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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의 기술, ‘마음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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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059회 작성일 16-01-24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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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의 기술, ‘마음열기’

창32:3~12

2016. 1/24. 08:00, 11:00

마음을 열어야 한다.

멀리 있어도 통하는 사람이 있고, 가까이 있어도 통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먼저 움직여야 한다. 내가 먼저 마음을 열어야 한다. 관심을 가지고 먼저 전화를 걸고, 먼저 문자를 보내야 한다. 먼저 웃어주고, 먼저 다가가고, 손을 내밀고, 안아주어야 한다. 그러면 소통이 시작된다. 아폴로 11호를 타고 달 착륙에 성공한 우주비행사 버즈 올드린(B. Aldrin)이 에스콰이어와 인터뷰를 하였다. 기자가 이렇게 물었다. ‘우주도 갔다 왔으니 이제 인간에게 남은 마지막 개척분야는 어디일까요?’ 그러자 올드린이 대답했다. ‘아마 인간관계가 아닐까 싶군요.

 

동문서답 같지만 아주 중요한 대답이다. 지금 우리는 무엇이든 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데 도무지 우리 마음대로 안 되는 것, 도대체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인간관계다. 인간관계야말로 아직도 미개척 분야다. 누구도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오해와 갈등이 생기고, 관계가 어려운 과제로 남게 된 것이다. 서점에 가보면 인간관계와 관련된 책들이 아주 많다. 이는 그만큼 인간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이고,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 해답이 없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마음을 여는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세상이 팍팍하고 암담하다고 말한다. 온통 삭막한 사막이고, 열린 감옥이라고 하소연을 한다. 가장 큰 이유는 본인이 눈을 감고, 귀를 막고, 마음을 닫고 있기 때문이다. 눈을 감고 있으니까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귀를 막고 있으니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마음을 닫고 있으니까 모든 것이 답답하고 삭막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세상 탓, 남 탓하기에 앞서 자신을 먼저 돌아봐야 한다. 눈을 열고, 귀를 열고, 마음을 열어야 한다. 그러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리고, 답답한 것들이 뻥 뚫리게 된다. 소통이 이뤄지게 된다. ‘통즉불통’(通卽不痛)이라고 했다. 통하면 고통이 사라진다는 뜻이다. 모든 고통의 원인은 불통에 있다. 그러니 마음을 열어야 한다. 열어서 통해야 한다. 본문에 불통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한 사람이 소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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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를 바라시는 하나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즐거운 길이다. 이것은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익숙한 일이다. 그러나 그 길이 즐겁지는 않은 사람도 있다. 좋지 않은 모습으로 집을 떠난 사람이다. 본문의 주인공 야곱이 그랬다. 그는 지금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귀향길에 올랐지만 마음이 편치 못했다. 20년 만의 귀향인데도 말이다. 그에게는 해결해야할 숙명적인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형 에서와의 화해다. 20년 전, 그는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형의 축복을 가로챘다. 그리고 형을 피하여 외삼촌 집으로 도망쳤다. 그 세월이 벌써 20년이 되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지만 그것은 세월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돌아가면 이 문제부터 해결해야했기 때문에 귀향이 즐겁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두려웠다. 이런 두려움이 지난 20년 동안 외삼촌이자 장인인 라반에게 계속 속임을 당하면서도 참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라반의 부당한 착취를 피해 집으로 돌아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도 형의 복수에서 자신과 가족의 생명을 보장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야곱의 딜레마다. 아니 죄인의 딜레마다.

 

이런 이유로 귀향을 미루고 있는, 아니 귀향을 못하고 있는 그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신 것이다.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창31:3). 두려워하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제 네 형 에서와 화해하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야곱은 20년 전 자기 집을 떠나 올 때처럼 라반 몰래 라반의 집에서 도망을 쳤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라반이 추격하자 하나님께 직접 해결해 주셨다(31:). 하나님께서 라반에게 ‘그를 막지 말고 보내라.’(창31:24)고 명령하셨다. 그리고 그가 조상의 땅, 가나안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의 군대가 그를 맞아주었다(창32:1). 그래서 그가 그곳 이름을 ‘마하나임’이라고 했다(:2).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뜨겁게 맞아준 아버지처럼 그의 귀향을 하나님께 천사들을 보내 열렬히 환영해주셨다. 이런 사건들을 통하여 화해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그 간절한 마음을 볼 수가 있다. 그것도 야곱이 먼저 형 에서에게 다가가서 용서를 구하고 화해하기를 원하신다. 이는 그가 형에게 상처를 주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용서나 화해는 믿음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이 먼저 실천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두려워하는 야곱

