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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만남, 아름다운 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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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1,435회 작성일 16-01-31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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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만남, 아름다운 화해

창33:1~11

2016. 1/31. 08:00, 11:00

가장 불편한 장애물

가난한 사람들의 대부 돔 헬더 까마라(dom helder camara) 브라질 대주교가 캘리포니아 버클리의 한 교회에서 대중 강론을 했다. 강론을 마쳤을 때, 그는 이런 질문을 받았다. ‘신부님은 암살위협도 받았고, 정부의 반대도 받았고, 심지어 교회 안에도 미워하는 세력이 있었는데, 그 모든 일을 겪으면서 무엇이 가장 다루기 힘든 적이었습니까?’ 그는 말없이 손을 들어 머리 위에서 천천히 원을 그리다가 손가락으로 자기 가슴을 가리키고 나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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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내 가장 고약한 적입니다. 아주 다루기 힘든 상대지요. 바로 여기가 평화를 위한 내 투쟁의 가장 격심한 전장(戰場)입니다.

 

가장 다루기 힘든 적, 가장 불편한 장애물이 자기 자신이었다는 뜻이다. 그렇다. 흔히 우리는 장애물을 다른 사람이나 주변에서 찾는데, 모든 일에 가장 불편한 장애물은 자기 자신이다. 다른 사람이나 주변 탓이 아니라 내 탓이다. 이것은 야곱도 마찬가지다.

 

불확실성과 두려움

본문은 야곱이 그의 형 에서와 20년 만에 만나 극적인 화해를 이루는 눈물의 상봉장면이다.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에 하나다. 서로 화해하여 화목한 것처럼 아름다운 것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야곱이 그의 형 에서와 화해를 이루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장 큰 장애물은 야곱 자신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400명을 데리고 오는 형 에서 때문에 극심한 두려움에 떨었다(32:7). 성경을 살펴보면, 그가 지금 어쩔 줄 몰라 하는 두려움은 사실 이유가 없는 것이다. 성경은 그냥 에서가 오고 있다고만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에서의 행동을 자기를 죽이려고 온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그가 스스로 그렇게 해석한 것이다. 사실 에서의 어떤 모습에서도 이런 태도를 볼 수가 없다. 문제는 지금 그가 하나님의 강권하심으로(31:3) 형과 화해하기 위해 귀향하고 있지만 그에게는 형이 자신을 받아줄 것이란 확신이 없었다. 하나님은 계속 그에게 확신을 갖도록 역사하셨지만(31:3,24, 32:2) 그는 여전히 확신을 갖지 못했다. 그래서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는 속담처럼 에서의 행동에 이런 과민한 반응을 보이게 된 것이다.

 

불확실성과 두려움’, 이것이 그가 형과 화해하려고 하는데 가장 불편한 장애물이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야곱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이 불확실성을 확신으로 바꾸고 두려움을 떨쳐내는 일이다. 지난 주에 말씀 드린 대로 야곱은 이 일을 아주 성공적으로 잘해냈다. 우선 최선을 다해 자신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또 드렸다. 특히 절박하고 간절하게 기도를 드렸다. 한자로 ‘祈禱’(기도)라는 단어 자체가 절박함과 간절함을 내포하고 있다. 기도에서 빌 ‘’(祈)는 보일 ‘시’(示)와 도끼 ‘근’(斤)으로 되어 있다. 옛 글자에는 가운데 양 ‘양’(羊)자가 있었다고 한다(祈=示+羊+斤). 여기서 ‘示’(시)는 제단을 본떠서 만든 상형문자다. 그러니 ‘祈’(기)는 양을 제물로 드리기 위해 제단에 올려놓고 도끼로 죽이는 모습이다. 빌 ‘’(禱)는 示(시)와 목숨 ‘수’(壽)로 자신의 생명을 제단에 드리는 모습이다(禱=示+壽). 그러므로 기도는 자신의 생명을 내놓을 만큼 간절하고 절박하게 드려야한다는 뜻이다. 이런 기도라야 응답을 받을 수 있다. 야곱은 얍복강 가에서 이런 기도를 드렸고, 또한 응답을 받았다(32:24~32). 아무튼 이 불확실성과 두려움이 그를 더욱 간절하게, 더욱 절박하게 주님 앞에 무릎을 꿇게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두려움 때문에 비겁하게 뒤로 숨지 않고 용기 있게 앞으로 나서게 되었다(3). 비록 다리는 절고 있었지만 어느 때보다 당당한 모습으로 에서를 향해 걸어갔다. 그는 더 이상 남의 ‘발뒤꿈치나 붙잡는’ 야곱이 아니라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이스라엘이 되었기 때문이다.

