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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하여 준 것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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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1,505회 작성일 15-10-18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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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하여 준 것 같이

마6:9~13

2015. 10/18. 08:00, 11:00

나비가 된 사람

스티브 맥퀸 주연의〈빠삐용〉(Papillon)이라는 영화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앙리 샤리에르’(H. Charriere)라는 사람의 실제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것이다. 그는 술집에서 술을 마시던 중에 느닷없이 살인누명을 쓰고 체포되었다. 그래서 그는 법정에서 한사람도 죽인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살인죄로 종신형의 선고를 받는다(1931년). 개인의 영달에 눈이 먼 젊은 검사가 거짓 증인들을 세워 이렇게 꾸민 것이다. 억울한 그는 기회만 있으면 탈출을 시도한다. 이유는 자신에게 살인죄 누명을 씌운 검사와 거짓증인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영화에서 본 것처럼 아홉 번째 탈출시도에 성공하여 악마의 섬에서 빠져나오게 된다(1944년). 자유의 몸이 된 그는 베네수엘라로 가서 복수를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고 돈을 모은다. 그리고 공소시효가 끝나자(1967년), 곧 파리로 돌아온다. 드디어 복수의 기회가 온 것이다. 그러나 파리에 도착한 그는 팔일 동안 밤낮으로 생각하고, 또 생각하던 끝에 마음으로부터 그들을 용서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빠삐용 후편 격인 「방꼬」라는 자서전에서 그때의 심경을 이렇게 밝혔다. ‘나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내가 복수를 포기한 대가로 다시는 이런 비극이 생기지 않도록 해달라고. 그리고 나 자신에게 속삭였다. 너는 이겼다. 친구여! 너는 자유롭고 사랑 받는 미래의 주인공으로 여기 있다. 이 일에 관계된 모든 사람 중에 네가 가장 자유롭고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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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은 빠삐용의 탈출을 ‘자유를 향한 갈망’이라고 말한다. 사실은 자유에 대한 갈망이 아니라 ‘복수에 대한 집념’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중요한 장면은 두려움 때문에 탈출을 포기했던 드가(더스틴 호프만)의 독백이다. 빠삐용이 안전하게 탈출한 것을 지켜본 그는 숙소로 돌아와 돼지들에게 먹이를 주며 이렇게 중얼댄다. ‘그대가 아무리 이 섬으로부터 탈출을 해도 그대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았다면 그대는 여전히 감옥 속에 있는 것이야!’ 드가의 말처럼 마음이 묶여있으면 몸이 자유롭다 해도 여전히 묶여있는 것이다. 빠삐용이 악마의 섬에서 탈출에 성공을 했지만 그는 여전히 증오와 복수의 감옥에 갇혀 23년을 살아야 했다. 그런 그가 완전한 해방과 자유를 경험하게 된 것은 용서를 선포하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에게, ‘이 일에 관계된 모든 사람 중에 네가 가장 자유롭고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고 외친 것이다. 그리고 문자 그대로 그는 진짜 빠삐용이 되었다. 빠삐용이란 말은 ‘나비’라는 뜻이다. 용서를 통하여 증오의 사슬, 복수의 감옥에서 벗어나 나비처럼 자유롭게 비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용서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하게 한다.

 

용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다.

주기도문의 다섯 번째 간구,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12)는 용서에 대한 기도다. 이 기도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이 필요한 것처럼 매일의 용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용서의 필요성도 양식의 필요성만큼이나 보편적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육신은 밥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한다. 우리의 영혼도 날마다 필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용서’다. 그래서 날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 한다. 아무리 훌륭한 성인이라도 죄를 짓지 않고 하루를 보낼 수 없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아무리 사소한 죄라도 스스로 해결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일용할 양식처럼 용서를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는 많은 예술품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그 예술품마다 가격이 매겨져 있다. 그런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에는 ‘valueless’라고 되어 있다. ‘무값’(값이 없다)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싸구려라는 뜻이 아니라 값을 매길 수가 없다는 뜻이다. 그 가치를 돈으로 계산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들도 돈으로 계산할 수가 없는 것들이다. 그래서 그냥 ‘은혜’라고 표현한 것이다. 용서도 그 중에 하나다. 하나님께서 그 어떤 조건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죄로부터 용서해 주셨다. 그래서 용서를 말할 때 하나님의 용서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용서의 출발이 나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용서를 받은 우리 역시 용서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데, 우리의 용서는 우리가 용서받은 사람이란 감사로부터 출발한다.

