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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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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1,696회 작성일 15-12-25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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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눅2:1~7, 빌2:5~8

2015. 12/25. 11:00(성탄절)

기적 중의 기적

우리 기독교는 기적의 종교다. 기적이 상식이 된 종교다. 성경에서 기적을 모두 제거한다면 성경의 내용은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많은 기적들 중에 최고의 기적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성탄절’이다. 그 어떤 기적도 이 놀라운 사건에 비견될 수 없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 즉 초월적인 존재가 시간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야말로 어떤 인간의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는 이런 사실을 가르치고, 신자는 이것을 고백하고 믿는 사람들이다.

 

아무튼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선포는 기독교의 핵심적인 신앙고백이다. 그런데 종교개혁자 루터는 이것보다 더 놀라운 기적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처녀 마리아가 자기에게서 성탄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동정녀가 아이를 낳고,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사건 모두 큰 기적이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생각하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들이다. 이에 비해 연약한 처녀 마리아가 자신이 예수님의 어머니로 택함을 받았다는 말씀을 듣고 그것을 그대로 믿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라는 것이다. 특히 루터는 예수님 탄생 당시 사람들의 믿음에 감탄했다. 마리아뿐만 아니라 어떻게 요셉은 마리아에게 잉태된 아이가 성령으로 된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믿고 그녀를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베들레헴 출신 목자들은 어떻게 마구간에서 태어난 아기가 인간의 모습을 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었을까? 그는 마리아와 요셉과 목자들이 보여준 믿음에 경탄(敬歎)과 존경을 표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것도 놀라운 기적이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이 신비를 사람들이 믿었다는 사실은 더 놀라운 기적이라는 것이다. 이 성탄절에 기적 중에 기적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우리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퇴색되어가는 기적의 절기 성탄절

존 데이비는 12월에는 두 개의 성탄절이 있다고 했다. ‘X-Mas’와 ‘Christmas’가 그것이다. 의미를 모르고 그저 분위기에, 혹은 상술에 물든 성탄절은 X-Mas다. X는 부정적인 표시이고, 또한 미지수를 나타내는 말이다. 예수님과의 만남이 아닌, 예수님이 주인공이 아닌, 그 무엇(X)을 위한 모든 것은 X-Mas인 것이다(때문에 Christmas라고 하지 말고 Winterval로 하자, 혹은 Merry Christmas라 하지 말고 Happy Holiday로 하자는 주장도 있다). 이와 같은 성탄절의 세속화는 신자도 마찬가지다. 임마누엘하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기보다 분위기에 휩쓸려 쇼핑하는데 바쁘고, 조용히 주님께서 우리 곁에 오심을 감사하며 묵상하기보다 행사하고 돌아다니는데 바쁘다. 그러다보니 정작 주인공이신 주님은 없고 엉뚱한 것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Christmas가 X-Mas로 변질된 것이다. 이렇게 퇴색되어가는 기적 중의 기적인 성탄의 의미를 바로잡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다. 그래서 이 시간 성탄의 올바른 의미에 대하여 여러분과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성탄의 의미

금년 한 해 우리 사회는 작년 이맘 때 일어난 땅콩회항사건으로 시작된 ‘갑을(甲乙)논쟁’, 지금 이슈가 되고 있는 ‘수저론’(금‧은‧동‧흙‧똥수저)이 대세를 이뤘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약자의 탄식과 신음소리가 점점 높아가고 있는 곳으로 변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이렇게 소수 사람들의 횡포와 다수가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이 형제자매의 얼굴에서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없는 세상은 희망이 없다. 요즈음 유행어 ‘헬(Hell)조선’이란 말은 이런 배경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인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이 땅에 연약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우리 주님의 모습이 더욱 마음에 와 닿는다.

 

사람들은 힘이 있으면 마치 자기가 하나님이라도 된 듯 오만방자해지는데 주님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같으신 분이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6) 않으셨다. 사실 주님은 수퍼두퍼(super-duper) 갑(甲)이셨지만 갑 질이 아니라 도리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고 사람들과 같이’(7) 되셨다. 또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8). 가장 낮은 ‘을’(乙)이 되셨다. 다시 말하면 황금수저이시지만 스스로 ‘똥’수저가 되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탄의 정신이고, 또한 의미다. 빌립보서 본문에 중요한 세 단어가 나온다. 권리포기(6), 비움(7), 낮춤(8)이다. 이것은 주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탄사건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만물의 주인이신 분이 산모를 위해 방하나 얻을 만한 능력도 없는 가난한 목수 요셉의 아들이 되시고,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 되시는 분이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탄생하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의 탄생에 비천한 목자들이 첫 축하객이 된 것 등 이 모두가 이 사상을 반영한다. 그리고 주님의 삶 전체를 특징적으로 보여준다. 성탄은 채우는 것만이 가치가 있고, 더하는 것만이 경쟁력이고, 화려함이 아름다움이고, 성공이 행복이라는 일상의 상식을 뒤집어놓은 거룩한 ‘비움’의 사건이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이렇게 자기를 비운 비천한 모습으로 이 땅에 탄생하신 것일까? 신학자들은 주님의 이 ‘자기 비움’(κενώσις)을 우리와 함께 ‘참여’, 우리와 ‘연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라고 한다. ‘참여-연대-유익’이 자기 비움의 신학적인 의미라는 것이다. 성탄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한 단어로 정리하면 ‘사랑’이다. 주님의 자기 비움 사건인 성탄의 목적은 사랑이다(요3:16). 우리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서 자기 권리를 포기하고,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낮춘 것이다. 저와 여러분을 향한 이와 같은 주님의 사랑은 성탄에서 시작하여, 비참한 생애,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에서 절정을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나를 향한,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성탄절이다. 성탄절은 ‘내가 너를 이만큼(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비우고, 죽기까지) 사랑한단다.’는 주님의 사랑고백이다. 금번 성탄절에 이와 같은 주님의 애끓는 사랑의 고백에 귀를 기울여보기 바란다. 이 사랑을 경험해보기 바란다.