 

화해의 조건

용서와 화해는 차이가 있다. 용서는 일방통행이고, 화해는 쌍방통행이다. 용서는 피해자의 특권이라는 말이 있듯이, 상대방과 관계하지 않고도 나 혼자 할 수 있다. 하지만 화해는 상대방의 의사에 따라 이루어진다. 상대방을 직접 만나 진실과 사실, 잘잘못을 따지고 나서, 서로 수용하고,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용서할 때 이루어진다. 야곱이 불편하고 두렵지만 에서를 만나야 했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형과 화해하기 위해서다. 특히 본문에 야곱이 형과의 화해를 위해 취한 행동이 나온다. 이들이 곧 화해를 위한 중요한 조건이다.

 

우선, 야곱은 절을 하며 형에게 나아갔다.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3). 이것은 극도의 존경의 표시다. 고대근동에서는 신이나 왕, 점령자에게 존경의 표시로 얼굴이 땅에 닿을 만큼 몸을 숙여 절을 하였다. 그리고 한곳에 머물러 서서 한 것이 아니라 차츰 가까이 가면서 계속적으로 절을 했다. 계속 얼굴이 땅에 닿도록 몸을 숙여 절을 하면서 나아갔다. 지금 야곱이 형에게 그렇게 하고 있다. 여기서 일곱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숫자가 아니라 절차상 ‘완전’을 의미한다. 형에게 가까이 접근하면서 계속적으로 절을 하였다는 뜻이다. 이렇게 형에게 최대한 존경을 표하면서 자신을 한없이 낮춘 것이다. 사실 야곱과 에서는 나이 차이가 없는 쌍둥이다. 게다가 아내들과 자녀들, 종들, 그리고 에서를 따르고 있는 사람들이 다 보고 있는 앞에서 쌍둥이 형에게 이렇게 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받기 위해서였다. 화해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이렇게 자신을 철저하게 낮춘 것이다. 화해는 야곱처럼 자신을 겸손하게 낮출 때 일어난다. 교만은 연기처럼 주변을 고통스럽게 하지만 겸손은 향기처럼 주변을 행복하게 한다. 때문에 교만한 사람이 있으면 갈등이 일어나게 되고, 겸손한 사람이 있으면 화해(목)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 무장을 해제하고 항복하며 겸손하게 엎드리면 더 이상 갈등이 있을 수 없다.

 