 

거룩한 부담감

그런데 본문은 우리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조건처럼 되어 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만약 우리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조건이라면 하나님의 용서는 은혜일 수가 없다. 아울러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가 없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만큼 완벽하게 용서를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용서에 대한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본문처럼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다(마5:23,24, 6:13,14, 18:35).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간단하게 말하면 이는 용서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얼마나 강력하신가, 하나님께서 용서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시는가를 역설적으로 강조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으로서 용서하는 삶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용서에 대한 ‘거룩한 부담감’을 가지고 살라는 말씀이다. 누구나 은혜를 입으면 갚으려고 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이것이 인지상정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마음과는 달리 보답하는 기회를 놓치게 되고, 그러다보면 잊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주님은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용서의 은혜를 기억하여 이웃을 용서하는 것으로 그 은혜에 보답하라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큰 용서를 받았는지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폴란드인의 상처를 치유하는 집회가 열렸다. 집회에 참석한 독일에서 온 평화사절단 중 한 사람이 말했다. ‘독일이 폴란드에 행한 악행을 용서해 주십시오.’ 순간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얼마 후 한 사람이 말했다. ‘용서는 불가능합니다. 이 땅의 돌 하나하나에 우리 폴란드인의 피가 젖어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독일이 저지른 만행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집회는 더 이상 진행되지 못했다. 그래서 사회자가 주기도문으로 모임을 끝내자고 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를 암송한 후,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약속을 한 것처럼 다음 부분을 암송하지 못했다.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그 때 독일 사람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했던 그 사람이 말했다. ‘당신들의 요구를 수락합니다. 지금 당신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는 더 이상 주기도문으로 기도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신자라고 말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는 용서할 수가 없지만 하나님이 용서하라고 하시니 당신들을 용서합니다.’ 주기도문 다섯 번째 간구를 통하여 용서에 대한 하나님의 강력한 요구를 깨닫고, 용서를 결단한 것이다.

 

용서의 황금률

특히 본문의 경우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기 원하는 사람은 이웃을 용서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이다. 소위 ‘용서의 황금률’을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 기독교 황금률이 무엇인가?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 이것은 이웃에 대한 신자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원칙이다. 누가복음은 이 황금률을 용서에도 적용하고 있다.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눅6:37). 앞에서 소개한 말씀들(마6:13,14, 18:35) 역시 이 황금률에 적용하면 바로 해석이 가능해진다. 한 마디로 ‘이웃을 용서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의 용서를 받으리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심는 대로, 심은 만큼 거두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갈6:7). 용서도 마찬가지다. 이웃을 용서하는 것은 용서를 심는 것이다. 이렇게 용서를 부지런히 심는 사람은 하나님의 용서를 풍성하게 받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용서의 황금률이다.

 

용서(forgiveness=for+giveness)는 누군가를 ‘위해’(for) ‘주는 것’(giveness)이다. 여기서 ‘누군가’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용서는 자신을 위해서 주는 선물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용서의 최대 수혜자는 용서를 받은 사람이 아니라 용서하는 자신이라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더 풍성한 용서를 받는 것은 물론이고, 서두에서 말한 빠삐용처럼, 그리고 폴란드 사람들처럼 증오의 감옥, 복수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누군가(무엇인가)를 용서하지 않는 것은 그 사람에게(그것에) 묶여있는 것이다. 그래서 감정을 낭비하고 인생을 낭비하게 된다. 또한 증오나 복수심은 마음에 불을 품고 있는 것 같아서 나 자신을 해치게 된다. 용서할 때 비로소 그(그것)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내가 먼저

이런 찬양이 있다. ‘내가 먼저 손 내밀지 못하고, 내가 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웃음주지 못하고,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네.’ 이 찬양을 작사/작곡한 사람(최용덕)의 자기고백이라고 한다. 별것도 아닌 일로 친구와 다툼이 있었고, 그 일로 마음이 상한 채 며칠을 보내게 되었다. 자신이 먼저 찾아가서 화해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망설이며 주저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찾아와서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그는 믿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보다 못한 자신에 대한 부끄러운 고백을 이렇게 찬양으로 만든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고백한다. ‘왜 나의 입은 사랑을 말하면서, 왜 나의 맘은 화해를 말하면서, 왜 내가 먼저 져줄 수 없는가? 왜 내가 먼저 손해 볼 수 없는가?’ 대부분 먼저 손을 내밀고, 먼저 찾아가고, 먼저 용서하는 사람이 손해를 보고, 지는 것으로 생각을 한다. 하지만 먼저 용서하고, 먼저 화해하고, 먼저 손을 내밀고, 웃어주고, 받아주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용서는 언제나 현재형이고, 내가 먼저 실천해야 할 일이다. 용서는 사랑의 가장 극명한 실천적 행위다. 용서하지 않고 사랑할 수 없고, 용서하지 않고 사랑한다 말할 수 없다. 사랑은 언제나 ‘미완료형’(미완성)이다. 그런데 용서를 통해 ‘현재형’이 되고, 또한 ‘완료형’이 된다. 용서에는 세 개의 ‘F’가 있다. ‘Forget, Forever, First’ 용서는 상대방의 모든 허물을 ‘잊어버리는 것’(Forget)이다. 그것도 ‘영원히’(Forever)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먼저’(First) 잊어주는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용서하고 또 용서해야 한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고, 주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이고, 주님의 용서를 풍성하게 누리는 비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용서할 때 빠삐용(나비)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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