 

성탄을 경험한 사람의 삶

스포츠의 구호로 ‘더 멀리, 더 높이, 더 빨리’가 있다. 이것은 스포츠에만 해당되는 구호가 아니다. 여기에 ‘더 많이’를 덧붙이면 완벽하게 현대인의 구호가 된다. 하지만 신자의 구호는 ‘더 낮게, 더 느리게, 더 가까이, 더 적게’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성탄을 통해 주님께서 보여주신 자기 비움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헨리 나우웬은 인생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채움을 위한 오르막이고, 다른 하나는 비움을 위한 내리막이다. 오르막은 자기 확대(장)의 길이고, 내리막은 자기 축소(부인)의 길이다. 오르막에는 세속적인 성공과 번영이 약속되어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곳에서는 주님을 발견할 수가 없고, 내리막에서만 주님을 볼 수가 있고 만날 수가 있다고 했다. 주님은 철저하게 자기를 비우시고 낮추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마태는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기 위해 찾아온 동방박사 이야기를 매우 의미심장한 말로 끝을 맺고 있다.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마2:12). 박사들이 성령의 지시로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갔다는 것이다. 평범한 말 같지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주님을 만난 사람, 즉 성탄을 경험한 사람의 모습이 이래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길, 곧 다른 방법, 다른 삶의 태도, 다른 가치, 다른 삶의 목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탄은 그 자체가 강력한 메시지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를 실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세상과 다른 길, 곧 주님이 보여주신 채우는 삶이 아니라 비우는 삶, 올라가는 삶이 아니라 스스로 낮아지는 삶, 자기를 확장하고 확대하는 삶이 아니라 자기를 부정하고 부인하는 삶이다. 자기 권리를 내려놓고,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낮춰야 주님이 보이고, 또한 주님이 사랑하시는 다른 사람이 보인다. 다른 사람을 품을 수가 있고, 또한 사랑할 수가 있다. 사랑은 다른 사람과 눈높이를 맞추는 데서부터 시작이 된다. 그래서 주님이 스스로 자기 비움의 길을 선택하셨던 것이다.

 

나 아저씨 눈 할래!

한 남자가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실려 왔다. 다행이 목숨은 건졌지만 의식이 돌아오자마자 그는 절망에 빠졌다. 사고는 그의 두 눈을 앗아가 버렸다. 의사를 붙들고 절규했지만 의사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그의 등만 쓸어주었다. 안구이식을 하는 것 말고는 가망이 없는 상태였다. 그는 곧 일반병실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한 꼬마소녀를 만났다. 옆 침대에 입원중인 소녀는 놀아줄 친구라도 만난 듯 반가워했다. 소녀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다가와 두 눈에 붕대를 감고 있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누구와 말을 주고받을 만큼 그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소녀가 성가시게 느껴졌다. 이제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눈을 감싸고 흐느꼈다. 그러자 소녀가 곁에 와서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아저씨, 울지마. 엄마가 그러는데 울면 병이 안 낫는데.’ 그 날 이후, 그는 그렇게 다가와 손을 잡아주고 말을 붙여준 소녀와 단짝이 되었다. 함께 정원을 산책하기도 하고, 벤치에 앉아 이야기도 주고받았다. 그런데 남자와 일곱 살 꼬마소녀의 이별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그가 퇴원을 하게 된 것이다. 소녀는 자기가 퇴원할 때 꼭 오라고 했고, 그는 퇴원하는 날 꼭 예쁜 꽃을 사가지고 오겠다고 손가락을 걸며 약속을 했다. 그로부터 몇 주후, 병원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안구기증자가 나타났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뛸 뜻이 기뻤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이제 그는 잃었던 빛을 다시 찾았다. 그 때 병원에서 기증자가 보낸 편지 한 통을 건네주었다. 그는 편지를 보고 가슴이 무너졌다. 그 편지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이렇게 씌어있었다.

 

아저씨, 나 아무래도 아저씨랑 결혼은 못 할 것 같애. 그래서 아저씨 눈 할래.

 

일곱 살 꼬마소녀가 하늘나라로 가면서 마지막으로 그에게 준 것은 세상에서 가장 맑은 눈이었고, 가장 밝은 빛이 없고, 가장 아름다운 세상이었다. 우리 예수님의 오심이 이와 같다.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에게 빛이 되기 위해서, 사랑의 빛, 은혜의 빛, 생명의 빛, 구원의 빛이 되시기 위해서, 눈을 잃은 우리에게 눈이 되고, 손을 잃고 발을 잃은 우리에게 손이 되고 발이 되기 위해, 굶주린 우리에게 밥이 되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 우리를 너무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으로 품기 위해서 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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