다음으로, 야곱은 형에게 은혜를 구했다.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8). 야곱은 형의 마음을 얻기 위해 많은 양의 선물을 보냈다(32:14,15/ 암염소 200마리, 숫염소 20마리, 암양 200마리, 숫양 20마리, 낙타 30마리, 암소 40마리, 황소 10마리, 암나귀 20마리, 새끼 나귀 10마리). 에서가 부담을 느낄 만큼 많은 양이었다. 그래서 에서가 야곱에게 ‘내가 만난 이 모든 떼는 무슨 이유냐?’고 물었고, 야곱은 형의 은혜를 입고 싶어 보낸 선물이라고 했다. 받아서 기분이 좋으면 선물이고, 부담이 되면 뇌물이라는 어떤 사람의 말처럼 이 정도의 양이면 선물이라기보다 뇌물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 같다. 사실 선물과 뇌물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선물을 히브리어로 ‘마타나’(מתנה)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뇌물’이란 뜻도 포함되어 있다. 그렇다면 야곱이 이렇게 많은 양의 선물을 보낸 이유가 무엇일까? 여기엔 야곱의 어떤 마음이 있는 걸까? 그것은 용서의 ‘간절함’과 화해의 ‘절박함’이다. 형의 마음을 얻어서, 형의 용서를 받고, 형과 화해하는 일이 이 정도로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또 하나 화해의 조건이다. 화해의 중요성을 알고, 그것을 위해 기꺼이 대가를 치룰 때 화해를 경험할 수가 있다. 화해는 그냥 이뤄지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화해는 반드시 이뤄야 할 소중한 일이다.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만도 엄청난 스캔들인데, 흉악범처럼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하셨다. 화해를 위해 친히 자신이 희생의 제물이 되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 우리와 우리, 그리고 우리와 만물 사이에 화해의 길을 여신 것이다.

 

하나님의 얼굴

본문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야곱과 에서가 ‘서로 목을 안고 우는’(4) 모습이고, 가장 인상적인 말은 야곱이 에서에게 ‘형님의 얼굴을 보니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다.’(10)는 표현이다. 여기서 형님의 얼굴을 보니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다는 야곱의 말은 형의 마음을 얻기 위한 아부나 입 서비스가 아니다. 변화된 야곱의 모습을 보여주는 말이다. 불과 하루 전만 해도 야곱에게 에서는 자신과 가족의 생명을 위협하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하루 사이에 두려움의 대상이 하나님의 얼굴로 바뀐 것이다. 이것은 에서가 바뀐 것이 아니다. 에서는 어제의 에서 그대로였다. 어제 전령이 보고했던(32:6) 대로 400명의 장정과 함께 오늘 야곱 앞에 나타났다(1). 문제는 그런 에서의 얼굴이 야곱의 눈에 하나님의 얼굴로 보인 것이다. 어제의 상황과 오늘의 상황, 어제의 환경과 오늘의 환경이 똑 같은데 전혀 다르게 보이고, 다르게 해석이 되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야곱이 변했다는 뜻이다.

 

극심한 갈등을 겪다 해어진 부부는 서로 말소리만 들어도 토할 것 같고, 얼굴을 보는 것 자체가 화가 나고 끔찍하다고 한다. 그런 사람과 한 공간에서 산다는 것이 하루하루가 지옥처럼 느껴져 숨이 잘 안 쉬어진다고 한다. 그렇지 않고 어떻게 자식을 두고 갈라설 수가 있겠는가? 이혼하면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도 큰 상처를 받는데도 그것을 감수하면서까지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말 견딜 수 없으니까. 정말 끔찍하니까 갈라서는 것이다. 그 사람 아니면 못살겠다며 결혼한 부부가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이것은 상대방이 변해서가 아니다. 상대방에 대한 내 마음이 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렇게 보이고, 그렇게 느껴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 내가 변하면 주변이, 다른 사람들이 전혀 다르게 보이고, 다르게 해석이 된다. 내 마음이 감사로 가득하면 마른 떡 한 조각만으로도 만족하고, 내 마음이 천국이면 움막에 살아도 천국을 누린다. 내 마음이 은혜로 충만하고, 사랑으로 충만하면 온 세상과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보인다. 지금 야곱이 그랬다. 그렇게 자신의 마음이 변하니까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형님이 하나님처럼 보였고, 하나님을 만난 것처럼 반갑고 감격스러웠던 것이다. 이것 또한 화해의 중요한 조건다. 동시에 화해한 사람에게 주어진 복이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12:14). 여러분, 곁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보이는가? 그것이 지금 여러분이다. 이렇게 고백해보자. ‘당신의 얼굴을 보니 주님의 얼굴을 뵌 것 같습니다!’ 서로에 대한 우리의 마음이 이렇게 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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