의 어린이가 굶주려 죽어가고 있는 현실이다. 주기도문 네 번째 간구는 우리 주변에 이렇게 굶주리고 있는 이웃을 생각하며 기도하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이 기도가 절실한 것이다.

 

이 기도에서 중요한 단어가 ‘우리에게’이다. ‘나에게’가 아니라 ‘우리에게’이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내 양식만, 내 밥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다. 내 생활만을 위한 기도, 내 안위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다. 내 필요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위한 기도다. 특히 오늘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양식 때문에 걱정하는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기도다. 따라서 이 기도는 양식 때문에 고통을 받지 않는 우리로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가르친다. 그것은 한 마디로 ‘이웃을 품으라는 것’이다. 밥으로 고통당하는 이웃을 마음에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나의 밥을 넘어 우리의 밥을 구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나에게’가 아니라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지금 지구상에는 수백 만 명이 굶어 죽어가고, 수 억 명이 영양실조 상태인 것은 결코 식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세계의 식량생산량은 120억 명이 먹을 수 있는 양이다. 문제는 분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주기도문 네 번째 간구의 정신만이 오늘날 지구촌이 직면한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비결이다.

 

이미 주신 것을 충분한 것으로 알라!

그렇다면 왜 우리의식이 없는 것일까? 좋은 것을 혼자 독차지하려는 이기주의, 자기중심주의 때문이다. 주기도문의 이 간구는 나 혼자만 안락하게 살겠다고 내가 너무 많이 가지려고 하지는 않은지 반성하라는 기도다. ‘더 가지고 싶다. 더 쌓아놓고 싶다. 더 누리며 살고 싶다.’는 욕망을 내려놓고, 필요한 만큼만 구하라는 것이다(칼빈). 바꿔 말하면, 이미 주신 것을 충분한 것으로 아는 은혜를 달라는 기도이다. 어느 여고생의 기도다.

 

하나님, 설거지 그릇에 감사드립니다.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그릇들입니다.

수북이 쌓인 그릇들 곁에 서니

우리 모두 넉넉하게 살고 있는 느낌입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굶고 있는데,

우리는 끼니 걱정하지 않습니다.

이 쌓인 그릇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무 잘해 주신다는 증거십니다.

 

설거지를 위해 쌓인 그릇을 보고 넉넉하게 베풀어주신 주님의 은혜를 깨닫는 이 은혜야말로 주기도문 네 번째 간구의 또 다른 정신이다. 우리에게 만족이 없어서 그렇지 우린 이미 많은 것을 받아 누리고 있다. 그렇지만 세상은 우리에게 너무 많은 것을 가지도록 유혹한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때문에 만족도 없고, 감사도 모르고, 가난한 이웃에게 나눌 수도 없고, 그들을 품을 수도 없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빵이 남아 고민이고, 한쪽에서는 빵이 부족해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인류의 1/3은 살을 빼려고 애를 쓰고, 2/3는 굶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비극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않았다.’(고후8:5)는 말씀을 기억하며 주신 것을 내게 충분한 것으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더 가지도록 하는, 더 부해지라고 하는 유혹에 대하여 ‘아니오!’(No)라고 말 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하는 것이다. 오늘 필요한 양식만으로도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한다. 그래야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임을 알게 된다(예, 비나 공기, 햇빛 등). 이런 마음을 갖게 해달라는, 이런 은혜를 깨닫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주 없이 살 수 없네!

저는 주기도문의 네 번째 간구의 기도를 드릴 때마다 ‘자상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느낀다. 하나님은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과 같은 작고 사소한 것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작은 고민, 우리의 작은 아픔, 우리의 작은 고통, 우리의 작은 상처, 우리의 쪼들린 살림살이, 우리의 작은 소원까지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런 자상한 보살핌 속에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알게 하는 것이 믿음이고, 이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은혜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다는 것을 항상 고백한다. 은혜가 깊은 사람들은 이 사실을 삶 속에서 깊이 의식하며 살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러니까 그들의 생활에는 감사가 충만하다.

 

 

우리의 삶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살 수 없다. 농부가 피땀을 흘려 농사를 지어도 비가 오지 않으면 열매를 거둘 수가 없다. 비가 너무 많이 와도 마찬가지다. 곡식이 열매를 맺도록 적절하게 비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뿐만 아니라 아무리 먹을 것이 태산처럼 쌓여 있어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그림의 떡이다(눅12:16~21). 그러므로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는 단순히 물질적인 양식을 위한 기도가 아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이 단 하루도 우리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존하여 살아가는 것임을 고백하는 신앙고백이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인 것을 고백하는 신앙고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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