미국의 유명한 설교가 헨리 비처(H. Beecher)의 말이다. ‘우리는 날마다 두 개의 손잡이를 잡고 하루를 살게 된다. 하나는 두려움의 손잡이요, 다른 하나는 믿음의 손잡이다.’ 아침마다 우리는 눈을 뜨면 두 개의 손잡이를 마주하게 된다. 두려움의 손잡이를 열어 불안(염려)의 방으로 들어갈 것인가? 믿음의 손잡이를 열어 평안(용기)의 방으로 들어갈 것인가? 늘 선택을 하게 된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는 두려움의 손잡이를 열어 불안의 방으로 들어간다. 어쩌면 이것이 당연하다. 믿는다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믿음은 작고 연약하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에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야곱도 그랬다. 분명히 고향으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라반과의 문제를 통쾌하게 해결해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했다. 자신을 돕기 위해 환영 퍼레이드를 펼치는 하나님의 군대를 만났다. 하지만 두려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형에게 전령을 보내 자신의 돌아옴을 알리고 은혜를 구하도록 했다. 그런데 전령이 돌아와 형이 400명의 장정과 함께 오고 있음을 알렸다(6). 그는 이 보고를 듣고 극도의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했다. 우선 모든 재산을 두 떼로 나누었다. 한 떼를 치면 다른 한 떼라도 피하하기 위해서였다(7,8). 어떤 사람들은 이런 그의 태도를 하나님의 보호와 신뢰의 부족 때문이라고 말한다. 저는 오히려 문제에 직면했을 때 우리가 취해야할 바람직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그의 행동이 여기에만 머물렀다면 이런 평가가 가능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곧바로 기도하였다. 하나님께 무릎을 꿇었다. 그래서 32장에는 그의 간절한 기도가 두 번이나 나온다.

 

두려움을 용기로

〈명량〉이라는 영화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순신 장군이 전투를 앞두고 깊이 고뇌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의 고뇌는 적은 수의 병사, 배, 무기와 같은 외적인 것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병사들과 지휘관들의 마음속에 독버섯처럼 퍼져 있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두려움 때문에 병사들이 배에 불을 지르고, 탈영을 하고, 심지어는 지휘관들도 도망을 쳤다.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서 그랬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이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 있을까?’를 고민하였다. 두려운 것은 적도 마찬가지니까 어떻게 이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느냐가 관건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 그는 두려움을 용기로 바꿔서 불가능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것은 야곱의 문제이기도 했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두려움은 가공할 힘을 가지고 있다. 나폴레옹 힐은 ‘두려움은 모든 논리, 모든 상상, 모든 자신감, 모든 열정, 모든 의욕을 없애버리는 힘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두려움은 우리를 아주 초라하고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린다(왕상19장의 엘리야).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치명적인 적이 두려움이다. 두려운 일이 있으면 깊이 숨어버린 것처럼 두려움은 마음을 닫게 만든다. 그래서 모든 관계를 차단시킨다. 그런데 야곱은 이런 두려움에 마음을 닫지 않고, 어떻게든 형을 만나려고 준비를 했다. 두려움에 무릎을 꿇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용기로 바꾸었다. 그렇다면 그가 어떻게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고, 도리어 마음을 활짝 여는 계기로 만들었을까? 그것은 ‘기도’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취하면서 기도했다(7~11). 그리고 또 행동을 취했고(13~23), 또 기도했다(24~32).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기도, 둘 다 놓치지 않고 최선을 다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두려움을 대처하면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래서 32장의 야곱과 33장의 야곱을 비교하면 그 태도가 확연히 다르다.

 

닫힌 마음을 기도로 연다.

기도는 두려움으로 닫힌 내 마음을 열어줄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닫힌 마음도 열어준다. 33장에서 야곱과 에서의 감동적인 화해가 이뤄진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본래 성급하고, 엇나가기 잘하고, 혈기 잘 부리는 에서가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을까? 세월이 그를 변화시켰을까? 야곱이 보낸 많은 선물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야곱이 넙죽 엎드려 절을 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사람은 자기 능력으로 변하지 않는다. 세월이 흐른다고 변하지 않는다. 또한 에서가 선물을 사양한 걸 보면, 선물에 눈멀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하나님이 에서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라고. 하나님이 에서의 마음을 녹였기 때문에 동생을 끌어안을 수 있었다고.

 

그렇다. 에서의 마음을 움직이고 녹인 분은 하나님이시다. 동생의 용서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의 마음을 활짝 여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이런 면에서 용서와 화해는 하나님의 작품이다. 야곱에게 용서의 길로 나가라고 말씀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형에게 나아갈 수 있도록 용기와 확신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야곱은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기 위해서, 두려움 때문에 마음이 닫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또 기도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기도는 자신의 마음은 물론 형의 마음까지 활짝 열리게 하였다. 하나님께 그의 기도에 이렇게 응답해 주신 것이다. 우리에게는 열어야 할 문이 많다. 그것들이 꽁꽁 닫혀 있기 때문에 인생이 꼬이고, 관계도, 가정도, 하는 일도, 영적 생활도 꼬인 것이다. 야곱처럼 기도하고, 또 기도하여 닫힌 것들이 모두 열리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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